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또 다른 이름, 금융피해자들의 현주소
빚 독촉에 시달리던 20대 신용불량자가 카드 빚 천만 원을 갚을 길이 없자, 장기 매매를 선택했다. 장기는 4,500만 원에 팔렸지만 브로커가 소개료 2,000만 원을 챙겨 실제 2,500만 원을 받게 됐다. (SBS 2005.01.29 뉴스)
직장생활을 하던 B씨. 회사 상황이 나빠져 임금이 6개월 체불됐다. 카드로 생활을 꾸려가던 중 자녀C가 사고를 당해 1,500만 원을 병원비와 수술비로 지출하게 됐다. 결국 카드로 돌려 막다가 4천만 원에 가까운 빚을 지게 됐다. (신용불량자 클럽 까페에 k씨가 올린 글 中)
들어가며
위 사례는 금융채무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 중 일부이다. 현재 전국에 300만이 넘는 노동자, 민중들이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금융 부채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아니 그 가족까지 계산한다면 어림잡아도 1,000만 명 이상이다. 정부의 신용카드 남발 정책과 경기 악화로 인해 생계형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왔고, 개인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동반 책임으로 금융채무의 피해 사례는 더 확산되고 있다.
신용불량자라는 단어가 우리 생활 속 고유명사로 자리 잡기 시작한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생계형 자살과 가족 집단 자살이 급증했지만 정부의 대책은 '도덕적 해이'라는 개인 책임을 부과하는 방법을 뛰어 넘지 못했다. 과도한 내수 경기 활성화 정책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왜곡된 고용구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무참히 나락으로 떨어진 신용불량자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해서는 더 이상 안 된다.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채무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채무를 질 수밖에 없었던' IMF 구제금융 이후 대다수의 신용불량자에게 선택의 길은 없었다. 그렇다면 평생을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며 가정파탄과 가족 해체 그리고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며 평생을 빚에 허덕여야 하는 빈곤의 악순환에 내몰린 신용불량자에게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신용불량자'가 아니다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신용불량자라는 용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신용불량자 그 자체가 지극히 자본과 정권에 의하여 저질러진 구조조정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신용불량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금융피해자에게 끊임없이 신용불량은 '당신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이며, 혹은 당신의 신용을 적절히 관리를 하지 못한 데 따른 개인의 책임이라고 암시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과 정권은 신용불량자를 벗어나고 싶으면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빚을 청산할 것을 부단히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용불량자의 사회적 의미는 오히려 자본과 정권에 의하여 저질러진 구조조정과 금융권 및 카드자본의 부실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아니라 우리는 '금융피해자'로 다시 고쳐 불러야한다.
금융피해자에게 인간다운 삶이란 없다
정확하게 말해서 금융피해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신용불량자라는 '사회적인 주홍글씨'를 달고 바닥 모를 두려움으로 인하여 피를 말리는 주변의 삶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심기관의 협박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냉정한 시선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어 결과적으로 자괴감과 두려움으로 삶은 전체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또한, 모든 삶의 목적이 빚을 갚기 위해 급속도로 변화되어 건강과 사회생활이 악화될 수밖에 없으며 열악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마저 고스란히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인권사각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를 강요받는 금융피해자
무엇보다도 금융피해자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이유는 금융피해자로서의 삶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는 현실, 그 이상의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금융피해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없게 되면서 무기력한 삶을 연명하고 사회적으로는 불필요한 인간으로 버림받음으로써 이중삼중의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즉 금융피해자들은 금융피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생활에서 차별과 배제가 일상적으로 용인된다.
