결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현애에게
바야흐로 결혼의 계절이다. 10월에만 매주 결혼식에 참석했고(심지어 첫 주에는 두 건이었다) 11월의 매주 주말도 결혼식이 날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도 나를 비롯해 결혼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올해도 여지없이 가을은 엄청난 결혼식을 예비하고 있군.
네가 울산에 내려간 이후로, 항상 메일이나 싸이홈피를 통해서만 소식을 전했다. 지난번 울산 갔을 때 본 것말고는 오랫동안 얼굴도 못 봤지. 벌써 11월을 앞두고 있구나. 11월 너의 결혼식을 말이다. 누구도 결혼할 거라 예상치 않았던 너의 결혼식을 앞두고 보니, 이런저런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지면을 대신해 네게 편지를 쓰고픈 맘이 생기더라고. 때로 결혼은 여성의 독립하고픈 욕망과 결부되어 결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이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동거인을 정하고 그와 함께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인데, 과연 우리한테 얼마나 이익이 되는 것일까? 새삼스레 그런 질문이 떠오르더라. 어른들은 매번 결혼이 '다 널 위해서'라고 말씀들을 하시고 또 우리는 전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결국 결혼을 하는 것일까? 결혼을 결심하고서 우리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네가 미니홈피에 써놓았던 글을 잠시만 옮겨볼까?
"결혼이란 걸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젤로 하기 싫은 것이 결혼식이다. 그냥 같이 살면 안 되나? 결혼식이란 걸 해야 하나… 하지만 그 결혼이라는 걸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내 맘대로 살겠다던 나의 포부와 자유인이 되겠다던 굳은 결심을 이미 배신한 것이기에 그것은 이 사회의 제도와 관행 속으로 내 삶을 맞추어 나가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결혼식에서 내가 젤로 하기 싫은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이다. (…) 그리고 하기 싫은 게 그 드레스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거다. 내가 뭐 동물원 원숭이인가. 나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 반갑게 맞고 인사도 하고 싶다.
그 다음 싫은 건, 주례사다. 물론 훌륭하신 선생님 혹은 존경하는 인생의 선배들의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 저런 사정 이러저러한 환경에 맞추다 보면, 그 앞에 서 있는 분이 내가 그리 존경하지도 않는 이의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결정적으로 사람들 아무도 그거 안 듣는다.
하지만,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이것들을 피해갈 방법은 그리 없는 듯하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예쁜 결혼식 옷은 예식장에서 어중이떠중이 다 빌려 입는 웨딩드레스보다 훨씬 훨씬 돈이 많이 든다. 주례가 싫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축사로 대신해보려 했으나, 부모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싸우자니 괴롭고, 안 싸우자니 짜증나고.
결혼의 제도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자의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결혼식만 해도 내 의지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것. 실질적인 결혼생활을 시작도 하지 않은 시점에서, 결혼식 자체가 이만큼의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것은 결혼 자체가 갖는 엄청난 어려움, 그걸 알리는 서막에 불과한 것이란 생각도 들더군.
가사노동 분담, 관리, 스트레스의 악순환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히 해야겠지. 결혼 제도 속으로 자신을 편입시킨다고 해서, 모든 제도에 영합하면서 결혼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 말이야. 두 집안의 결합이라는 둥, 두 가족의 결합이라는 둥 해도, 결국은 두 사람의 결합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고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하는 게 결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생각이지. 사실 나도 그러했고. 그것 하나에 의지하고 결혼을 결심하지만, 사실 결혼에서 그 두 사람의 관계 또한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대화, 토론, 논쟁, 설득, 비난, 비판, 기타 등등의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싸움은 싸움이지. 치열하고 끈기 있게 해나가야 한다. 지겨울 정도로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동거인이 책임을 느끼도록 하고 주체적 행동을 요구하는 것.
