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 어흥!
“아버지는 말하셨지..인생을 즐겨라~”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광고 카피다. 오늘날 인생을 즐기는 것이란 엠카드를 여기저기 긁을 만큼의 소비생활을 누리고 그에 따르는 이성친구를 잘 관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오늘날 많은 젊은이에게 그 광고 카피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 못 다한 심적 부담을 ‘인생을 즐겨라’는 한마디로 위안하면서 크게 유행이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여하튼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광고카피를 그닥 입에 담아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 ‘도대체 우리 아버지는 이런 금쪽같은(?) 말씀은 해 주시지 않았을까?’하는 원망 섞인 의문을 가졌다. 지금도 그 말은 금기다.
‘왜일까?’ 첫째, 우리 아버지는 덥석 엠카드를 내밀 만큼 부자가 아니고, 둘째, 나는 아들이 아니다. 그 대신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말하셨지….남잔 다 늑대다~.”
‘남자는 다 늑대일까??’
#1. 남자는 늑대?
몇 일전 맛있게 바나나를 먹고 있는데 ‘아는 남자’에게 어처구니없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요는 남자 앞에서는 바나나를 먹지 말라는 것(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순간 사각링에 서 있는 기분. 상대는 나를 응시하며 잽!잽!잽! 날렸다. “남자 앞에서는 바나나 같은 것 먹지 마요”, ‘오냐 네 이 놈 잘 걸렸다’
그리고 필자도 비장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어진 채 느물느물 웃고 있는 상대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다’
…머리 속은 쪼개진 단어들을 조합하느라 버벅버벅, 입 속에서는 내뱉어지지 않는 단어들이 거친 숨소리로만 피식피식, “그게…….뭐…예요”(--;)
그리고 집에 와서… 침대가 부서져라 뒹굴며 후회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 짓궂게 그리고 능청스럽게 왜냐고! 무엇 때문이냐고 꼬치꼬치 물어보지도 못했을까? 오히려 보란듯이 맛나게, 야금야금 깨물어 먹고, 핥아먹고, 쪼개 먹지 못했을까? 당시 그저 말없이 표정으로 항의하며 황당해했던 것으로는 분에 안 찼던 까닭에 괜한 곳에 화풀이하며 다음을 기약하는 일종의 개인적 다짐 행동이다. 물론 그리 하였을 때 내게 돌아오는 것이야 고작 ‘돌아이’ 취급뿐이었을 테지만.
토목공학도(움하하^^;)였던 필자는 대학 4년 동안 느물거리는데 선수가 되었다고 자부했었다. 학과 내에 동성을 찾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간혹 눈앞에서 벌어지는 군대식 풍경에 익숙해져야 했던 까닭에 ‘느물거림’은 토목학과 필수과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 4년 졸업하는 마당에 그간 뭐 했나 회의하면서도 나름의 희망을 품었던 것 중 하나가 어느 조직을 속할지라도 예기치 않게 직면하게 될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느물’거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명 ‘선수’
“50kg 넘는 여자도 있냐” (아니 도대체 몸무게는 키에 비례한 것 아닌가! 175cm의 필자는 뼈만 달고 다니란 말인가!)
“예, 제 생각도 180(cm) 안 되는 남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미처…바나나까지는….
여전히 나를 주변화하는 그 상황은 낯설기만 하다.
#2. 나는 호랑이 어흥!
이번에는 몇 달 전, 집으로 가는 으쓱한 골목길, 그 곳에서 한 청년과 맞닥뜨렸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리던 그 청년은…자신의 음부를 주물덕거리고 있었다. 대략 내 또래이거나 한 두어 살 즈음 어려 보이는 그 청년, 아마 공부하던 중 딴 생각(?)이 나서 츄리닝 바람에 뛰쳐나온 듯 보였다. 그냥 지나쳐도 불쾌했을 것을 대뜸 일방적으로 말을 건넸다. “누나 너무 섹시해요”….“왜…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웬 존댓말인가!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또 후회를 하며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25년 중 반의반은 ‘남자는 다 늑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반의 반의반은 ‘다’는 아닐 거라고 가능성을 타진했으며 또 반의 반의반은 늑대에 대응하는 여우가 아니라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고 어흥거렸다. 그리고 현재, 늑대의 ‘어후~’하는 소리에 나는 ‘어흥’해야 한다는 삶의 자세로, 또한 이러한 나의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스스로에게 무죄를 선포하며, 씁쓸해한다. 이는 운동의 제3법칙에 해당하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라고 합리화하면서(사실 과학이라는 것은 현실에 오면 오히려 비과학적일 때가 많다. 가령 이동거리가 0이면 한 일도 0이라는 학설부터 그렇다). ‘결국 그러다 관성이 되지’
결국 보이지 않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힘’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푸코의 추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지하철 옆 좌석에 다리 쭉 벌리고 앉은 아저씨의 터치부터 심지어 누군가 장난쳐 놓았을 요철주의 표지판까지 일상에서 직면하게 되는 상황들에 대해 나름의 대처방식들을 고심하고 있는 필자가 지금의 사회에 그럭저럭 순응하고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식을 택한 것은 아니었는가, 패배적 방식이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면서도 다시 걷지 않을 그 골목길에서 만날 그 청년을 위한 한마디를 또다시 준비하고 있다. “섹시한 건 맞는데 내가 왜 네 누나냐! 쉑!” 가라. 어흥!!