가령 금융피해자가 기업에서 요청하는 자격과 기능을 충분히 습득하였다 하더라도 취업의 창구로부터 배제가 된다. 아무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금융피해자는 공정한 심사기준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것은 기업에서 신규채용 모집공고와 함께 일차적으로 금융기관으로부터 기업에 제공되는 신용정보시스템을 통하여 신규채용에 지원한 지원자를 '신용불량자와 비신용불량자'로 최우선적으로 선별하는 기준이 관례화되어 버렸다. 또한, 기업에서는 신규채용의 기준을 선별한다는 명목으로 금융피해자의 신용정보를 제 집 드나들듯 하며 '정보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그 사람의 능력과 됨됨이가 아니라 금융기관에서 제공되는 신용정보에 의하여 폭력적으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융피해자라는 무거운 족쇄가 그의 이력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융피해자들의 일자리는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한 노동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밖에 없다. 또한 설령 금융피해자가 정규직의 일자리를 어렵사리 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금융피해자들은 채권기관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가압류와 채권회수의 협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최소한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규직의 일자리를 뒤로 한 채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라면 누구나 당연한 권리인 산재보험, 고용보험, 국민연금, 사회보험 등 4대 보험과도 철저히 담을 쌓을 수밖에 없다. 어렵사리 들어간 정규직의 일자리마저도 금용피해자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의 노동시장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자본과 정권은 금융피해자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마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차별과 배제로 금융피해자에게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불량자와 비신용불량자'라는 자본이 구획해놓은 차별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인 분배의 문제이고 평등의 문제이다. 자본과 정권이 구획해 놓은 구조적인 폐해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금융피해자의 인간다운 삶은 단 한 치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의 내용들, 즉 건강하게 일정한 수준의 삶의 질을 향유하면서 창의적인 생활을 만들고, 인간의 자유, 존엄, 자부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 속에 살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금융피해자에게 빚을 청산할 때까지 빼앗아 버린다.
금융피해자에게 한줄기 빛이 되고 있는 파산제도
가판대를 놓고 경품을 미끼로 카드를 반 강제로 안기고, 최소한의 신용평가도 없이 오히려 자본과 정권의 필요에 의해 대중을 동원하고 선동하면서 고리의 이자를 착취하였던 이들이 이제는 금융피해자에게 '신용불량자의 멍에'로 평생 동안 고단한 삶을 강요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의 이름으로 경제회생 논리에 인간의 삶과 생존의 근본조차 허물어 버리는 정권과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 논리를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금융피해자에게 정권과 자본이 제기하는 개인의 책임논리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 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인가?
그 첫 출발이자 금융피해자들의 인간선언이 파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산을 통해서 금융피해자의 채무는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한편으로 온전히 개인에게 지워지는 빚이 사회공동의 책임이라고 명확히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인권운동연대를 비롯한 빈곤인권단체는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를 통해서 금융채무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이며 궁극적으로 인권의 문제임을 알려내고 있다. 매주 토요일 진행되는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는 금융채무자들이 지고 있는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법안이 되고 있는 파산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파산에 대한 이해를 비롯하여 법률적 제도적인 준비와 관련한 교육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현재 매주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를 진행하였으며 파산학교를 수강한 수강생들을 중심으로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금융피해자 인권모임을 진행하고 있으나 여전히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금융채무의 개인의 책임을 넘어 사회적 책임으로
최근 대법원은 금융피해자들의 존엄성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판결을 내렸다. 즉 대법원은 신용카드를 적법하게 발급받았더라도 나중에 카드빚을 갚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신용카드를 사용했을 경우 사기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빚을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하는' 금융피해자들의 피 끓는 고통을 대법원은 또 한 번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대법원의 판결은 금융채무의 문제가 여전히 '도덕적 해이'와 개인 책임이라는 논리를 한치 앞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로 인하여 금융기관 및 카드사는 너나 할 것 없이 금융피해자들을 상대로 공격적인 법률적 대응과 과도한 추심행위에 나설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벌써부터 금융피해자들은 대법원의 판결이 개인에 소송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인지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대법원의 판결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금융자본의 입장을 반영하는 은행과 여신기관의 또 다른 변죽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금융채무의 개인책임을 강요하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금융채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금융채무의 해결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또한 그러한 요구를 중심으로 '누가' 투쟁에 나설 것인가에 있다.
때문에 금융피해자들은 금융채무의 고통과 불법추심의 심리적 압박 그리고 사회적 냉대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반성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금융자본의 무한 이윤의 창출을 위해 '금융채무'의 원인과 배경이 아니라 금융피해자들을 피와 땀을 쥐어짜는 금융채무정책은 단지 파산만으로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자명하다. 궁극적으로 파산이라는 고리를 통해서 노동자민중 스스로 '금융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주체화되어 금융채무의 책임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고 투쟁하는 것이 파산학교의 궁극적 목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신용불량자를 넘어 사회적 권리의 주체인 금융피해자,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빈곤해결과 노동해방의 대장정에 함께 나서는 일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던 B씨. 회사 상황이 나빠져 임금이 6개월 체불됐다. 카드로 생활을 꾸려가던 중 자녀C가 사고를 당해 1,500만 원을 병원비와 수술비로 지출하게 됐다. 결국 카드로 돌려 막다가 4천만 원에 가까운 빚을 지게 됐다. (신용불량자 클럽 까페에 k씨가 올린 글 中)
들어가며
위 사례는 금융채무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연 중 일부이다. 현재 전국에 300만이 넘는 노동자, 민중들이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금융 부채로 인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아니 그 가족까지 계산한다면 어림잡아도 1,000만 명 이상이다. 정부의 신용카드 남발 정책과 경기 악화로 인해 생계형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왔고, 개인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동반 책임으로 금융채무의 피해 사례는 더 확산되고 있다.
