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노동 논쟁을 넘어서
[편집자주] 이번 호부터 '책 속의 책'은 페미니즘 기획을 시작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토론하는 데 필요한 자료로 구성될 것이다. '가사와 직장의 양립'으로 요약되는 정부의 여성정책과 주류 여성운동의 방향성은 '성주류화' 전략에서 맞닿는다. 이런 전략은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노동과 빈곤에 내몰린 대다수 여성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여성의 권리와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망은 현재 여성들이 처한 현실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적합하게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책 속의 책'은 세계화, 빈곤, 재생산 노동, 캐어(care) 노동, 여성의 성욕, 성매매 등의 쟁점에 대해 검토할 것이다.
이런 기획의 첫 번째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가사노동 논쟁을 정리한 논문을 싣는다. 이 글은 여성의 가사노동을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가내 생산양식' 개념으로 이론화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을 검토하고, 여성 억압에 대한 이론적 초점을 가사노동이나 순전히 경제적 분석에 맞추는 것은 협소한 분석과 그릇된 정치적 결론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그 대신 성적 분업, 재생산, 노동시장, 국가의 역할 등 사회적 관계의 복합적인 결정과정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실천을 촉구한다. 그리고 여성 종속에 대한 이론적 작업은 정신분석학, 성욕, 언어와 이데올로기 영역에 대한 고찰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번역대본은 다음과 같다. Maxine Molyneux, Beyond the Domestic Labour Debate, New Left Review, 116, July-August 1979.
최근의 가사노동 논쟁에서 최초의 글이 나온 지 거의 10년이 지났고, 그 후로 가사노동을 주제로 삼은 논문이 영국과 미국의 사회주의 출판부에서만 50여 편이 넘게 발표되었다.1) 가사노동에 대한 관심은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자를 비롯해 다양한 방향에서 생겨났다. 하지만 이처럼 방향이 다양하더라도 그들은 모두 하나의 기초적인 가설을 공유했다. 즉 과거에는 무시되었던 이 주제를 연구함으로써 여성의 종속을 이해하고, 이것의 폐지에 적합한 정치를 공식화하도록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의 두 가지 주요한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관심사는 억압, 예속, 착취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여성의 종속이 종종 '경제외적'(extra-economic)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물질적 토대에 기초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경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 체계의 유지에 경제적으로 기여한다고 설명하고자 했다. 이런 접근법은 자본주의 발전이 어느 정도까지 현재 가내체계, 특히 '가사노동'을 창조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냐는 문제를 제기했다.2) 이러한 관점은 흔히 과거에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이며 전통적이고 공적인 특징을 분석하는 데 제한되었던 개념들을 가사노동 영역에 적용하려는 시도를 동반했다.
두 번째는 더 직접적인 정치적 관심사로서, 사회주의 투쟁에서 여성의 현실적이며 잠재적인 역할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분석에서는 비관적인 견해와 좀 더 긍정적인 견해가 엇갈렸다. 비관적인 견해는 주부의 정치적 행동에서 보이는 비활동적이고 보수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긍정적인 견해는 주부이든 임금소득자이든 여성의 정치적 잠재력을 강조한다.3) 이러한 좀 더 낙관적인 관점에 따르면 여성과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에 의한 일반적인 착취를 공유하며 따라서 착취의 전복이라는 공통의 객관적인 이해를 공유한다.
이러한 접근법들은 여성의 종속에 관한 토론에 중요한 공헌을 했지만, 이 글에서 나는 지금까지 가사노동에 관해 생산된 이론적 작업은 스스로 규명하고자 했던 문제들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특히 두 가지 관심사를 분석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성에 관한 정치경제이론을 생산하려는 시도는 다음과 같은 한계를 하나 이상 드러냈다. 첫째, 경제 환원주의 경향, 둘째,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를 구성할 때 기능주의적 논증 양식에 의존한다는 점, 셋째, 가족(familial)/가계(household)라는 더 넓은 맥락을 이론화하지 않고 가내영역에서 수행되는 노동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춘다는 점. 세 번째 한계는 주부가 수행하는 노동이 남성 임금노동자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노동자의 다음 세대를 위한 양육 노동을 사실상 무시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논쟁은 가사노동에서 가장 덜 중요할 수도 있는 한 측면만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문헌에서 가끔 나타나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주부에 대한 언급도 이러한 결핍을 극복하지 못한다.
가사노동에 대한 재평가는 주요한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논쟁에서 특별하고 도전적인 공헌을 했던 '가내 생산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 명제를 평가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서로 대비되는 두 이론, 즉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사용한 생산양식 개념을 비판한다.4) 이러한 이론에 특유하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모든 토론에 공통된 잘못된 개념과 가설을 검토한다. 특히 가사노동은 노동의 가치를 반드시 낮춘다는 공통의 가설에 질문을 제기한다. [이런 공통 가설] 대신에, 자본주의에서 생물학적 재생산의 주요 장소인 가내영역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보장하는 임금만큼 충분히 높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부분에서는 두 책이 제시하는 가사노동 명제의 기초를 이루는 다른 가설을 비판한다. 이 부분은 여성과 가내영역의 관계를 더 넓은 토대에서 개념화하면서 끝맺는다.
크리스틴 델피: 여성의 노동은 항상 무급이다
팜플렛, {가장 중요한 적}(The Main Enemy)은 1976년 영국에서 출판되었고, 지금까지 영국과 프랑스 여성운동으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이 글에서 크리스틴 델피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통적으로 여성 억압은 계급투쟁에서 부차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고, 계급투쟁은 '오로지 자본이 프롤레타리아를 억압하는 것에서 발생한다고 정의하는' 방식을 비판했다. 문제의 뿌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생산과정에서 계급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것이 '여성과 가정 내부의 (비(非)자본주의적인) 생산의 특수한 관계'를 무시한다고 주장한다. 델피에 따르면, 이러한 노동은 보통 가치가 없다고 오인되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상품부문에 존재하는 가사노동의 사회화된 형태와 다르지 않다. 유일한 차이는 자동세탁소, 식당, 육아시설의 직원은 자신의 노동에 대해 임금을 지불 받지만 주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기혼여성은 이러한 상황의 수혜자인 남편에 의해 착취당한다. 이것은 생산으로서 이해되는 가사노동에 기초해 발생하는 착취양식이며, 자율적인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델피의 개념이 나온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녀는 여성의 노동에 관련된 몇 가지 명제를 제출한다. (1) 가족에서 여성의 노동은 인정되지 않더라도, 핵심적으로 경제에 항상 기여한다. 역사적으로 항상 여성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못하면서 가사노동을 포함한 노동을 수행해왔다. 이는 가족이 생산단위인 경우, 예를 들어 소규모 농장, 소매 사업, 가내작업장에서 특히 분명하다. 지금도 프랑스에서는 백만 명의 여성이 '가족 보조원'(family aides), 즉 무급 노동자로 분류되며, 그들 중 대부분은 농업부문에 종사한다. (2) 산업화가 이뤄지고 생계농업이 쇠퇴한 결과로 여성의 노동은 더 이상 가족 단위 내에서 완전히 착취될 수 없었다. 따라서 일부 여성은 교환을 위한 생산에서 배제된 채 전업주부로 남았고 나머지 여성은 임금노동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여성의 임금노동 진입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의 전반적인 지위를 현저히 변경하지 않았다. 첫째, 모든 여성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간에 계속 무급으로 가사노동을 수행했다. 둘째, 여성이 임금노동에 진입하더라도 남편이 그들의 임금을 통제하곤 했고, 또 대부분의 경우 여성의 임금은 여성 스스로가 수행했던 서비스(예를 들어 육아와 세탁)를 지불하는 데 소비되곤 했다. 따라서 유일한 차이는 여성이 임금노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생계의 대가로 가사노동을 했지만, 이제는 무급으로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은 임금부문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3) 이런 상황을 유지케 하는 것은 여성 대부분이 생애 어느 시점에 진입하게 되는 결혼 계약이다. 이런 공통의 계약상 지위가 여성 공통의 계급 조건의 토대다. 결혼을 통해 여성은 '자신의 노동을 통제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따라서 여성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할 자유도 없다. 그리고 여성의 노동과 그 생산물에 대한 통제가 남편의 의지에 종속된다. 따라서 남성은 여성의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계급적 압제자가 된다.
