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6.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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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타령

박하순 | 운영위원장
작년 초, 주변에 친구가 거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40대 중후반에 접어들어 변변한 친구 한 둘 없다니! 불쌍하고 슬픈 인생이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거의 지속되고 있다. 물론 친구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내가 말하고 있는 친구란 생각도 좀 비슷하고 마음도 주고받을 수 있고 해서 어려울 때 여러모로 의탁할 수 있는 류 말이다.
난 초등학교 5학년 때 전라남도 하고도 고흥이라는 한반도의 맨 아래지역 깡 촌에서 서울로 전학을 하였다. 그 때까지 버스를 한두 번 짧은 거리를 타 봤을까 한 촌놈으로서(고흥 바깥을 벗어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열서너 시간씩이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으니 그야말로 벼락출세(?)였고, 고흥과 서울은 거리상으로 엄청난 단절이었다. 그 이후 가족이 전부 서울로 와 고향엘 갈 기회가 별로 없었다. 벼락출세를 하고 거리가 워낙 멀어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우정이 지속되기는 힘들었다. 지금도 이름이 생각나는 친구들이 몇 있으나 그 이후 도통 만날 기회가 없었다. 서울 초등학교야 약 1년 정도 다녔으니 친구가 있을 수 없는 기간이었고….
중학교는 서대문구에서 3년 꼬박 제대로 다녔고 고등학교도 그 지역에 배정을 받았으나 1학년 말에 집이 강남 쪽으로 이사를 와 학교도 전학을 해야 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까지는 같은 학군 안에서 놀아서 친구들이 제법 있었는데 이들과는 학군변경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몇 친구와 간헐적으로 연결이 되어 몇 번 만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끊긴 상태다. 새로 전학 온 고등학교도 학생 수가 적은 문과 반에서 2년밖에 다니질 않아 친구들이 많을 수가 없고, 몇 있는 친구들과는 생각이 다르고 각자의 처지도 매우 다르기도 하고 해서 관계가 뜸하다.
대학 이후는? 우선 대학 이후 내 이력을 조금 이야기해 보자. 나는 경상계 대학을 나와 정해진 순서대로 취직을 했고, 약 1년 반 동안 회사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민주화운동과 민주노조운동 분위기에 휩쓸려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 나오게 되었다. 한편 대학 중간에는 군에 가서부터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명동성당 청년단체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학문적 지향을 뚜렷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딱히 회사생활을 할 생각은 없어서 대학원엘 진학하였다. 3저 호황 시기여서 짧은 회사생활이었지만 다행히 ‘챙긴’ 돈이 좀 있었던 것이다. 대학원 3년 동안 돈을 전부 쓰고 뛰어든 것이 현재의 노동운동, 사회운동이다.
이 과정 중에 사귄 친구들은 좀 있을 법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도 만만찮다. 왜냐? 우선 1년 반 회사생활에서 ‘건진’ 친구가 있을 턱이 없다. 회사라는 공간이 친구를 사귈 공간이 되기도 쉽지 않거니와(노조가 있는 요즘 회사생활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1년 반은 친구를 사귀기에는 시간상으로도 너무 짧다. 그리고 이들과도 나는 너무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대학원에서는 어떤가? ‘정치경제학’ 세미나를 하면서 같이 지낸 동료들은 비록 나이가 너 댓살 적은 후배들이긴 해도 생각도 비슷하고 해서 평생 친구가 될 법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 들 중에 나처럼 사회운동에 몸담은 친구들은 하나도 없고 다 뿔뿔이 흩어져 제 살기에 바쁘다. 물론 1년에 한 두 차례 보긴 하지만 서로 의지할 친구들이 되기엔 ‘2% 부족하다.’ 천주교 청년단체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만난 기간도 짧거니와 이들도 사회운동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운동경력으로 고위층에까지 간 후배 부부를 매개로 몇 차례 모임이 있었지만 내가 별로 내키지 않아 가질 않았고 물론 지금은 관계가 완전히 끊겼다.