가사노동만 하더라도, 가사노동의 역할분담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적어도 결혼 후 적정한 역할분담을 시도했던 기혼여성들이라면 아마 한숨부터 쉴 걸? 애초에 계획했던 가사노동 분담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모호해지고, 어느 날인가 집안정리, 빨래, 설거지와 청소, 냉장고 관리 때문에 쉴 수 없이 움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다. 게다가 가사노동 분담 자체도 어렵지만, 분담해야 할 일거리 목록을 작성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제대로 되는지 파악하는 것 등 가사노동 '관리'도 장난 아니게 스트레스 받는 모두가 '일 일 일'이다. 이런 일들이 쌓여가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커지면 주부우울증 같은 병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겠지. 누군가가 말하길, 결혼과 동시에 여성들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더군. 출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성들이 결혼하면서 그만큼 가사노동과 가정사를 관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높아진다는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결국 우울증조차도 절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야. 함께 사는 동거인이 자발적으로 가사노동의 공동분담을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너나 나조차도 우울증의 가능성을 아예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 어째 좀 으스스해지는군.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한, 그것도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한 대안은 무엇이 있는 것일까?
관계와 역할에 대한 명확한 규정짓기
때때로 후배, 선배, 동기들과 서로에 대해 수다를 떨 때가 많잖아. 나는 이 수다의 힘을 대학 때까지만 해도 거의 느끼지 못했거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서로를 드러내는 것이고,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 탐탁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았어. 그래서 가장 절친한 후배인 너에게조차도 닫혀있다고 느껴서, 네가 항상 나를 타박했잖아. 나를 대화할 땐, 항상 너만 말하게 된다고. 요즘은 지인들과의 수다가 내가 빠져있는 곤경에서 나를 구해줄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들더군. 얼마 전에 후배 한 친구와 저녁 먹으면서 결혼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지. 누구는 언제 결혼한다더라, 누구는 언제 임신했다더라 등 사람들의 근황도 묻곤 했어. 그 와중에 후배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그러니깐, 나쁜 여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니까. 착한 여자, 착한 며느리가 되겠다고 하면 해답이 없어."
나는 속으로 아차!했다. 왜 여태 나는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런 생각을 왜 까맣게 잊고 있었지? 결혼이라는 제도에 나 자신을 가두게 되면서, 나는 한 발짝도 그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제도가 나에게 요구하는 '착한 딸,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의 굴레를 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친정에서 요구하는 '착한 딸'의 역할은 결국 남편에게 잘하고 아이를 빨리 낳는 착한 여자고 그게 효도라고들 하시지, '딸'의 역할이라는 것도 결국 시댁과 남편과의 관계에서 보전되는 것이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생각조차 못했지, 라는 건 나 자신이 이미 결혼의 습속에 점차 의존하고 있다는 건 아닐까 하는 자각도 되더라고. 결혼식을 내 의지대로 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혼생활조차 내 의지대로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잖냐. 수많은 관계가 얽혀있지만 결국 내가 주체인 나의 결혼생활에서, 내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가진 이들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뿐인 듯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할 수 없는 역할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인간관계의 도리라면 도리 아닐까.
결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어쩌면 결혼 1년이 다 되가는 나조차도 해답을 찾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결혼식을 앞둔 너를 더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하지만, 결혼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절대로 방어적이거나 수세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든 우리의 의견을 피력하고 설득하고 행동하는 것이어야겠지. 결혼한다는 것이 그 모든 우리의 권리를 무덤 속에 파묻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적어도 너의 선택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혹은 더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싸움은 더 치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
결혼은 그야말로 현실과 일상과의 싸움이니, 전장에 오게 된 너를 나는 환영할 따름이다. 우리 함께 잘 싸워보자. 그래서 우리 나중에는 '결혼한 여성 활동가 모임' 같은 것도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미 출산경험이 있는 후배, 친구들과 '출산과 양육을 고민하는 진보적 여성들을 위한 지침' 같은 것도 만들어보고 수다방도 조직해볼까? 너는 울산에서, 나는 서울에서 그런 구상들을 조금씩 구체화시키는 건 어떨 것 같아? 나도 이젠 말 많이 하도록 노력해볼게. 우리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질 수 있게. 너의 목소리와 공명할 수 있게 말이다. 신혼여행 갔다오면 꼭 답장해라. 무엇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너의 결혼생활을 기원한다.
2005년 10월
바야흐로 결혼의 계절이다. 10월에만 매주 결혼식에 참석했고(심지어 첫 주에는 두 건이었다) 11월의 매주 주말도 결혼식이 날 기다리고 있다. 작년에도 나를 비롯해 결혼을 한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올해도 여지없이 가을은 엄청난 결혼식을 예비하고 있군.