델피는 이러한 명제로부터 두 가지 주요한 이론적·정치적 결론을 이끌어낸다. 첫째, 그녀는 현대 사회에는 두 개의 생산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착취로 정의되는 산업적 생산양식이며 다른 하나는 가부장적/가족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의 착취(즉 남성에 의한 여성 착취)로 정의되는 가부장제 생산양식이다. 이 생산양식들은 서로 구별되며 자율적이다. 이는 자본주의 관계의 전복이 여성 억압의 폐지를 낳지 않는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나아가 델피는 가부장제 생산양식에서 여성은 자신의 직업이나 남편의 계급적 지위와 무관하게 남성에 의한 공통의 억압으로 인해 통일된 하나의 구별되는 계급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여성이 가부장제와 그것을 배태한 사회를 전복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몇 가지 초기 문제
델피의 주장과 관찰의 일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진실이다. 가사노동은 중요하지만 그 활동은 전체적으로 과소 평가되며, 여성 억압의 중심 장소이자 원인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계급적·문화적으로 상이한 남성들도 가정 내 여성의 노동에서 다소 명백한 방식으로 이득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 정치적 결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구성한 이론 체계는 여러 면에서 부적합하다. 델피의 결론 중 일부는 해리슨의 결론과 비슷하기 때문에 다음절에서 그 내용을 함께 검토할 것이다. 여기서는 델피에게 특유한 접근법에 한정해서 몇 가지 문제들을 다룰 것이다.
우선 여성의 종속에 관한 델피의 이론은 그녀가 결혼 내부에서 일어난다고 규정한 착취, 남성이 여성의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착취에 기초를 둔다. 하지만 이것이 여성 억압의 이론으로서 얼마나 적합한가? 모든 여성이 결혼 관계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모든 결혼 계약과 결혼 내부의 실천이 동일한 것도 아니다.5) 반대로 다양한 사회에서 여성들간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여성과 남성 모두 매우 상이한 노동의무를 지게 된다. 여성 노동의 영유를 다루는 델피의 주장의 대부분은 프랑스 여성이 농장, 가내작업장과 여타 가족기업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관한 분석에 기초하며, 이것은 이런 형태의 여성 무급노동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국가와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델피가 보편적으로 타당한 이론을 생산했다는 주장은 그녀가 취한 자료의 특수성과 이론의 경험주의적 도출을 고려함으로써 완화되어야 한다. 그녀가 취한 접근법의 더 큰 문제는 여성의 종속을 오직 결혼 관계로 환원함으로써 모성과 노동시장에서 여성 위치의 억압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그녀는 결혼 내부에서 노동의 영유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 억압의 문제를 순전히 경제적 문제로 환원한다. 따라서 도대체 왜 결혼이 생겨나는지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이데올로기적·심리적 차원을 고려하지 못한다.
델피의 논문에서 지적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다. 왜냐하면 그녀의 논문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으로 창안된 것이지만, 그녀가 공격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되고 만화처럼 묘사된 판본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적}이 1970년에 맨 처음 저술된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발전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문헌의 개화에 비추어 보면 이제 그녀의 책은 최소한 개정될 필요가 있다. 그녀가 매우 호되게 비난한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도 버린 것이지만, 여전히 델피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좀 더 최근 작업보다는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다루고 있다.
이 때문에 델피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자신의 방식대로 사용한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가 여성운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공격하면서도, 비록 주요한 수정을 가할 목적이 있지만 마르크스주의 언어와 개념을 흡수하려고 시도한다. 예를 들어 그녀는 '생산관계', '생산양식', '노동력', '교환가치'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그때마다 이러한 용어를 전통적인 정의와는 매우 다른 경험주의적이며 상식적인 구성물로 변형한다. 일례로 생산관계는 '생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 왜 다른 것이 아니라 이런 개념을 사용해야 하는지, 또는 왜 이런 개념을 본질적으로 다시 정의하는 게 필요한지에 대한 어떠한 이론적 설명도 제시되지 않는다.
델피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녀가 마르크스주의 개념을 사용할 때 생기는 수많은 문제를 열거하는 것은 아마도 부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개념을 수정하는 것은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게 아니라 그녀의 주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즉, 그녀는 마르크스주의의 몇몇 기본 개념(착취, 생산양식, 가치, 생산)을 다시 공식화함으로써 분리주의적인 정치적 결론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수정이 없다면 그녀는 남성이 [여성] 계급의 가장 중요한 적이라는 그녀의 주요 명제를 유지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를 고수했다면 그녀의 주장은 붕괴되거나 본질적인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해리슨: 가사노동, '예속적 생산양식'
존 해리슨은 {가사노동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Housework)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계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구별하며, 전체로서 사회구성체와 그 내부의 생산양식을 구분한다. 그는 하나의 주어진 사회구성체 내부에는 지배적이며 구성적인 생산양식과 구별되는 종속적인 생산양식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종속적인 생산양식이 이행기의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행기에는 과거의 유산이 잔존할 수 있는데, 그는 이것을 '퇴화'(vestigial) 생산양식이라고 부른다. 또한 이 시기에 미래를 예견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는 이것을 '맹아'(foetal) 생산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는 여기에 또 다른 종류의 생산양식, 즉 '예속적'(client) 생산양식을 추가한다. 이것은 지배적이지도 않으며 과거의 유산도, 미래의 맹아도 아니다. '예속적 생산양식은 경제적·사회적 체계 내부에서 특정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지배적인 생산양식이 창조하거나 포섭한 것이다. 이것의 생존은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지속적 존재 여부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재생산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리슨은 주변부 사회구성체에서 특정한 비자본주의 부문이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과 국가 활동의 많은 부문'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말한다. '가사노동 생산양식'은 여러 점에서 소상품생산과 비슷하다. 양자 모두 분업이 없고, 노동의 사회화 수준이 낮으며, 생산자가 개인적으로 노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소상품생산과 자본주의와 달리 교환을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 게다가 가사노동은 노동자의 재생산을 위한 사용가치를 제공하지만, 벤스톤(Margaret Benston)과 다른 이들이 주장했듯이 직접적으로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가사노동 생산양식의 기능은 우선 임금노동자의 생계에 필요한 사용가치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리슨은 아내가 자신의 노동의 대가로 오직 생계를 보장받을 뿐이지만, 그녀는 자본주의 부문의 영여가치로 나타나는 잉여노동에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가사노동의 잉여노동이 자본주의 부문으로 이전되는 메커니즘은 자본가가 노동력 가치에 미달하는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다.' 주부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이런 메커니즘이 가능하다. 주부는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이런 서비스를 시장에서 구매한다면 생계비용이 늘어나고 따라서 결국에는 임금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가사노동 양식의 존재는 자본주의에 다른 영향을 미치지만, 이것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여성을 노동인구 외부에 둠으로써 협상에서 남성 노동자의 지위를 개선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성 산업예비군을 창조하여 협상력을 잠재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다.
해리슨은 여성의 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서 수행되므로 여성은 분리된 계급을 형성한다고 주장하며 결론을 맺는다. 따라서 주부이자 동시에 임금소득자인 여성은 두 계급에 속한다. 그는 억압의 두 형태, 즉 자본주의의 억압과 가족의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을 촉구한다.
