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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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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국경은 없어도 계급은 있다

김상태 | 문화평론가
젊은 영혼들에게, 또 현재를 투시하려는 시선을 위하여

편집인은 나에게 하위문화라는 말을 했었다. 불행히도 나는 그 개념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스스로 느끼는 것만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자본주의 운동의 토대 위에서 현실의 청년들이 어떻게, 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몇가지 정리된 바를 쓰기로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주제를 그렇게 마땅해 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지어논 죄가 있으니 최소한의 마무리는 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지면이 주어진 것은 나에게도 적절한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묵혀둔 충치를 뽑아야겠다. 이는 다음을 위한 쓸만한 축적이 될 것이라는 위안도 함께 누리기로 한다.

제목이 주는 인상은 지독하다. 경직성의 전형처럼 보이는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인간적이라는 것의 의미-그것도 가장 상식적인 의미에서-를 따져 물어야겠다. 그렇지 않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각자들에게, 사랑이란 것이 왜 그토록 괴롭고 더러우며 야비하고 빈곤한 것인지를 이해할 수가 없는 탓이다. 이러고도 계급을 외면한 분탕질들이 인간적이라고 계속 우긴다면, 우린 뭔가 개념을 크게 잘못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젊은 청년들의 삶이 이러한 사항들, 즉 사랑이니 인간적이니 하는 사항들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일까? 조금 무리일런지는 모르지만 임노동의 착취와 상품의 광범위한 지배간의 관계를 떠올리고 싶다. 현상에서 양자는 아무 상관도 없어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절대적인 직접성이다. 우리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그것을 선명히 하는 데 있을 뿐이다.


sex, 애나벨 청 이야기

언제였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1년은 넘었는데 어느 일간지에서 괴상한 기사를 하나 읽은 적이 있다. 한 여자가 251명의 남자와 10시간동안 계속해서 sex를 했다는 것인데 그녀는 대학에서 인류학을 전공한 엘리트 여성이며, 그녀가 그렇게 한 이유는 나름대로 페미니즘적 시각과 입장을 피력하고자 그랬다는 기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감이 가지 않았다. 실제로 벌어진 일인건지 영화를 찍었다는 건지도 정확히 분간하지 못했었다. 나중에 사람들간에 이야기가 되길래 입장을 피력한 적이 있다. 옳고그르고 간에 그녀가 어떤 자본에도 고용되지 않은 채 스스로 기획한 것이라면 그건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또 이런 조건하에서 그녀가 이른바 포르노영화를 제작한 것이라면 그 포르노는 분명히 작품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등의 말이었던 것 같다. 최근에 이 여자를 대상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 영화는 상영중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체는 어떠했을까? 그 다큐멘터리 영화와 주인공 애나벨 청은 끔찍한 존재들이었다. 우선 251명과의 릴레이 섹스는 거대한 포르노자본과 그것을 주무르는 강력한 제작진에 의해서 기획된 것이었으며, 애나벨 청은 육체가 찢길만큼 잔인하게 이용당했다. 본래 300명을 목표로 했는데 중간에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녀는 허영심과 포르노배우로서의 지명도 및 돈을 생각했지만, 그녀의 말로 또한 처참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자본'의 작품이었으며, 돌아보면 내 입장이 가지는 식견은 제법 날카로운 것이었다고 자찬할 지경인데 자본이 이런 식으로 개입되는 곳에서는 아무리 둘러보려 해도 페미니즘이니 자유니 하는 것을 보아줄 여지는 없다.

정말 이상한 것은 이 전형적인 자본의 움직임을 덮어두고, 사태를 다르게 보려는 시각들이다. 추측컨대 애나벨 청은 크게 부족하지 않은 싱가포르의 가정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멋대로 놀아났으며 미국으로 이주해 대학에서 노닥거리다 누드모델이 되고 포르노배우가 되었다. 방탕하여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으니, 포르노업계에서 광대와 거지 노릇을 해야만 했던 것 같다. 그녀는 단지 희생자일 뿐이다. 그런데 왜 여기에 자유의 깃발을 꽂으려고 난리들일까? 그리고 그 깃발을 꽂아서 정말 이득을 보는 건 누구일까? 애나벨 청일까? 그녀는 그러나 빈털터리 아닌가?


대학과 대학생과 이데올로기

작년에 연세대 대학신문사로부터 자신들이 개최하는 포럼에 패널로 참가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주제는 '표현의 자유'였던 것 같은데 당시 영화 '거짓말'이 시비에 걸려 있었으므로 사전에 영화도 관람한다고 했었다. 참가할 생각이었는데, 사정이 있어 글 한쪽만 써보내고 말았다. 그 글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한가지뿐이다. 그런 문제에 대학과 대학생들이 에너지를 투여하는 것이 적합한 일이냐는 질문이었다.