네가 울산에 내려간 이후로, 항상 메일이나 싸이홈피를 통해서만 소식을 전했다. 지난번 울산 갔을 때 본 것말고는 오랫동안 얼굴도 못 봤지. 벌써 11월을 앞두고 있구나. 11월 너의 결혼식을 말이다. 누구도 결혼할 거라 예상치 않았던 너의 결혼식을 앞두고 보니, 이런저런 만감이 교차한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지면을 대신해 네게 편지를 쓰고픈 맘이 생기더라고. 때로 결혼은 여성의 독립하고픈 욕망과 결부되어 결정되기도 하고, 때로는 노후를 대비하기 위한 대책이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동거인을 정하고 그와 함께 생활을 하겠다는 결심인데, 과연 우리한테 얼마나 이익이 되는 것일까? 새삼스레 그런 질문이 떠오르더라. 어른들은 매번 결혼이 '다 널 위해서'라고 말씀들을 하시고 또 우리는 전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결국 결혼을 하는 것일까? 결혼을 결심하고서 우리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몇 가지나 될까? 네가 미니홈피에 써놓았던 글을 잠시만 옮겨볼까?
"결혼이란 걸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젤로 하기 싫은 것이 결혼식이다. 그냥 같이 살면 안 되나? 결혼식이란 걸 해야 하나… 하지만 그 결혼이라는 걸 하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내 맘대로 살겠다던 나의 포부와 자유인이 되겠다던 굳은 결심을 이미 배신한 것이기에 그것은 이 사회의 제도와 관행 속으로 내 삶을 맞추어 나가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결혼식에서 내가 젤로 하기 싫은 것은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이다. (…) 그리고 하기 싫은 게 그 드레스 입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거다. 내가 뭐 동물원 원숭이인가. 나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 반갑게 맞고 인사도 하고 싶다.
그 다음 싫은 건, 주례사다. 물론 훌륭하신 선생님 혹은 존경하는 인생의 선배들의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싫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조건 저런 사정 이러저러한 환경에 맞추다 보면, 그 앞에 서 있는 분이 내가 그리 존경하지도 않는 이의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다. 결정적으로 사람들 아무도 그거 안 듣는다.
하지만, 이래저래 알아본 결과 이것들을 피해갈 방법은 그리 없는 듯하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예쁜 결혼식 옷은 예식장에서 어중이떠중이 다 빌려 입는 웨딩드레스보다 훨씬 훨씬 돈이 많이 든다. 주례가 싫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축사로 대신해보려 했으나, 부모님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싸우자니 괴롭고, 안 싸우자니 짜증나고.
결혼의 제도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자의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결혼식만 해도 내 의지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것. 실질적인 결혼생활을 시작도 하지 않은 시점에서, 결혼식 자체가 이만큼의 스트레스로 다가온다는 것은 결혼 자체가 갖는 엄청난 어려움, 그걸 알리는 서막에 불과한 것이란 생각도 들더군.
가사노동 분담, 관리, 스트레스의 악순환
그러나 이것만큼은 분명히 해야겠지. 결혼 제도 속으로 자신을 편입시킨다고 해서, 모든 제도에 영합하면서 결혼생활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 말이야. 두 집안의 결합이라는 둥, 두 가족의 결합이라는 둥 해도, 결국은 두 사람의 결합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진보적인 사고 속에서 해결책을 모색한다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하는 게 결혼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생각이지. 사실 나도 그러했고. 그것 하나에 의지하고 결혼을 결심하지만, 사실 결혼에서 그 두 사람의 관계 또한 끊임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대화, 토론, 논쟁, 설득, 비난, 비판, 기타 등등의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더라도 싸움은 싸움이지. 치열하고 끈기 있게 해나가야 한다. 지겨울 정도로 끊임없이 문제제기하고 동거인이 책임을 느끼도록 하고 주체적 행동을 요구하는 것.