해리슨은 델피에 비해서 덜 독단적이고 더 정교한 주장을 제기하지만, 그의 분석은 더 큰 이론적 문제를 야기하며, 여기서 검토가 필요한 한 가지 특유한 영역의 문제가 있다.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에 대한 그의 개념화가 그것이다. 이 문제는 다른 곳에서 널리 토론되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다루겠다.6) 가내 잉여노동이 자본주의 영역으로 이전되며, 잉여가치로 나타난다는 해리슨의 주장이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가내영역의 구체노동과 상품생산의 추상노동 시간이 등가이므로 비교 가능하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노동의 일반적인 균등화에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양자를 비교할 수 없다. 따라서 가치법칙을 다시 정의하지 않는다면, 두 영역에서 잉여노동 시간의 이전을 계산할 수 있는 원리가 없다. 가사노동이 비자본주의적라는 해리슨의 지적은 문제를 더 어렵게 한다. 한 저자가 말했듯이 '가치형태를 취하지 않는 비자본주의 양식의 구체노동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과정의 물질적 토대도 없이 자본주의 부문의 부가 가치로 나타날 수 있는가?'7) 따라서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해리슨의 이론은 그 핵심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
이런 문제들 외에도,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노동을 ('무급으로') 제공함으로써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린다는 널리 수용되는 명제가 남아 있다. 이 명제에 따르면 무급 가사노동이 없다면 이 노동은 인상된 임금으로 시장에서 구매되어야 한다. 해리슨의 분석은 이러한 전제에 의존하며, 그의 주장은 가사노동 논쟁 전반에서 상당한 지지를 얻었다. 이제 가사노동에서 나오는 '보조금'은 자본주의가 가정 내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유지하려는 주요한 동기로 간주된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틀림없이 정당한데, 이것이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시도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장을 제시하는 방식과 그것의 기초가 되는 몇 가지 가설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특히 반드시 구별해야 할 두 요소가 섞여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가사노동이 반드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느냐는 질문이다. 다른 하나는 이 때문에 자본주의가 가정 내 여성의 종속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이해가 걸려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냐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정당한 것으로 수용되지만,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노동력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묶음'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경제적 계산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똑같이 중요한 다른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에 대한 모든 문헌은 일반적 용어로 노동력의 가치를 검토할 수 있으며, 가사노동은 노동력의 가치와 불변의 관계를 맺는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사실 노동력의 가치는 오직 특정한 사회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결정될 수 있을 뿐이다. 노동력의 가치는 다양한 문화적·정치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며, 그 조건에 따라 상이한 계층과 범주의 노동자계급의 생계표준이 결정된다. 노동력의 가치는 상이한 범주의 노동자(숙련/비숙련, 흑인/백인, 남성/여성)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공급이나 계급투쟁의 수준과 같이 특정 시기에 협상에서 노동자의 위치에 영향을 끼치는 조건에 따라 다르다. 또한 노동력의 가치는 일반적인 축적 수준이나 축적률, 특정 기업이나 생산부문의 이윤 수준, 1부문과 2부문의 관계, 일반적 기술수준과 같은 다른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8) 이런 다양한 결정 요인들 중에서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기여하는 바는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오히려 가사노동이 그것의 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선험적으로 가정할 수 없다.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의 관계는 항상 역사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 대부분의 노동력의 가치가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곳, 즉 '가정'을 재생산하는 비용을 보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상승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만약 일상적 재생산에 필요한 투입물의 시장가격이 높다면, 이데올로기적·문화적 동기가 결합되어 남성이든 여성이든 특정 양의 무급 가사노동(요리, 청소, 빨래)을 수행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모든 노동 투입물이 상품화되는 것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공리로 간주될 수 없다. 노동자가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시장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든다는 사실을 입증할 경험적 증거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최소한의 조건, 즉 저렴한 서비스 시장이 없고, 소비할 때 변형 노동이 거의 또는 전혀 필요 없는 생필품을 소비할 수 없는 조건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제3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노동자는 재생산의 욕구를 시장에 상당히 의존하며, 이것이 더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만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노동력의 가치가 가장 낮은 곳에서 흔히 가사노동의 투입이 최소에 머무른다. 여성 가사노동의 이득을 보지 못한 채 노동력이 보통 하루 단위로 재생산되는 독신 노동자, 이주노동자는 항상 평균 이하의 임금을 받는다. 필수적인 살림을 마련할 여유나 의지가 있더라도, 이런 범주의 노동자는 가사노동을 직접 수행하기 어려운 조건(빈민가, 합숙소, 판자집)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시장의 서비스와 식품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체결되는 임금협상은 가사노동의 상당한 투입을 전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기성제품을 구매하는 대신에 노동자가 직접 가정에서 노동한다면 과연 노동력의 가치가 떨어질지는 최소한 열린 문제다. 예를 들어 사적인 소비와 한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요리와 청소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확보하는 것은 더 높은 노동력 가치에 의존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노동력의 가치는 역사적·문화적 변화에 따라 결정되므로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관계가 불변이라고 가정할 수 없다. 이로써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이 중요하다는 어떠한 일반적인 주장도 미심쩍게 되며, 가사노동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본주의에 본질적이라는 주장도 침식되고 만다.
두 번째 전통적인 명제는 가사노동이 노동력 가치에 공헌하는 바가 가정 내에서 여성의 지위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 역시 노동력의 가치에 관한 지나치게 정적이며 몰역사적인 개념화를 전제로 한다. 많은 저자들처럼 노동력의 가치가 반드시 노동자계급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포함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다양한 요인들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노동력의 가치는 반드시 임금소득자의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상품 묶음의 가치와 등가여야 한다. 그러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어떤 부문에 속한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는 의존적인 가족에 필요한 비용을 포함하는 수준에서 결정되었고 이것은 이른바 '가족임금'이라는 현상을 낳았다. 가족임금은 노동자계급 가족이 특정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일인 임금이다. 동시에 상당수의 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의 가치와 임금은 이러한 최저치 이하로 떨어지고 따라서 남성 임금이 가족 생계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경우의 차이는 여성의 지위에 극히 중대한 의미가 있다. 만약 임금이 위에서 정의한 의미에서 가족임금이라면 기혼여성이 노동인구 밖에서 전업주부로 남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가족은 만족스러운 생활수준에서 가족을 재생산하기 위해 추가 소득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혼여성의 공통 대응은 노동인구에 진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가사노동의 수행 여부가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 이런 경우에 아마도 중요한 것은 남성 노동력의 가치가 가족임금 이하로 떨어졌고 노동시장에 진입할 수 없거나 진입할 의지가 없는 의존적인 주부가 가족임금을 보조하기 위해 노력을 배가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으며 오히려 이미 주어진 상황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요인들이 불변이라면 이는 노동력의 가치를 그 수준으로 유지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더라도, 이것이 가정 내 여성의 지위를 설명할 수 없다. 주장이 옳고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유익하다고 해도, 왜 일반적으로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는지도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물론 현실에서 오직 여성만이 가사노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독신 남성, 아이, 다른 이들 역시 가사노동을 하며, 때때로 가구 구성원끼리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한, 그것이 수행되는 사회적 관계와 그것을 수행하는 행위자에 대해 자본이 무관심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전업주부가 가족임금을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잉여노동을 수행하고 더 많은 노동시간을 투여하며 더 열심히 노동하므로 전업주부의 존재가 자본에게 가장 유익하다고 여전히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일반 법칙으로 주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주부의 가사노동이 가족 소득을 보충하는 데 실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녀 역시 가족의 아이들과 더불어 재생산되어야만 하며, 개별적인 가사노동에 필요한 추가적인 가전제품을 구입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부가 임금소득자라면 이런 비용이 그녀의 임금을 통해 부분적으로 충당될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전업 주부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 경우에 문제는 주부의 노동이 남편의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려서 자본가에게 숨겨진 이익을 준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가정살림과 개인의 유지에 필요한 숨겨진 비용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숨겨진 비용은 남편에게 제공되는 가족임금을 통해 보장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기업이 이득을 얻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사노동에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자본이 '무급' 가사노동에서 경제적 가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전업주부의 존재는 주부로 남기에 충분한 임금이 존재하느냐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계급의 모든 계층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계급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며, 심지어 경제위기가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경기후퇴기에 많은 수의 여성은 유급 노동을 시작하도록 고무된다. 이는 남편의 임금이 불충분하고 이런 상태에 제공할 수 있는 이득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주부의 가사노동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주부의 존재조건이 노동력의 가치를 올리거나 최소한 유지하게 하는 정도가 문제다.
따라서 노동력의 가치는 가정에서 여성의 위치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해리슨이나 가사노동 논쟁에 참여한 대부분의 논자가 주장한 방식대로는 아니다.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이런 관계의 다양한 형태며, 어떤 계급·계층의 구성원에게는 지불되지만 다른 이에게는 지불되지 않으며, 남성에게는 지불되지만 여성에게는 지불되지 않고, 어떤 자본가는 지불하지만 다른 자본가는 지불하지 않는 '가족'임금을 낳는 특수한 정치적·역사적·경제적 원인이다.
