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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4.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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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강 할아버지의 대추리 연가

진재연 | 정책편집부장
이민강 할아버지(사진=용오)


"개는 집이라도 지키지…." "개는 삶아서라도 먹지….” "개는 도둑이라도 잡지…."
국방부가 경찰병력을 이끌고 대추초등학교를 침탈하러 들어왔던 날, 학교 앞에 쌀가마를 가져다 놓고 앉은 이민강 할아버지가 용역과 경찰들을 향해 내 뱉었던 말들이다. 긴장감이 흐르는 학교 앞에서 할아버지의 호통소리는 잠시 웃음을 주기도 했고,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개보다 못한" 용역과 경찰 중 누군가는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귀를 막고 있기도 했다.

이민강 할아버지는 대추리 명가수다. 언제 어디서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노래 세 곡은 기본이다. 촛불집회에서 항상 맨 앞에 앉는데 사회자가 마이크를 넘기면 사양하는 법 없고 언제나 우렁차게 ‘농민가’를 부르신다. 목소리도 걸걸하신 할아버지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할 때에도 맨 앞에서 서서 큰 소리를 치며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우신다. 말씀도 시원시원하게 잘 하셔서 인터뷰에도 자주 응하는 할아버지는 대추리 유명인사다.

이곳에 살면서 다짐한 것 중 하나는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얼굴과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며 가슴에 담아두자는 것이었다. 서두를 것도 없이,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될 일이겠지만 생각해보니 두 달을 살면서 내가 얼굴과 이름을 함께 기억하는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떤 분들과는 유독 친해질 기회가 있거나 어떤 계기로 인해 마음에 남아 있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민강 할아버지가 그랬다. 3차 평화대행진을 앞둔 늦은 밤 대추초등학교 안에 있는 주민대책위 사무실에서 홀로 깃발을 만들고 계신 이민강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랬다. 팽성의 상징이 된 노란색 깃발을 대나무에 묶으며 “많이 와야 할텐디…”라며 걱정이 많으셨고, 그렇게 평화대행진을 정성껏 준비하셨다. 힘들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예의 그 툭 던지는 말투로 “별것도 아니지…”라며 웃으셨다. 3차 평화대행진이 있던 날, 하늘 높이 타 오르는 황새울 달집앞에서 할아버지는 들녘을 따라 걸어오는 행진의 대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많이 온거여. 그챠?” 많이 와서 우리가 이긴 거라고 즐거워 하셨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할아버지를 졸졸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여쭈어 보기도 하고 댁에 찾아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마을에서 만날 때마다 할아버지 특유의 장난끼 섞인 아이 같은 웃음을 머금고 ‘밥은 먹고 다니능겨?’라고 말을 건네시거나, 헬기나 정찰기가 지나가면 꼭 사진 찍어놓으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신다.

이민강 할아버지는 팽성에서 가까운 안중에서 태어나셨다. 8남매의 둘째였던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집이 하도 어려워 객지를 떠돌며 일을 하셨다. ‘개도 안 먹는’걸 먹으며 8년 동안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 가족들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다 “남의 집 살이 십년하면 장가 못 간다”고 해서 8년 동안 번 걸로 땅 5천 평을 사 스물일곱에 결혼을 하셨다. 그렇게 대추리에 정착했지만 어려움을 호소하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그 땅을 다 처분하고 남의 땅 부치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40년 모진 고생하며 일해 지금 가진 땅은 3천평이 전부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는 환경미화원으로 일하셨다. 할머니가 7천만원을 사기당하면서 신장이 많이 아프셨는데, 그 돈을 갚기 위해서였다. 새벽 두시에서 여섯시까지 환경미화원으로 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 밥 먹고 논에 나가 농사를 지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살아 세상물정을 모르신다며, 일 귀신으로 산 사람을 어디로 가라는 것이냐고 절대 못나간다며 호통을 치신다. 말을 하는 도중에도 화가 나시는지 가슴이 치기도 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환경미화원 일이 너무 힘들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다. ‘달빛이 처량해서’ 노래를 불렀고, 고된 삶을 이기기 위해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노래가 ‘우리땅을 지키기 위한 촛불행사’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대추리에 애착이 많으시다. 안중에 있는 고향 사람들은 ‘고생 그만하고 고향와서 편히 살라’고 하기도 하고, 자식들도 가끔 ‘한국정부도 못 막는 미군을 어떻게 막냐’고 섭섭한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할아버지는 대추리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다. ‘아직은 내가 자식들한테 안 지지….’ 이 땅은 할아버지가 직접 가래질하고 지게로 흙을 날라 짠물 막아 만든 땅이다. 또한 마을에 농협 만드는 일, 학교 만드는 일도 주민들이 직접 했다. 대추초등학교를 지을 때는 주민들이 쌀 걷어서 부지를 샀고, 이렇게 산 땅을 교육청에 기증했다. 밭이었던 곳에 학교가 들어서기까지의 시간에는 주민들의 고되 노동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당시 쌀 다섯말을 내고 학교 짓는 일에도 참여했던 이민강 할아버지는 자식 셋을 모두 대추초등학교에 보냈다. 자식들 고생 안 시키려고 별 짓 다해가며 일군 땅을 미군에게 내 줄 수 없어 이민강 할아버지는 오늘도 비닐하우스 맨 앞에 앉아 촛불을 밝히신다.

며칠 전 할아버지댁으로 모판에 흙 담는 일을 하러 갔었다. 상토를 체에 걸러 모판에 담고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어찌나 힘이 좋으신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신다. 일하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잘렸을 때도 개의치 않고 며칠만에 일을 하셨던 할아버지다. 힘있게 삽질을 하는 할아버지를 보며 흙이 말을 참 잘 듣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돌아보며 말을 툭 뱉으신다. ‘나 소환장왔어’ 3월 6일 대추초등학교를 온몸으로 막고 침탈에 저항했던 사람들에게 소환장이 발부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이민강할아버지에게도 온 것이었다.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평택경찰서로 출석하라는 것이었다.

한국정부는 목숨과도 같은 땅에 포크레인을 몰고 들어와 사정없이 파헤쳤다. 주민들의 키보다 더 큰 구덩이에 드러난 지층의 빛깔은 지난 세월 대추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파헤쳐진 저 아래 땅은 아직 갯벌의 회색 흙빛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위로 갈수록 조금씩 갈색으로 변해가는 흙은 갯벌이 농토로 변해가는 동안 주민들이 흘린 땀과 피를 모두담고 있었다. 땅을 파헤친 것도 모자라 한 평생 땅과 함께 허리가 굽은 농부에게 ‘특수공무집행방해’라는 죄목을 들어 잡아들이려 하고 있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할아버지는 ‘늙은이가 무슨 공무집행방해여? 즈들은 깡패들 데리고 오면서.’ ‘괜찮아, 뭐 암것도 없어’라면서 별일 아니라고 하시면서 또 다시 삽질을 하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일을 시작하시고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아마도 지금 할아버지를 지탱해주는 많은 것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래일 것이다. 그 옛날 달빛이 처량해 불렀던 울고 넘는 박달재처럼 지금 촛불 켜고 부르는 노래들이 할아버지가 지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는 게 아닐까. 두 눈 감고 흥에 취해 부르는 이민강 할아버지의 노래 소리가 있는 한 대추리는 영원히 주민들의 땅이고, 황새울은 농민들의 목숨이다.
주제어
평화 생태
태그
복지 농성 민중연대 기초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