가사노동만 하더라도, 가사노동의 역할분담을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적어도 결혼 후 적정한 역할분담을 시도했던 기혼여성들이라면 아마 한숨부터 쉴 걸? 애초에 계획했던 가사노동 분담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모호해지고, 어느 날인가 집안정리, 빨래, 설거지와 청소, 냉장고 관리 때문에 쉴 수 없이 움직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다. 게다가 가사노동 분담 자체도 어렵지만, 분담해야 할 일거리 목록을 작성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제대로 되는지 파악하는 것 등 가사노동 '관리'도 장난 아니게 스트레스 받는 모두가 '일 일 일'이다. 이런 일들이 쌓여가고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커지면 주부우울증 같은 병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겠지. 누군가가 말하길, 결혼과 동시에 여성들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하더군. 출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여성들이 결혼하면서 그만큼 가사노동과 가정사를 관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높아진다는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해.
결국 우울증조차도 절대 개인의 문제가 아니며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야. 함께 사는 동거인이 자발적으로 가사노동의 공동분담을 인식하고 주체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너나 나조차도 우울증의 가능성을 아예 무시하기 어렵다는 것. 어째 좀 으스스해지는군. 그렇다면, 살아남기 위한, 그것도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한 대안은 무엇이 있는 것일까?
관계와 역할에 대한 명확한 규정짓기
때때로 후배, 선배, 동기들과 서로에 대해 수다를 떨 때가 많잖아. 나는 이 수다의 힘을 대학 때까지만 해도 거의 느끼지 못했거든. 대화를 한다는 것은 서로를 드러내는 것이고, 나를 드러낸다는 것이 탐탁지 않게 느껴질 때가 많았어. 그래서 가장 절친한 후배인 너에게조차도 닫혀있다고 느껴서, 네가 항상 나를 타박했잖아. 나를 대화할 땐, 항상 너만 말하게 된다고. 요즘은 지인들과의 수다가 내가 빠져있는 곤경에서 나를 구해줄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들더군. 얼마 전에 후배 한 친구와 저녁 먹으면서 결혼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지. 누구는 언제 결혼한다더라, 누구는 언제 임신했다더라 등 사람들의 근황도 묻곤 했어. 그 와중에 후배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그러니깐, 나쁜 여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니까. 착한 여자, 착한 며느리가 되겠다고 하면 해답이 없어."
나는 속으로 아차!했다. 왜 여태 나는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런 생각을 왜 까맣게 잊고 있었지? 결혼이라는 제도에 나 자신을 가두게 되면서, 나는 한 발짝도 그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제도가 나에게 요구하는 '착한 딸,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의 굴레를 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친정에서 요구하는 '착한 딸'의 역할은 결국 남편에게 잘하고 아이를 빨리 낳는 착한 여자고 그게 효도라고들 하시지, '딸'의 역할이라는 것도 결국 시댁과 남편과의 관계에서 보전되는 것이라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생각조차 못했지, 라는 건 나 자신이 이미 결혼의 습속에 점차 의존하고 있다는 건 아닐까 하는 자각도 되더라고. 결혼식을 내 의지대로 하지 못했다고 해서, 결혼생활조차 내 의지대로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잖냐. 수많은 관계가 얽혀있지만 결국 내가 주체인 나의 결혼생활에서, 내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기대와 요구를 가진 이들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뿐인 듯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할 수 없는 역할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인간관계의 도리라면 도리 아닐까.
결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어쩌면 결혼 1년이 다 되가는 나조차도 해답을 찾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서, 결혼식을 앞둔 너를 더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 하지만, 결혼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가 절대로 방어적이거나 수세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언제든 우리의 의견을 피력하고 설득하고 행동하는 것이어야겠지. 결혼한다는 것이 그 모든 우리의 권리를 무덤 속에 파묻고 시작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적어도 너의 선택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혹은 더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싸움은 더 치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네.
결혼은 그야말로 현실과 일상과의 싸움이니, 전장에 오게 된 너를 나는 환영할 따름이다. 우리 함께 잘 싸워보자. 그래서 우리 나중에는 '결혼한 여성 활동가 모임' 같은 것도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미 출산경험이 있는 후배, 친구들과 '출산과 양육을 고민하는 진보적 여성들을 위한 지침' 같은 것도 만들어보고 수다방도 조직해볼까? 너는 울산에서, 나는 서울에서 그런 구상들을 조금씩 구체화시키는 건 어떨 것 같아? 나도 이젠 말 많이 하도록 노력해볼게. 우리의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질 수 있게. 너의 목소리와 공명할 수 있게 말이다. 신혼여행 갔다오면 꼭 답장해라. 무엇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너의 결혼생활을 기원한다.
2005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