유사점과 차이점
이러한 이론의 여러 측면을 각각 검토했으므로 이것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규명할 수 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론적 접근법에 있다. 해리슨의 분석은 착취의 특수한 형태로서 '가내 생산양식'이란 개념을 전통적인 계급 분석에 추가한다는 의미에서 일관되게 가사노동을 마르크스주의 시각으로 포괄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자본주의가 최소한 암시적으로나마 가장 중요한 적으로 남아 있다. 한편 크리스틴 델피는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그것의 전복을 주창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분석에 적대적이다. 해리슨은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으로부터 어떻게 이익을 얻는지 관심을 두지만, 델피는 (여성의) 가장 중요한 적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남성이라고 입증하는 데 관심을 둔다. 또한 델피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관심이 있지만 해리슨은 가사노동과 노동력의 가치의 관계에 관심이 있다. 게다가 해리슨 논문의 이론적 대상은 여성 억압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다. 가내 생산양식 명제를 지지하는 두 사람의 근본적 차이는 최소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여성운동의 정치적 실천의 문제를 해명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러한 근본적 차이를 넘어서 두 이론이 공유하며 더 상세한 토론이 필요한 세 가지 주요 입장이 있다. 첫째는 여성을 계급으로서 분류하는 것이며, 둘째는 가사노동을 비자본주의적라고 규정하는 것이며, 셋째는 가내영역을 생산양식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1. 여성은 계급인가?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는 여성이 분리된 계급을 형성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여성에게 고유하며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경제적인 계급 위치를 확고히 정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리슨과 델피는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는 논증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여성을(최소한 여성 일부를) 하나의 계급으로서 개념화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존재한다고 설명하고자 한다. 계급에 대한 델피의 주장은 다소 불만족스럽다. 한 페이지에서 여성은 '노예' 관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거나 '농노 관계'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어쨌든 그녀는 결혼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착취에서 계급을 도출한다. 우리는 그녀가 결혼 형태를 보편화하고 그것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들을 이미 언급했고, 여성과 가사노동의 관계에서 [역사적·문화적인] 중요한 차이를 설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성을 계급으로 간주하는 그녀의 설명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착취에 대한 델피의 개념은 고유한 이론적 함의를 지닌 마르크스주의 담론에서 빌린 것이지만, 그녀는 '노동의 영유'라는 더 느슨한 정의를 이용한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법에서 노동의 영유가 등장하더라도, 그것이 계급의 존재를 확증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반드시 착취관계를 구성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회에서 특정한 개인을 위한 잉여노동이 항상 수행된다. 게다가 단순히 인간 주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경험적 관찰로부터 계급을 도출할 수 없다. 계급 착취는 생산관계 수준의 관계를 수반하며 잉여노동의 '영유'라는 단순한 사실로 환원될 수 없다.9) 계급에 관한 델피의 명제는 이론적 근거가 없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명제를 유지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논증을 발전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녀의 정의가 철저히 적용된다면 우리가 살펴볼 볼 것처럼 그녀의 주요 주장과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여성이라는 보편 계급이 존재한다는 델피의 주장에는 더 큰 문제점이 있다. 그녀는 결혼이 모든 여성의 공통 조건이고, 이것이 결혼계약상의 부와 지위의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적 차이까지도 무효화하기 때문에 모든 여성이 동일한 계급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을 분석하면 심각한 비일관성이 나타난다. 델피는 여성의 종속에 대한 관념적 이론에 맞서기 위해 모든 여성-주부가 동일한 '생산관계'에서 노동하며 '동일한 직무'를 수행한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여성에게 공통적인 억압의 물질성을 강조한다. 유물론적이라고 가정되는 이러한 강조는 그녀의 주장 전체에서 근본적이다. 하지만 더 특권적인 여성을 그녀의 도식 내에 포함하려고 할 때 그녀의 논증은 설득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녀는 가사노동이 수행되는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은 프롤레타리아 아내의 육체노동이 될 수도 있고, 오직 부르주아 아내에게 강요되는 '사회적인 과시 활동'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성이 어떤 의미에서 공통의 '생산관계', 즉 '생산'에 기초한 공통의 물질적 착취로 인해 통일된다고 할 수 있는가? 또 '사회적 과시'가 어떤 의미에서 생산인가? 분명히 가사노동과 양육을 위해 하인을 고용하는 부르주아 아내는 특권이 더 적은 여성과 물질적 억압을 공유하지 않는다. 또한 이는 부르주아 아내의 특권이 남편의 부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이혼을 통해 그것을 하루아침에 박탈당할 수 있다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다. 물론 그녀는 다른 방식으로 모든 여성에게 공통된 억압과 차별을 경험할 수 있지만(이는 특정한 투쟁의 기초를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여성 억압의 물질성에 기초해 여성 노동의 착취를 정의하려는 델피의 직접적인 관심사는 아니다.
2.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두 저자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와 구별되며 본질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에 허용하는 자율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이 점에서 해리슨은 델피보다 좀 더 미묘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가내 생산양식을 '예속적' 또는 '절단된'(truncated) 생산양식이라는 상당히 어색한 공식으로 제시하면서, 가내 생산양식이 비자본주의적이지만 자본주의에 통합되거나 접합된다고(articulated) 인정한다. 심지어 가사노동 양식은 국가 양식처럼 '특정한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창조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양식들이 매우 우연적이고 의존적인 특성을 지녔지만 생산양식을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여부다. 이 문제는 나중에 검토할 것이다.
하지만 델피는 가족적·가부장적 양식은 [자본주의와] 아무런 이론적 관계도 없는 자율적 실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나 자율적인지는 문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접합은 전체 가족생계를 제공하는 데까지 확장되며, 가족생계는 자본주의 부문에서 유래하는 소득으로 지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노동, 서비스와 생필품은 자본주의 부문에서 생산되고 구매되는 상품의 이용이나 변형에 의존한다. 노동을 제외한 모든 가사노동 투입물은 자본주의 부문에서 나오므로 만약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대해 자율적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오히려 델피는 이런 자율성을 단언하면서 '여성의 가정 외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해 가족적 의무를 확립하는 것'이 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자본주의와 공모한다면 이런 체계는 어떤 종류의 '자율성'을 지닌 것인가? 이런 모호성은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가족적 생산양식의 혁명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오히려 사회 전체의 전복이 필요하다는 델피의 암묵적인 입장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델피는 왜 이런 이중 혁명이 필요한지 자세히 설명하진 않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녀가 거부하는 입장에 가까운 주장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해리슨과 델피가 적절하게 다루지 못한 더 큰 문제는 즉 가사노동의 역사적·문화적 특수성이다. 해리슨은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창조물이라고 암시한다. 반면 델피는 가내 양식의 자율성은 봉건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주요 생산양식의 특수한 발전 단계와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한다고 암시한다. 이런 관점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가사노동과 가족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은 거의 없고 양자를 비교하는 설명은 더 적으며, 가사노동 이론의 일부는 이 쟁점에 대한 증거와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억압적인 가사노동의 기원을 현대 자본주의의 출발에서, 특히 주요 생산단위로서 가족의 해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종종 지나치게 단순하다. 가족이 생산단위인 곳에서도 가내 소비(예를 들어 음식준비, 청소, 세탁, 옷감 짜기, 바느질)와 양육를 위한 가사노동은 시장에서의 교환이나 물물교환을 위한 생산과 구별된다. 이런 구별은 기술적으로 가장 덜 발전한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즉 (아무리 개별화된 가사노동이라 할지라도) 가사노동과 성별 분업은 자본주의에 이전에도 존재하며, 보편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거의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가내영역이 영원불변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노동과정'의 일부는 비슷해 보일 수 있으나 수세기에 걸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으며 그러한 변화의 일부는 지배적인 생산양식의 변화와 관계를 맺었다. 예를 들어 델피가 인정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농업으로 이행에 의해 가족이 생산한 식량을 스스로 소비하는 양보다 구매하는 양이 증대했다. 금세기 동안 가내생활 영역 대부분이 변화를 겪었다. 더 나은 주택의 개발로 인해 더 많은 서비스를 가정 내로 통합되었고(난방, 물, 조명), 동시에 시장에서 다른 서비스가 성장했다. 가공식품 냉동과 통조림과 같은 기술의 발전이나 노동절약 설비의 활용은 가사노동의 변화를 낳거나 그런 잠재력을 지닌다. 또한 국가는 보건, 교육, 육아의 책임 일부를 떠맡았다. 이런 발전이 보여주는 것은 가사노동이 자율적인 실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가사노동과 관련된 노동과정과 사회적 관계가 지배적인 생산관계의 경제적 조직화의 변화에 따라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는 가사노동이 단지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런 변화가 가사노동과 여성의 지위에 미치는 효과는 한편으로는 부분적이며 또 한편으로는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어떤 측면은 변화에 저항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역사가 있지만, 이것이 자율적인 역사는 아니다.
3. 가내 생산양식이 존재할 수 있나?
가사노동이 '비자본주의적'이라고 정확하게 규정하는 것에는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가사노동이 본연의 상품생산 영역 밖에 있고, 따라서 가치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리슨은 이를 인정했기 때문에 가사노동이 분리된 생산양식을 구성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지금부터 문제로 삼으려는 것은 바로 이런 결론이다.