대학에서 사회생활로 이어지는 대학친구들까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들과의 사이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사회운동을 하는 나와 이들과는 생활수준이나 방식, 생각, 정서의 측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별다른 계기가 없다면 앞으로도 이들과의 거리가 더 좁혀질 계기는 별로 없어 보인다. 한편 이들 중 두어 명의 친구와는 요즈음 들어서 꽤 자주 만나고 있는데 이들과의 관계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우선 이들은 다 경제학이라는 전공을 살려 전문적인 일을 하는 친구들인데 난 이 경제학에 비판적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불가피하다고 이야기하고 난 그것이 현재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있고 민중들의 삶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들이 권력을 추구하는 친구들은 아니지만 어떻든 이 사회 지배엘리트의 성원이라 할 수 밖에 없고 난 이들의 ‘타도’를 위해 일을 하고 있으니…. 이 친구들의 나의 활동에 대한 아직까지의 반응은, “하순아! 네 한 몸, 네 가족이라도 좀 잘 건사하면 안 되겠니?” 라며 넘어가 주는 정도다. 나의 활동이 진지하게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들과 진지한 평생친구 관계를 맺을 수 있으려면 내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한 ‘내재적인 비판’ 능력을 키워 이들을 설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운동의 활성화와 이에 영향을 받아 이들이 자신의 현실적 이론적 지반에 대해 비판적 고찰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내가 변하든지. 나로서는 당연히 앞의 것을 선호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겠는가. 암튼 이들 친구와의 관계도 아직 미완성이라 할 수밖에 없다.
사회운동에서 그만큼 오래 있었으면 운동사회에서 친구를 사귈 법도 하지 않은가? 그러나 학생운동을 거치지 않은 나의 이력, 대중운동과 정치조직 및 단체 운동의 분할, 활동가들의 이론적 정치적 분할로 인해 여기서도 친구를 사귀기가 쉽지 않다. 자주 대면하는 동년배의 사람들도 꽤 있고 그 중 일부는 자주 보기도 하지만 매번의 화제는 ‘운동’이다. 생활이나 문화는 거의 없다. 그리고 운동의 위기, 생활의 위기로 모두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어 여유가 거의 없다. 그렇다면 같은 조직인 사회진보연대 안에서는? 위 아래로 5살까지는 친구라는 말도 있고, 철없기로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나여서 어느 정도의 나이차는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주 대면하는 집행위원과 운영위원 대부분이 10살 이상 나이차가 나니, 원! ‘형’, ‘선배’ 소리도 들을 수 없고, 전부 ‘집짱님’, ‘운짱님’이다. ‘4~50대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대환영!’ 플래카드라도 하나 맞춰 바깥에 걸어놓아 대대적인 4~50대 활동가 영입활동을 벌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친구가 귀한 마당에 아내라도 친구가 되면 안 될까?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다. 아내에게 나는 생활고와 아이들 교육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는 대상 이상이 아니다. 위안으로 삼는 것은, 이게 어디 나뿐이겠는가, 이다. 내가 생활과 아이들 교육에 있어 아내가 바라는 최소기준에 다다를 정도의 책임을 지기 전까지는 아내와의 친구관계도 쉽지 않다. 이런!!

이렇게 원고를 막 끝내려다 인터넷을 한 번 휘 둘러보니, KTX 여승무원, GM대우 창원공장 비정규직의 아우성소리, 평택에서 미군기지 확장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농민들의 울부짖는 소리, 생활고에 허덕여 투쟁에 나서고 있는 화물연대 조합원들의 한숨소리, 쌀 개방과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 추진으로 끝 모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농민들의 외마디소리가 ‘참세상’과 ‘민중의 소리’에 넘쳐 난다.

이 때 갈월동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비난 섞인 투정소리, “운영위원장님, 지금 그러고 있을 땝니까?”

기어들어가는 나의 목소리, “40대 중후반 활동가의 외로움도 좀 알아주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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