신용불량자라는 단어가 우리 생활 속 고유명사로 자리 잡기 시작한 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생계형 자살과 가족 집단 자살이 급증했지만 정부의 대책은 '도덕적 해이'라는 개인 책임을 부과하는 방법을 뛰어 넘지 못했다. 과도한 내수 경기 활성화 정책과 비정규직 양산이라는 왜곡된 고용구조,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무참히 나락으로 떨어진 신용불량자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해서는 더 이상 안 된다. 최소한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채무를 갚기 위해 또 다른 채무를 질 수밖에 없었던' IMF 구제금융 이후 대다수의 신용불량자에게 선택의 길은 없었다. 그렇다면 평생을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며 가정파탄과 가족 해체 그리고 불안정노동에 시달리며 평생을 빚에 허덕여야 하는 빈곤의 악순환에 내몰린 신용불량자에게 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겠는가?
'신용불량자'가 아니다
노동자민중의 입장에서 신용불량자라는 용어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신용불량자 그 자체가 지극히 자본과 정권에 의하여 저질러진 구조조정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신용불량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금융피해자에게 끊임없이 신용불량은 '당신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이며, 혹은 당신의 신용을 적절히 관리를 하지 못한 데 따른 개인의 책임이라고 암시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그래서 자본과 정권은 신용불량자를 벗어나고 싶으면 온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빚을 청산할 것을 부단히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용불량자의 사회적 의미는 오히려 자본과 정권에 의하여 저질러진 구조조정과 금융권 및 카드자본의 부실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아니라 우리는 '금융피해자'로 다시 고쳐 불러야한다.
금융피해자에게 인간다운 삶이란 없다
정확하게 말해서 금융피해자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신용불량자라는 '사회적인 주홍글씨'를 달고 바닥 모를 두려움으로 인하여 피를 말리는 주변의 삶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심기관의 협박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회의 냉정한 시선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어 결과적으로 자괴감과 두려움으로 삶은 전체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또한, 모든 삶의 목적이 빚을 갚기 위해 급속도로 변화되어 건강과 사회생활이 악화될 수밖에 없으며 열악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마저 고스란히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인권사각의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상적인 차별과 배제를 강요받는 금융피해자
무엇보다도 금융피해자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이유는 금융피해자로서의 삶이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는 현실, 그 이상의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금융피해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도, 해야 할 일도 없게 되면서 무기력한 삶을 연명하고 사회적으로는 불필요한 인간으로 버림받음으로써 이중삼중의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즉 금융피해자들은 금융피해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회생활에서 차별과 배제가 일상적으로 용인된다.
가령 금융피해자가 기업에서 요청하는 자격과 기능을 충분히 습득하였다 하더라도 취업의 창구로부터 배제가 된다. 아무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금융피해자는 공정한 심사기준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다. 그것은 기업에서 신규채용 모집공고와 함께 일차적으로 금융기관으로부터 기업에 제공되는 신용정보시스템을 통하여 신규채용에 지원한 지원자를 '신용불량자와 비신용불량자'로 최우선적으로 선별하는 기준이 관례화되어 버렸다. 또한, 기업에서는 신규채용의 기준을 선별한다는 명목으로 금융피해자의 신용정보를 제 집 드나들듯 하며 '정보인권'을 유린하고 있다. 그 사람의 능력과 됨됨이가 아니라 금융기관에서 제공되는 신용정보에 의하여 폭력적으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융피해자라는 무거운 족쇄가 그의 이력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융피해자들의 일자리는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을 비롯한 불안정한 노동시장으로 자연스럽게 편입될 수밖에 없다. 또한 설령 금융피해자가 정규직의 일자리를 어렵사리 들어가게 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금융피해자들은 채권기관으로부터의 끊임없는 가압류와 채권회수의 협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최소한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정규직의 일자리를 뒤로 한 채 비정규직의 일자리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라면 누구나 당연한 권리인 산재보험, 고용보험, 국민연금, 사회보험 등 4대 보험과도 철저히 담을 쌓을 수밖에 없다. 어렵사리 들어간 정규직의 일자리마저도 금용피해자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의 노동시장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자본과 정권은 금융피해자의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마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차별과 배제로 금융피해자에게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삶을 인정하지 않는다. '신용불량자와 비신용불량자'라는 자본이 구획해놓은 차별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인 분배의 문제이고 평등의 문제이다. 자본과 정권이 구획해 놓은 구조적인 폐해를 넘어서지 않고서는 금융피해자의 인간다운 삶은 단 한 치도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의 내용들, 즉 건강하게 일정한 수준의 삶의 질을 향유하면서 창의적인 생활을 만들고, 인간의 자유, 존엄, 자부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존중 속에 살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을 금융피해자에게 빚을 청산할 때까지 빼앗아 버린다.