모든 생산양식 이론의 출발점은 생산양식이 무엇이냐는 것이어야 한다. 델피는 정의를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용어를 '생산방식'의 유비로 사용하면서, 더 이상의 정의를 시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녀는 '생산양식' 개념을 마르크스주의 맥락에서 분리하고, 그 대신에 가사노동의 특징들을 요약하는 설명구조를 덧붙인다. 반면 해리슨은 알튀세르의 개념화로 볼 수 있는 생산양식 개념을 채택한다. 이 개념에는 자연의 변형양식(또는 노동과정), 생산물의 영유양식, 그리고 경제적 소유의 일정한 분배라는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다.10) 해리슨의 생산양식 개념은 발리바르가 정교화한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므로, 우리는 해리슨의 적용이 그것에 부합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용어법에서 '생산양식' 개념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분석 수준과 관련된다. 하나는 생산적 구조의 요소들(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생산양식의 운동 법칙이다. 양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경제 분석의 이론적 대상을 형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자본주의에 고유한 일군의 요소들과 사회적 관계(노동과정, 소유 형태, [노동자와 소유의] 분리 형태)를, 또 한편으로 자본주의 경제의 통일성에 대한 개념인 재생산 이론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본유통, 분배관계와 생산관계, 기업들 간의 결합 형태가 하나의 통합된 생산체계의 일부분을 형성하는 체계로서 인식된다. 이처럼 이중적 의미로 인식된 생산양식은 일정한 경제체계와 사회적 관계에 관한 고도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일반적 개념으로 명기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생산양식의 재생산을 보증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생산양식의 존재조건은 다른 분석수준, 즉 사회구성체라는 분석수준에 속한다. 이러한 조건은 해당 생산양식의 추상적 개념에서 추론될 수 있지만,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사회구성체에서 그런 조건을 보증하는 양식은 상당히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리바르의 마르크스 독해에 따르면 '생산양식' 개념은 두 가지 방식으로 기능한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용어로 말하면 시기구분의 단위로서, 사회의 경제적 발전 시대(자본주의, 봉건주의, 사회주의)에 따라 역사를 구별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특정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우리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산양식의 구성적인 경제적·사회적 관계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내 생산양식은 생산양식의 이런 필요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가내 생산양식의 '예속적' 특성에 대한 해리슨의 강조는 정의상 그것이 존재하는 사회구성체에 관한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도록 한다. 실로 그의 용어법에서 가내 생산양식에 대한 지식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지식을 조건으로 한다. '가내 생산양식의 재생산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의존하며, 그것은 자본과 대단히 복잡한 공생관계를 맺는 절단된 생산양식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운동법칙에 따라 결정되며, 자신의 운동법칙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가내 생산양식은 어떤 의미에서 일정한 사회구성체에 대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는가?
가사노동 생산양식이 다른 기준, 즉 시기구분의 단위로 기능할 수 있는지를 고찰할 때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해리슨은 '예속적' 양식이란 개념을 정식화하면서, 사회구성체는 내부에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을 포함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퇴화' 양식이나 '맹아' 양식이란 그의 개념은 이런 분석에 부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종속적 양식들은 '예속적' 양식과 하나의 결정적인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퇴화' 양식이나 '맹아' 양식은 과거에 일반화될 수 있었거나 미래에 일반화될 수 있지만, 가내 생산양식 같이 의존적 양식들은 결코 사회구성체의 경제적·사회적 토대를 구성할 수 없으므로 결코 일반화될 수 없다. 달리 말해 예속적 양식은 자신의 생산적 토대가 없다. 가사노동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어떤 사회구성체나 그것의 일부조차도 존재한 적 없거나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처럼 가내 생산양식 안에 생산적 토대가 없고 어떤 사회적 생산도 없기 때문에 이런 맥락에서 '생산'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가내 생산양식의 구성 요소를 규명하려고 시도할 때 더 큰 문제가 생긴다. 노동자(주부)가 있고 노동대상이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사회적 생산도 없고, 생산물이 주부의 잉여노동의 어떤 형태를 취하는 생산양식에서 무엇이 생산수단인가? 요리든 원예든 간에, 사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의 창조가 이 활동에 사용되는 도구를 가리키려고 '생산수단' 개념을 이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지 의심스럽다. 가사노동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가사노동이 사회적 생산이나, 심지어 마르크스가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의미에서 생산과 동등하다는 뜻은 아니다. 해리슨에 따르면 가내 생산양식의 '생산관계'는 노동자와 생산수단의 통일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그의 개념 사용을 받아들이더라도, 그의 개념이 생산물(여기서는 주부의 잉여노동)의 영유양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또는 어떻게 주부가 이 같은 사회적 착취관계에 종속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생산양식' 개념은 발리바르가 명명한 (그릇된 인상을 줄 수도 있는)11) '비(非)노동자'를 포함하는데 여기에 더 큰 어려움이 따른다. '비노동자'는 잉여노동이나 잉여생산물을 영유하는 행위자다. 따라서 해리슨과 델피의 정의에 따르면 여성이 자신의 필요를 넘는 가사노동을 할 때 이러한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행위자가 누구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크리스틴 델피의 답변은 명확하다.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자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이 역시 주부 노동의 많은 부분을 '영유'한다. 하지만 아이는 성인 남성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며, 아이를 독립적인 비노동 착취계급으로 간주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남성이 착취자라는 엄격한 페미니즘의 주장은 1개월 된 남자아이는 착취자일 것이고, 1개월 된 여자아이는 아닐 것이라는 식으로 아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으로 사실상 귀결된다.
남편이 영유계급이라고 설명하는 델피를 따른다면 추가적인 어려움이 있다. 경험을 볼 때 대부분의 결혼에서 남편이 가사에 관한 한 '비노동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정 밖에서 남편은 대개 노동자인데,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그 역시 가족 생계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델피의 용어로 말하면 남편 역시 아내와 아이가 '영유'하는 어떤 '잉여노동'을 수행한다. 이것이 아내와 아이를 남편의 착취자로 전환시키는가? 이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은 델피의 착취에 대한 정의를 따른다면 피할 수 없다.
해리슨은 가족적 생산양식에서 남성의 위치를 사실상 전혀 논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를 교묘히 피해간다. 남성이 가내 생산양식의 계급구조에 포함되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는 가내 생산양식이 단지 하나의 계급, 즉 주부 계급만을 포함한다고 암시한다. 그러나 만일 여성이 두 계급들에 속할 수 있다면, 남성은 왜 그럴 수 없는가? 아마도 해리슨이 이 문제를 피하는 이유는 가내 생산양식 안에 남성의 위치를 정하면 그는 델피의 결론과 너무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성과 자본주의의 관계보다는 남성과 가사노동, 남성과 여성의 관계라는 질문을 즉각 제기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문제에 대한 해리슨의 침묵은 성들 간의 관계라는 쟁점을 대체로 회피하려는 징후다.
해리슨이 볼 때 여성의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행위자는 자본이고 따라서 가내양식 바깥에 있다. 그러나 이는 발리바르의 개념과 좀 더 멀어진다. 왜냐하면 엄격히 말하면 발리바르에게 비노동자는 이런 외적 영유를 허용하지 않는 생산양식 개념의 불변요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가 종속적 생산양식의 특징은 외부 행위자의 영유라고 받아들이더라도 무엇이 영유되는지, 영유의 창출이 생산을 구성하는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가사노동의 사례에서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고, 최소한 문헌에서 제시한 것 이상의 이론적 실증이 필요하다.