드러나는 것이 가장 잘 보인다. 내가 리버럴리즘이라 불렀던 이 문제야말로, 19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대학을 횡행하는 대표적 이데올로기이다. 확실히 이는 전대미문의 규모이며 분명히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진 대학과 대학인의 모습인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롭게 치장하고, 자유롭게 섹스하고, 자유롭게 놀고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한다.
적어도 그래보이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도덕적 정당성과 비판적 저항성 그리고 지적 논리를 동시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 또한, 그럴듯해 보이는 모습들이다. 사적 개인이 사회적 구조와 선입견에 눌려 위선적이고 억압된 형상으로 지내야 하는 건, 대단히 바람직하지 못하며 우리 사회는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혐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가 항상 궁금해하는 것은 그래서 어째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몰라서 그러는지는 몰라도 그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무엇이냐면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자기 자신부터 그렇게 의식을 바꾸려 하며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노력하려 한다', '시민단체를 포함해서 네티즌들이나 각종의 단위단체들이 더불어 운동해야 한다'와 같은 것이었다. 안됐지만 나로서는 이 말이 전인류를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만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와 얼마나 다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하게 또는 옳게 살려고 하는 일체의 노력은 그게 무엇이든 가치있는 일이다. 여기까지는 크게 이의가 없다. 비판은 다른 곳에서 온다. 언제나 그렇듯 그것은 현실 자체이다.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던 바로 그 시점부터, 대학 도서관에서 학습되어지는 책들이 모두 똑같아졌다. 고시책, 영어책, 뭐 그런 것들이다. 누가 보아도 이 놀라운 획일성은 리버럴리즘의 색깔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또 나는 서울대를 다니는 어느 여대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학생은 몰라도 여학생은 과외를 안하고 사는게 거의 불가능해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화장품이며 옷가지, 액세서리, 핸드폰 비용 같은 것이 겹치면 정말 견디기 힘들거든요."
이 여학생은 평소에 화장기 하나없는, 비싼 옷은커녕 세일하는 가게만 눈에 불을 켜고 다니는, 대신 결코 가난하진 않지만 집에서 용돈을 넉넉히 받을 수 없는 지극히 소탈한 학생이었다. 얘기를 듣노라면 말짱하고 새침하게 살아가는 척 하지만 그 속은 거의 빈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그렇다면 이 여학생에게 당당한 자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자유롭게 입고 연애하고 직업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마이너 캠에 강의를 나가는 친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다. 마이너 캠퍼스의 학생들은 놀라울만큼 보수적이며, 실제로 보수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마이너 캠을 졸업하고 은행에 취직한 한 남학생은 빨리 결혼하는게 목표인데, 현재 상황이나 전망이 만만치 않고 너무 힘들어서 한시라도 빨리 안정해야만 한다고 했다. 이 친구들이 멋모르고 자유로왔다가는, 그 순간 쪽박을 차게 된다는 말이다. 추측건대 이들 보고 의식을 바꾸라 하면 뺨을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은 한 예이지만, 어쨌든 보수와 자유의 문제가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두번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이러한 개개인들이 자유주의의 몇가지 관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하다는 것이다. 사고와 처세의 몇가지, 기호와 취미, 연애와 성에 대한 몇 가지에 대해 그렇다. 실제를 말하자면, 뭔가 한건 하기 전에 그들은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정도가 아니라 조금만 가까이서 조금만 오래 지켜볼라치면 참으로 비참하게 사는 게 그들이다. 소팔아 땅팔아 가문의 기둥으로 취급받던, 사회의 동량으로 대우받던 과거 대학생들의 프리미엄이 그들에겐 없다. 그저 무늬만 찬란할 따름이다.

앞서 애나벨 청 이야기에 대해 언급했다. 요지인즉 현실과 그 현실에 대한 이해가 어처구니 없을만큼 이질적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논의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몇개의 예를 나열했을 뿐이지만, 이 예들은 정말 현실에 잘 부합되지 않는가? 요새 솔직이란 말이 유행이나 참으로 솔직히 생각해볼 일이다. 특히 그가 대학생이라면 이 예들을 절대로 외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왜 상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착취되는가? 결국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왜 모두가 자유롭다고 믿고 있어야 하는가?


청년-자본의 바다 위를 표류하는 자들

앞서, 드러나는 것이 가장 잘 보인다고 했다. 대학생이 청년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들은 지배적인 표상이며 어쩌면 지배적인 실체이다. TV 쇼프로그램을 장식하는 청년들의 거의 전부가 대학생인걸 감안하면, 이는 크게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 이 이상한 현상을 대학이라는 곳에서 분석해 보기로 하자.

·전제1. 자본은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과 산업예비군을 요구하며 그것을 실제로 강제한다.