여하튼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광고카피를 그닥 입에 담아본 적이 없는 필자에게 ‘도대체 우리 아버지는 이런 금쪽같은(?) 말씀은 해 주시지 않았을까?’하는 원망 섞인 의문을 가졌다. 지금도 그 말은 금기다.
‘왜일까?’ 첫째, 우리 아버지는 덥석 엠카드를 내밀 만큼 부자가 아니고, 둘째, 나는 아들이 아니다. 그 대신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말하셨지….남잔 다 늑대다~.”
‘남자는 다 늑대일까??’
#1. 남자는 늑대?
몇 일전 맛있게 바나나를 먹고 있는데 ‘아는 남자’에게 어처구니없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 요는 남자 앞에서는 바나나를 먹지 말라는 것(각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순간 사각링에 서 있는 기분. 상대는 나를 응시하며 잽!잽!잽! 날렸다. “남자 앞에서는 바나나 같은 것 먹지 마요”, ‘오냐 네 이 놈 잘 걸렸다’
그리고 필자도 비장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긴장이 풀어진 채 느물느물 웃고 있는 상대도 무언가를 기대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지금이다’
…머리 속은 쪼개진 단어들을 조합하느라 버벅버벅, 입 속에서는 내뱉어지지 않는 단어들이 거친 숨소리로만 피식피식, “그게…….뭐…예요”(--;)
그리고 집에 와서… 침대가 부서져라 뒹굴며 후회를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 짓궂게 그리고 능청스럽게 왜냐고! 무엇 때문이냐고 꼬치꼬치 물어보지도 못했을까? 오히려 보란듯이 맛나게, 야금야금 깨물어 먹고, 핥아먹고, 쪼개 먹지 못했을까? 당시 그저 말없이 표정으로 항의하며 황당해했던 것으로는 분에 안 찼던 까닭에 괜한 곳에 화풀이하며 다음을 기약하는 일종의 개인적 다짐 행동이다. 물론 그리 하였을 때 내게 돌아오는 것이야 고작 ‘돌아이’ 취급뿐이었을 테지만.
토목공학도(움하하^^;)였던 필자는 대학 4년 동안 느물거리는데 선수가 되었다고 자부했었다. 학과 내에 동성을 찾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간혹 눈앞에서 벌어지는 군대식 풍경에 익숙해져야 했던 까닭에 ‘느물거림’은 토목학과 필수과목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학 4년 졸업하는 마당에 그간 뭐 했나 회의하면서도 나름의 희망을 품었던 것 중 하나가 어느 조직을 속할지라도 예기치 않게 직면하게 될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느물’거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명 ‘선수’
“50kg 넘는 여자도 있냐” (아니 도대체 몸무게는 키에 비례한 것 아닌가! 175cm의 필자는 뼈만 달고 다니란 말인가!)
“예, 제 생각도 180(cm) 안 되는 남자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미처…바나나까지는….
여전히 나를 주변화하는 그 상황은 낯설기만 하다.
#2. 나는 호랑이 어흥!
이번에는 몇 달 전, 집으로 가는 으쓱한 골목길, 그 곳에서 한 청년과 맞닥뜨렸다.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확실히 알리던 그 청년은…자신의 음부를 주물덕거리고 있었다. 대략 내 또래이거나 한 두어 살 즈음 어려 보이는 그 청년, 아마 공부하던 중 딴 생각(?)이 나서 츄리닝 바람에 뛰쳐나온 듯 보였다. 그냥 지나쳐도 불쾌했을 것을 대뜸 일방적으로 말을 건넸다. “누나 너무 섹시해요”….“왜…왜 그러세요.”
‘왜 그러세요?’ 웬 존댓말인가!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또 후회를 하며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
25년 중 반의반은 ‘남자는 다 늑대’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반의 반의반은 ‘다’는 아닐 거라고 가능성을 타진했으며 또 반의 반의반은 늑대에 대응하는 여우가 아니라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고 어흥거렸다. 그리고 현재, 늑대의 ‘어후~’하는 소리에 나는 ‘어흥’해야 한다는 삶의 자세로, 또한 이러한 나의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스스로에게 무죄를 선포하며, 씁쓸해한다. 이는 운동의 제3법칙에 해당하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이라고 합리화하면서(사실 과학이라는 것은 현실에 오면 오히려 비과학적일 때가 많다. 가령 이동거리가 0이면 한 일도 0이라는 학설부터 그렇다). ‘결국 그러다 관성이 되지’
결국 보이지 않지 않지만 존재하고 있는 ‘힘’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푸코의 추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지하철 옆 좌석에 다리 쭉 벌리고 앉은 아저씨의 터치부터 심지어 누군가 장난쳐 놓았을 요철주의 표지판까지 일상에서 직면하게 되는 상황들에 대해 나름의 대처방식들을 고심하고 있는 필자가 지금의 사회에 그럭저럭 순응하고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식을 택한 것은 아니었는가, 패배적 방식이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면서도 다시 걷지 않을 그 골목길에서 만날 그 청년을 위한 한마디를 또다시 준비하고 있다. “섹시한 건 맞는데 내가 왜 네 누나냐! 쉑!” 가라. 어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