가사노동 논쟁의 문제점
가내 생산양식 명제 덕분에 델피와 해리슨은 수많은 가사노동 문헌에서 자주 반복되는 두 가지 오류를 피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는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로 흡수하려는 오류고, 다른 하나는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와 완전히 기능적인 관계를 맺는다고 보는 오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작업에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체계적 분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 이 이론을 정교하게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근거로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로 흡수하려는 시도가 흔히 정당화되었다. 몇몇 저자는 가사노동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한 이론이 없는 것이 역사유물론 창시자들의 성차별적 태만 탓이라고 주장했다.12) 다른 이들은 역사유물론 이론의 중심 주제에서도 마르크스의 많은 개념이 미발전된 채로 남아 있고 더욱 정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특히 가사노동의 분석에 관한 개념에 적용된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막대한 작업이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더라도,『자본』에서 불충분하게 이론화되거나 전혀 이론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 생산 이론으로 통합될 수 있거나 통합되어야 한다고 곧장 가정해선 안 된다. 특히 한 저자가 희망에 차서 기록한 것처럼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여기에 의문을 품는 것이 필요하다.13)
한 가지 주요 문제는 수많은 저자가 생산양식이라는 추상수준을 사회구성체 추상수준과 혼동한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가사노동 사례에서 우리가 어떤 추상 수준을 다루고 있는지를 먼저 확립한다면 벗어날 수 있다.14) 왜냐하면 가사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생산하는 것과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개념과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법칙으로 흡수하려는 것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개념들은 특히 상품생산과 가치증식과정과 관련을 맺기 때문에, 가치법칙을 따르지 않는 사적인 개별 노동으로서 가사노동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이론의 외부에 있다. 마르크스의 친숙한 정식화처럼, 노동자는 '스스로에게 속하고, 생산과정 외부에서 필수적인 생명 활동을 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안전하게 (노동자의 재생산을 노동자의) 자기보존과 증식 본능에 내맡긴다'.15) 즉 이런 추상수준에서 자본은 가사노동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수준, 즉 구체적인 사회구성체 수준에서는 가내영역의 조직화 형태와 가내영역 내부의 사회적 관계가 일정한 사회구성체의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재생산의 필요조건과 가내영역의 관계가 무엇이든 간에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자본주의 기능 때문에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직접적으로 두 번째 문제, 즉 기능주의의 문제로 이어진다. 가사노동과 가족에 관한 논쟁에는 기능주의 가설이라는 평가가 가장 적합한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예를 들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에 '결정적', '필연적' 또는 '본질적'이라고 다양하게 언급된다. 자본주의 편에서 보면, 때로는 자본주의가 가사노동을 '창조'했다고 간주되며, 어떤 정식화에서는 심지어 자본주의가 생존을 위해 가사노동에 '의존'한다. 우리는 이미 가사노동이 자본주의에 결정적이라는 통념에 반대한다고 언급했고, 가족 조직의 현재 형태에 관해서도 같은 유보조항을 달아야만 한다. 가사노동에 대한 문헌은 가족 조직 역시 기능적이라고 간주하고, 가내영역이 특정한 국면에서 아무리 유익하더라도 자본주의 팽창이나 계급투쟁의 결과로서 심원한 변화를 겪을 수도 있고 또한 자본에게 모순적 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몇몇 저자가 제안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가사노동과 가족에 의존한다는 가설이 수반하는 논리적 결론은 가사노동과 가족의 폐지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묵시록의 관점은 이론적으로 잘 실현되지 않지만, 다른 주의 깊은 분석(예컨대 벤스톤의 분석)의 결론에 자주 따라다닌다. 이는 아마도 여성운동을 반자본주의 투쟁의 일부로 명확히 정의함으로써 여성운동의 혁명적 성격을 입증하려는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종속이 자본주의 생존에 필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착취와 동등하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틀림없이 논증될 수 있다.
일원론과 경제주의
비록 델피와 해리슨이 전반적으로 위 문제들을 비켜가지만, 그들이 가사노동 논쟁과 공유하는 하나의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가사노동에 대한 경제적 분석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논쟁이 다룬 주요 문제는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조하는지,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지, 가치법칙에 따라 결정되는지, 생산적 노동인지 비생산적 노동인지 등등이었다. 이는 논쟁이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발전됨에 따라 최초의 관심사가 '여성노동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에 입각해 여성 억압을 분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아마도 불가피했다. 처음에 이것은 보편적이고 몰역사적인 '가부장적 억압'을 가정했던 일부 페미니즘 분석의 관념론을 반대하고, 가족을 순전히 이데올로기 관계로 이해했던 일부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관념론을 반대하는 데 필요하다고 환영받았다. 그러나 가사노동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경제주의라는 한계뿐만 아니라, 여성의 경제적(·비경제적) 활동 전체와 그것이 이뤄지는 관계들에 대한 분석을 희생하면서 협소하게도 가사노동과 주부에 집중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제한된 조건에서조차 여성의 대한 포괄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16)
이처럼 경제주의와 결합된 협소한 초점은 가사노동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이 [이론적] 분석으로부터 전적으로 전위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한다. 이것은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효과가 있다는 주장에서 가장 분명히 입증된다. 이 주장은 오직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어떻게 이득을 주는지 보이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정말로 그것은 아마 더욱 중요한 무언가를 전혀 보여줄 수 없다. 즉 왜 가사노동을 가정주부[여성]가 수행하는지, 어떻게 가사노동이 여성 종속의 구조와 연결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다. 더욱이 자본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노동은 예컨대 여성의 육아 활동보다는 (남성) 노동자의 일상적 재생산과 관련된 노동이라고 대개 간주된다. 결국 이 이론은 왜 이런 노동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정말로 동등해질 수 없는지, 심지어 독신 임금노동자 스스로 이런 노동을 수행할 수 없는지 전혀 설명하는 않는다. 그것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은 여성의 책임으로서 가사노동의 종식과 이런 형태의 여성 억압의 제거가 자본에게 어떤 손실도 입히지 않은 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델피의 주목할 만한 예외가 있지만, 가사노동 논쟁에 기여한 많은 문헌이 성들 간의 관계 전반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문헌이 어쨌든 서로 대립한다고는 거의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여성의 종속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것이 예컨대 남성이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자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가사노동이 자본에게 경제적으로 기여하는 것만을 배타적으로 조명함으로써,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발전한 관심사와 페니니즘의 쟁점은 고의가 아니더라도 담론으로부터 전위되었다.
이중적 전위
가사노동 논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주된 관심사로부터 이중적인 전위가 필요하다. 첫째, 주요한 이론적 대상이 가내영역의 물질적 중요성을 개념화하는 것이라면, 강조점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수준에서 일정한 사회구성체들과 그것의 재생산 수준으로 이동되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분석은 더 이상 가사노동에 협소하게 집중하는 대신에, 이러한 구조들 안의 여성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 가족의 더 광범위한 중요성과 [가족보다] 더 폭넓은 사회에 대한 가족 내부의 관계를 고려하도록 유용하게 확장될 수 있다.
둘째, 대신 여성 종속에 관한 이론이 필요하다면, 첫걸음으로서 여성 종속과 경제의 관계라는 문제가 지금까지 논쟁보다 훨씬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정치도 가사노동 분석만으로는 도출될 수 없다. 사실 '가사노동 임금'(wages for housework) 캠페인의 제한적인 강령은 여러 가지 방식에서 볼 때 이런[가사노동 분석만으로 치우친] 접근법의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결과다. 여성의 정치경제학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연구 영역이지만, 논쟁의 용어는 더 확장되어야 하고 여성의 종속을 매개하는 물질적 관계의 복합적 결합을 분석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이 같은 분석은 가내영역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성적 분업, 재생산, 노동시장, 남녀 노동력 가치의 변화와 차이, 여성을 가족 내부의 의존적 지위에 머물게 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고찰을 포함해야 한다.17) 그러나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는 오직 경제적이거나 물질적 요인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이런 요인을 아무리 넓게 이해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또한 여성 종속에 대한 이해는 정신분석학, 성욕, 언어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근래 수행되고 있는 중요한 작업에 대한 고찰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확대하면, 성별간, 가족간 상호관계에 대한 분석을 포함한다.
여성의 종속을 매개하는 관계들의 복합성에 대한 인식은 가사노동에 대한 문헌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정치적 결론을 제공하는 일종의 경제적 환원주의의 위험을 경고한다. 여성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가담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본주의와 가사노동의 관계를 개념화하는 데 달려있지 않다. 그 답변은 여성이 스스로를 발견하는 정치정세에 달려 있으며, 특히 여성 종속의 고유성을 설득력 있게, 정면으로 다루면서 페미니즘의 쟁점을 접합할 수 있는 사회주의 운동의 능력에 달려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가사노동의 역할에 관한 세 가지 중심 질문에 대해 최근 어떤 답변이 정식화되었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족에서 여성의 지위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 가정에서 여성의 지위와 자본주의 경제의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형태의 여성 종속을 끝내기 위해선 어떤 정치적 수단이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까지 상대적으로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 부분에서는 더 깊은 연구와 탐구가 필요한 영역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여성과 가정
우리는 위에서 여성/가정 관계가 불변이 아니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재생산에 본질적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대신 이 관계는 일정한 사회구성체의 고유성에 따라 그 효과가 변화하는 결정과정들(determinations)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결과로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주의하면서 이런 결정과정들이 어떻게 현재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명백히 나타나는지 더욱 일반적인 수준에서 제시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별한 언급이 필요한 네 가지 문제를 선별할 수 있다.