금융피해자에게 한줄기 빛이 되고 있는 파산제도
가판대를 놓고 경품을 미끼로 카드를 반 강제로 안기고, 최소한의 신용평가도 없이 오히려 자본과 정권의 필요에 의해 대중을 동원하고 선동하면서 고리의 이자를 착취하였던 이들이 이제는 금융피해자에게 '신용불량자의 멍에'로 평생 동안 고단한 삶을 강요한다면, 오히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의 이름으로 경제회생 논리에 인간의 삶과 생존의 근본조차 허물어 버리는 정권과 자본의 무한 이윤추구 논리를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금융피해자에게 정권과 자본이 제기하는 개인의 책임논리가 아니라 인간답게 살 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인가?
그 첫 출발이자 금융피해자들의 인간선언이 파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산을 통해서 금융피해자의 채무는 한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한편으로 온전히 개인에게 지워지는 빚이 사회공동의 책임이라고 명확히 하는 적극적인 행동이다.
인권운동연대를 비롯한 빈곤인권단체는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를 통해서 금융채무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이며 궁극적으로 인권의 문제임을 알려내고 있다. 매주 토요일 진행되는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는 금융채무자들이 지고 있는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유일하게 현실적인 법안이 되고 있는 파산을 실질적으로 준비하기 위해서 파산에 대한 이해를 비롯하여 법률적 제도적인 준비와 관련한 교육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현재 매주 금융피해자 파산학교를 진행하였으며 파산학교를 수강한 수강생들을 중심으로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금융피해자 인권모임을 진행하고 있으나 여전히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금융채무의 개인의 책임을 넘어 사회적 책임으로
최근 대법원은 금융피해자들의 존엄성과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버리는 판결을 내렸다. 즉 대법원은 신용카드를 적법하게 발급받았더라도 나중에 카드빚을 갚지 못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신용카드를 사용했을 경우 사기죄에 해당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빚을 갚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빚을 갚지 못하는' 금융피해자들의 피 끓는 고통을 대법원은 또 한 번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대법원의 판결은 금융채무의 문제가 여전히 '도덕적 해이'와 개인 책임이라는 논리를 한치 앞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로 인하여 금융기관 및 카드사는 너나 할 것 없이 금융피해자들을 상대로 공격적인 법률적 대응과 과도한 추심행위에 나설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벌써부터 금융피해자들은 대법원의 판결이 개인에 소송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인지 불안에 떨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대법원의 판결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금융자본의 입장을 반영하는 은행과 여신기관의 또 다른 변죽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금융채무의 개인책임을 강요하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금융채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으며 금융채무의 해결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요구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또한 그러한 요구를 중심으로 '누가' 투쟁에 나설 것인가에 있다.
때문에 금융피해자들은 금융채무의 고통과 불법추심의 심리적 압박 그리고 사회적 냉대를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반성과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또한 금융자본의 무한 이윤의 창출을 위해 '금융채무'의 원인과 배경이 아니라 금융피해자들을 피와 땀을 쥐어짜는 금융채무정책은 단지 파산만으로 넘어서기에는 한계가 자명하다. 궁극적으로 파산이라는 고리를 통해서 노동자민중 스스로 '금융피해자'라는 이름으로 주체화되어 금융채무의 책임이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주장하고 투쟁하는 것이 파산학교의 궁극적 목표가 될 것이다. 그래서 신용불량자를 넘어 사회적 권리의 주체인 금융피해자,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빈곤해결과 노동해방의 대장정에 함께 나서는 일주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