1. 임금 형태. 이는 여러 중요한 방식으로 여성의 지위와 가정에서 여성의 상황과 관계를 맺는다. 우리가 주장했던 것처럼 전업주부의 실존은 적정한 남성 임금을 통해 경제적으로 가능해지며, 그보다 비중은 적지만 육아와 결혼 기간 동안 추가되는 국가보조금을 통해 보완된다. '가족임금', 즉 부족하나마 직업이 없는 아내와 아이를 부양할 수 있는 임금수준의 존재는 다른 모든 임금수준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상이한 결정과정들이 작용한 결과다. 심지어 그것은 이런 형태의 임금 산정을 목표로 하거나, 확대 해석하면 이런 형태의 여성 의존을 목표로 하는 남성노동자의 의식적이거나 전(前)의식적인 투쟁을 포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임금의 포기는 노동력 가치의 하락이라는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임금이 수반하는 여성의존의 형태가 대체로 남성에게 유리하고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이는 여성의 전반적인 지위에 대해 어떤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그러나 이를 고찰하기 전에 특권적인 남성임금이 수반하는 것은 특권 이하의 여성임금이라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특정 범주의 남성 노동자가 가족임금을 보장받을 수 있더라도, 현재의 성별 분업에서 여성 노동력이 이런 수준의 가치를 획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남성처럼 여성이 가족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이와 반대로 수많은 여성 노동자조차 일반적으로 여성의 임금은 남성소득자의 임금을 보충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이 같은 차별이 초래할 수 있는 남녀간의 이해 갈등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실천상의 함의를 밝혀야 한다.
2. 성적 분업. 가족임금을 남성에게 할당하는 것은 성적 분업에 의해 정당화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으로 성적 분업은 성들 간의 공평한 책임 분배를 달성하여 남녀가 서로 보완적이게 되도록 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성적 분업은 단순한 기술적 분업 이상인데, 그것이 특권과 차별의 구조를 창출하는 지배와 종속 관계를 강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성에게 가정 내·외부에서 긴밀하게 얽힌 영향을 미친다. 여성에게는 가정에서의 책임이라는 의무가 할당되는데, 이는 여성이 임금부문에서 노동할 때조차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성이 임금부문에서 노동하더라도 그들 중 다수는 임금이 가장 형편없고 정적인 직업에 배치될 것이다. 가정 내부의 의무와 일할 만한 가치가 없는 고용의 결합은 가정 외부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강력한 장애물이고, 가정 외부의 여성 노동을 억제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시장 그 자체가 가내영역에서 여성의 지위와 가정 외부에서 여성의 존재 사이에 직접적인 고리를 형성하면서, 재생산에서 여성의 역할을 보충하고 강화한다. 따라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오로지 가내영역에서 여성의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의 취약한 위치는 가정에서 여성의 종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3. 높은 실업률과 특히 높은 여성 실업률. [남녀가 집단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고용 상태에서 불황기 동안 흔히 여성 노동자가 가장 먼저 제거되다. 이는 주로 여성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이 불황기에 가장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더 악화된다. 그러나 남녀 노동력이 함께 고용된 곳에서도 이런 위기 동안 남성보다는 여성이 먼저 해고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가족소득이 가족의 '수장' 즉 남편의 경제활동에 의해 제공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흔히 정당화된다. 달리 말하면 가족임금 형태가 일반화되지 않은 곳에서조차 '가족'임금을 호소함으로써 여성 실업을 부분적으로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4. 여성의 재생산 역할에 대다수 사회가 제시하는 프리미엄. 이는 남성과 동등한 자격으로 노동인구에 진입하는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단순한 생물학적 분업(육아)은 사회적 관계를 크게 제약하는 복합적 모형 안에 깊숙이 새겨지게 된다.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대중매체, 교육, 가족의 기대에 의해 결혼, 특히 결혼 안에서 어머니의 역할로 곧장 나아가게 된다. 더욱이 노동시장에서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결정하도록 기여하는 것은 '어머니의 보살핌'(mothering)에 관한 가설이며, 자연주의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주장은 이를 지지한다. 즉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물질적 효력를 지닌다. 여성들은 주부나 어머니, 기껏해야 '용돈'을 버는 파트타임 노동자가 되라는 요구를 받으며, 기술과 장래희망에 관해 여성이 받는 공식·비공식 교육은 일반적으로 이런 전망에 맞춰 있다. 이는 여성을 특정 직업에 할당하는 경향이 있는 성적 분업에 의해 강화된다. 여성에게 할당되는 직업은 그들이 지루하고 섬세하며 성가신 일을 견디는 '본성적인' 능력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이런 능력을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다. 동시에 이런 직업은 남성들이 수행하는 유사한 작업보다 임금이 더 낮다. 이처럼 불평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여성의 직업이 어머니라는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며, 부분적으로는 많은 여성이 가정 내의 책임을 맡고 있는 한에서는 실제로 부차적이기 때문이다. 육아시설의 적절한 공급의 결여는 여성 대부분에게 선택의 요소를 제거한다.
이제 우리는 여성의 관습적 조건이 일반적으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게 주는 어떤 효과들을 이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능주의적 논증이 제시하는 것처럼 그러한 효과가 모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항상 유지된다거나 반드시 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내영역으로 여성의 유폐는 어떤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 급속한 [자본]축적기나 전시처럼 노동부족이 심각할 때, 국가는 여성 임금노동자를 충분히 시장에 풀어놓기 위해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도록 간섭하라는 요구를 받을 수 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자본의 '일반 이해'에 충실한 것이 특정한 자본에게는 불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일정한 사회구성체에서 국가 정책은 여성의 노동력 진입을 억제하지만, 어떤 자본의 생존은 여성이 제공하는 값싼 노동력에 의존할 수도 있다.
가사노동 논쟁이 올바르게 강조했듯이 가족은 소비의 단위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이란 형태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같은 재생산 노동이 모든 사회에서 필수적이지만 그 장소가 반드시 가족은 아니고, 가족 외부의 행위자가 재생산 노동을 수행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의 일상적 재생산에 필수적인 재화와 용역의 다수는 시장이나 국가기관을 통해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재생산에 대한 가내영역의 기여는 여전히 상당히 중요하며, 일반적으로 두 가지 형태의 활동을 수반한다. 하나는 자본에게 가장 덜 중요한 활동으로, 현존하는 임금노동자의 일상적 요구를 돌보는 것을 포함한다. 또 하나는 미래의 생산자, 즉 아이의 요구를 돌보는 것이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임금소득자를 위한 것과 유사한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추가적으로 더 많은 노동과 포괄적인 책임을 포함하는데, 특히 대개 여성이 떠맡는 책임인 유아가 있을 때 더욱 그렇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다음 세대 생산자의 재생산은 기초 교육을 수반한다. 즉 그것은 아이들이 결국 성적·계급적으로 서로 다른 특성을 계발하도록 '사회화'하는 것이며, 이는 그들이 노동시장 안팎에서 차지하게 될 위치와 관련을 맺는다. 여기서 여성의 노동은 교육기관과 같은 다른 행위자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맡지만, 여전히 상당한 중요하다.
이 두 가지 재생산 활동(구체적 형태로서 가사노동와 육아) 중에서 여성을 가장 곤경에 빠뜨리는 물질적 관계를 이루며 자본주의 국가에게 가장 유익한 것은 육아 노동이다. 가사노동 부담은 최소치로 축소될 잠재성이 있고 가족의 성인 구성원들 사이에 균등화될 수 있다. 하지만 육아에 관한 해결책은 최소한 적절한 육아기관의 공급을 통한 육아노동의 사회화를 포함하는 중대한 사회적 개조를 요구한다. 따라서 가사노동과 달리 육아에 관한 해결책에는 주요 자원의 할당과 국가나 다른 조직기관의 책임이 필요하다.
국가비용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본주의 사회가 육아시설의 제공을 거부하고자 했던 이유 중 하나지만, 이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높은 실업률이 널리 번지고 있고 있는 선진 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노동시장은 여성을 수용할 만한 충분한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급진적인 개입주의 국가를 향한 변화가 없다면, 여성을 가내영역에서 해방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이런 의미에서 '가족임금'과 '주부 증후군'은 높은 실업률, 특히 높은 여성 실업률을 은폐하고 일정한 방법으로 그것을 정당화하도록 돕는다. 여성들은 산업예비군의 고유한 층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18) 여성은 전시나 급격한 축적기에는 [노동시장으로] 불려나오지만, 만일 이런 직업들이 축소되거나 남성들이 되돌아온다면 가족 안의 그들의 '위치'로 되돌아간다. 이런 '위치'가 존재하고, 여성들이 '본성적으로' 이런 위치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다는 가정 때문에 여성의 실업은 정치·사회적인 문제가 될 잠재성이 적다. 그리고 여성의 실업은 자본주의 국가가 육아 서비스에 최소의 비용을 제공하도록 유용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 종속의 '원인'이라거나 어떤 단순한 의미에서든 자본주의에 기능적이라고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해 자본의 경제적 이해는 가능한 한 많은 노동자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가 대량으로 생산에 진입함으로써 자본이 잉여가치양의 증대와 노동력 가치의 하락이라는 이중적 이득을 획득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가정에서 여성들의 지위는 일정한 방식으로 어떤 자본주의 국가에게 이득을 주지만, 모순적인 효과를 낳는다.
자본에게는 이런 두 측면에 더하여 세 번째 이익이 있다. 즉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 부문에게나, [자본]축적기 동안 그것을 공급하는 것이다. 남성의 노동력 가치는 가족의 재생산 비용을 포함하는 수준에서 확립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차별이 없는 직업이나 노동력의 여성화가 노동력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은 드문 경우를 제외한다면, 여성이 이런 수준의 노동력 가치를 확보하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성적 분업은 임금과 노동 조건뿐만 아니라 직업적 성공을 위한 기회에서도 차별을 결정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a) 여성의 노동은 재생산에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b) 여성의 노동은 특권적인 남성 소득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된다. 저임금노동, 파트타임 노동, 출장 노동이라는 현상은 어떤 자본주의 기업에게는 큰 이익을 준다. 이런 현상은 여성의 모순적 위치 때문에 존재한다. 즉 여성은 생산과 재생산 영역 사이에 붙잡혀 있으며, 또한 다른 수입에 의존하는 관계 안에 있다는 가정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 같은 착취 형태에 맞선 성공적인 조직화의 어려움은 여성의 완전한 평등에 대해 남성이 지배하는 노동조합운동의 수동성, 심지어 저항과 결합된다.19) 이러한 어려움은 진보적 입법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최악의 차별적 관습 일부를 제거하도록 입안되었지만 이런 관습이 흔히 변화된 형태로 지속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여성의 종속은 사회구성체의 상이한 수준을 통해 매개되고, 서로 구별되는 수많은 관계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단순한 인과관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분명 가사노동의 문제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여성의 종속을 끝내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한가?
가내영역과 공적영역이라는 두 개의 주요 전선에서 투쟁해야 하며, 지금 투쟁하고 있다. 그 투쟁은 가정 내부의 억압 구조를 공격하고 가정 외부의 차별적 장벽을 제거하고 있다. 양 영역에서 투쟁은 특히 가내영역과 공적영역의 결합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무엇보다도 성적 분업과 그 사회적 효과에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고용과 정치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정통 사회주의와 현존하는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의 입장은 오직 외적 전선에만 집중하고 가정 내부의 관계를 평등의 원리에 입각해 개조하자는 동시적 요구를 무시하기 때문에 부적합하다. 가정 내부에서 평등화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유형의 수단이 필요하다. 가사노동 부담의 평등화는 아이가 없는 가족에서는 충분히 이뤄질 수 있으며, 이와 더불어 아이가 있는 경우에는 전통적인 가사노동 영역인 이 [육아]부분을 사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작업장 내·외부에 적절한 육아시설을 공급하는 것은 가장 긴급하고, 명백하며 본질적인 요소다. 나아가 더 크게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재조직화와 주간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부모들이 원할 경우 육아 책임을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최근 기술혁신은 자본주의에서 최초로 이를 현실적인 요구가 되게 한다. 물론 여성 차별을 제거하려는 공적부문의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면 이런 수단의 성공은 제한될 것이다. 가내영역의 평등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조건에서 노동할 수 있는 것이며, 이는 여성의 고용기회가 확대되고 특권적인 남성임금에 대한 여성 의존이 해소된 결과일 것이다. <끝>
[각주]
1) 이 논문의 첫 번째 초안은 1975년 6월 Anglo-French SSRC Women's Group에서 발표되었다. 여기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 특히 소중한 논평을 해준 해롤드 볼페(Harold Wolpe), 바바라 테일러(Barbara Taylor), 헬렌 크롤리(Helen Crowley)에게 감사를 표한다.본문으로
2) 이러한 '역사'에 대한 설명으로는 Chris Middleton, 'Sexual Inequality and Stratification Theory' in The Sociological Analysis of Class Structure (ed) F. Parkin, London, 1975를 보라. 본문으로
3) 따라서 양자의 분석은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리지만, 여성 정치를 토론할 때 경제 환원주의라는 경향을 공유한다. 본문으로
4)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Harrison 'The Political Economy of Housework' Bulletin of the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 Winter 1973. [대표적인 비(非)마르크스주의 이론인] C. Delphy, The Main Enemy, Women's Research and Resource Center 1976. 지난 몇 년 동안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관념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Union of Radical Political Economy에서 여성을 다루는 특집호(Vol.9, No.3, 1997)의 편집자 글은 해리슨을 따라 가사노동을 예속적 생산양식(client mode of production)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여성의 종속에 대한 최근 회의에 제출된 논문에서도 채택되었다. 본문으로
5) 바렛(M. Barrett)과 맥킨토시(M. McIntosh)는 델피를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여성이 결혼하지 않는 단순한 방책으로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냐'고 묻는다. 'Towards a Materialist Feminism', Feminist Review, No. 1, January, 1979. 본문으로
6) 예를 들어 다음을 보라. J. Gardiner et al, 'Women's Domestic Labour', BCSE, Vol. IV, No. 2., S; Himmelweit and S. Mohun 'Domestic Labour and Capital',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1977; P. Smith 'Domestic Labour and Marx's Theory of Value' in A. Kuhn and A. M. Wolpe (eds) Towards A Materialist Feminism, London, 1978 (국역: {여성과 생산양식}, 한겨레, 1986). 본문으로
7) P. Brown 'Marx's Capital and Privatised Labour under Capitalism', MA Dissertation Essex University 1977. 본문으로
8) 동일한 방식으로 임금 역시 다양한 요인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비록 이론적으로 임금이 노동력을 그 가치대로 구매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임금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역사적인 관계는 노동자의 여러 범주 사이의 변화와 편차의 영향을 받는다. 본문으로
9) 나의 이전 논문은 이 문제를 매우 상세히 검토했다. 'Androcentrism in Marxist Anthropology' in Critique of Anthropology No 9/10, November 1977.본문으로
10) 이는 E. Balibar and L. Althusser, Reading Capital NLB, London 1975에서 발전되었다.본문으로
11) 비노동자 개념은 그릇된 인상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착취계급이 생산과정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함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생산과정에 참여하는지 여부는(그들 중 다수는 여기에 참여한다) 그들이 해당 생산양식에서 잉여노동을 영유하는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다.본문으로
12) L. Vogel 'The Earthly Family' and I. Gerstein 'Domestic Work and Capitalism' in Radical America, Vol. 7, Nos 4/5 1973.본문으로
13) 이 정식화는 W. Seccombe,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LR, No 83, January 1974에서 볼 수 있다. 밈멜바이트와 모훈(op. cit)은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비슷한 견해를 표출한다.본문으로
14) 생산양식은 일정한 사회구성체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사회적·경제적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추상적인 분석 개념이고, 사회구성체는 일정한 사회에 조응하는 좀 더 광범위한 실체로 인식된다. 사회구성체는 하나 이상의 생산양식을 포함할 수 있다.본문으로
15) Karl Marx, Capital VolⅠ, pp. 571-573.본문으로
16) J. Gardiner 'Women's Domestic Labour'와 Coulson et al 'The Housewife and her labour under capitalism' NLR 89, 1975는 여성의 임금노동 진입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한계를 벗어난다.본문으로
17) 특히 M. MaIintosh 'The State and the Oppression of Women' In A. Kuhn and A. M. Wolpe (eds), Feminism and Materialism, London 1978을 보라. 본문으로
18) 이러한 주장을 정교하게 제시한 것으로는 V. Beechey, 'Female Wage Labour', in Capital and Class No 3 1977을 보라.본문으로
19) 제인 험프리스는 역사적 증거에 입각하여 여성의 고용 진입에 대한 노동조합의 저항이 자본에 대한 노동공급을 제한함으로써 가족임금을 유지하려는 욕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의 고용 진입은 남성의 노동력 가치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노동자계급 생계표준을 낮출 우려가 있다. 이는 문제가 있지만 흥미로운 주장이다. 노동자계급의 어떤 남성들에게는 핵가족의 유지가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일 수 있지만, 이로부터 여성을 고용 외부에 두는 것이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반드시 유익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견해는 즉 노동자계급 남성과 여성의 이해가 모든 쟁점에 관해 동일하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정은 더 설득력 있게 입증되어야만 한다. J. Humphries, 'Class Struggle and the Persistence of the Working Class Family', Cambridge Journal of Economics, Vol 1 No. 3, 1977.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