이 단순한 명제의 의미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당장의 현실과 이 명제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느냐에 있다. 30-40년 전에 이 명제는 한국에서 광범위한 농촌사회의 붕괴와 도시빈민 달동네의 창출이란 전설을, 역사의 모든 페이지마다 서술했었다. 그 이후로 이 명제는 젊은 고등인력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았다. 대학은 이제 상아탑의 대학이 더이상 아니다. 오히려 할 수 있는 한 평준화된 그리고 잘 훈련된 노동자를 양성하는 곳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위기는 1980년대 초중반부터 전면화되었다고 보는데, 1980년대 학생운동의 전면성과 전투성은 이러한 위기와 근본적인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직까지 이런 식으로 1980년대를 접근한 역사적 시각은 발견된 적이 없다.(때문에 그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어쨌든 1990년대는 위기에 대한 대학의 저항이 확실하게 패배해가는 과정이었다. 현 시점에서 자본은, 대학을 노동력시장의 예비장소로 안정시키는데 일단은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전제2. 자본은 전사회적 차원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을 확보하려 하며, 또 그것을 지원하고 보호한다.

개별자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역설은, 그러나 자본론 I권 10장 "노동일" 부분에서 완전하게 서술되었었다. 그 악명높은 구빈원, 다음으로 10시간 노동 및 아동노동에 대한 규제의 법제화는 숱한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자본이 자본으로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이 전제 또한 현실과의 연관성이 문제되어진다. 현재에 있어서 이 명제의 전형적인 표현은 한국사회가 보릿고개의 가난에서 해결되었다는 신화 속에 있다. 최소한 끼니는 굶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질적으로 세련된 것들이 덧붙여졌다. 자동차, 휴가, 각종의 문화생활 등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를 위한 재원이 다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과연 샐러리맨의 봉급으로 충분히 충당되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조건이 나은 샐러리맨은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 별별일을 다한다. 회사가 부여하는 혜택, 은행대출, 부동산과 증권투기 등이 그것이다. 역시 빛깔은 좋지만, 그들은 두눈에 불이 나도록 머리를 굴리며 피곤하게 살아간다. 그나마 조건이 좋아야 이렇다. 그렇지 않은 서민들은 언제나 가족과 친지와 인맥에 의존한다.

대부분 늙은 부모들이 평생을 허리가 휘도록 모아놓은 곳에서, 아니면 있는 자, 가진 자들과의 연줄과 시혜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 그밖에 반 실업적 일거리들과 수단을 부리면 떡고물이 떨어지는, 숱한 브로커성 직업들이 있다.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이렇게 살아간다.
결국 모든 재원은 자본 자신이 군데군데, 마치 아이들 보물찾기 놀이처럼 떡고물로 뿌려 놓은데서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적으로 자본 자신의 한 부스러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희망을 가지고 영악하게 살려하지만, 따지고 보면 절벽 끝에 선 것처럼 불안정하고 무거운 돌을 진 것마냥 고되기 때문이다.

한편 이 체제는 민중과 노동자 자신들을 효과적으로 분열시키고 있다. 즉 능력있는 자들이(꼭 보물찾기처럼) 이 떡고물을 더 따먹을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제법 짭짤한 맛을 보고 산다. 그래서 진짜 게임이론이 등장한다. 누가 먼저 갈 것인가? 상상해보라. 구빈원의 거렁뱅이들에게 빵을 뿌려놓고, 빨리 집는 자가 임자라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현대는 바로 이런 식의 거대한 구빈원이다.

물론 과거보다 재원은 늘어났다. 그러나 거지들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단지 그 거지들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우길 뿐이다. 진정 자본의 위대한 힘은, 이 황당한 희망과 허상을 보편적으로 중독시켰다는데 있다. 사이비종교가 난립하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전제3. 대학은 지배이데올로기와 저항이데올로기가 모순 속에 공존하는 곳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는 지식이 지닌 양날의 칼과 같은 속성과 관계가 있다. 지식이 한 사회에서 조직적으로 양성되어야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무엇보다 지배계급과 지배구조 자체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지식은 그 정의상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해서 대학은 끊임없이 뜨거운 감자와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지배계급의 재생산구조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배구조의 이데올로그들과 저항적 이데올로그들이, 똑같이 대학이란 태내에서 태어난 자들이다.

양자 중 어느 쪽이 우세할 것인가는 항상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과 조건에 맞물려 있다. 1980년대가 저항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시기라면 지금은 그 반대이다.

이 세 가지 전제이면 충분하다. 왜 대학생들은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면서 자유롭거나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첫째, 이들이 부딪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자신들이 빼도박도 못하는 노동시장으로 끌려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화이트칼라로서의 전망이 이토록 괄시받은 적은 없다. 이 점에 대해 사람들은 대학생들의 개성과 의식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실제는 과거에 비해 샐러리맨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수입 및 노동강도가 너무도 열악해졌다는 데 있다. 대학생들은 이것은 정확히 알고 있으며 마치 소가 끌려가야 하는 도살장처럼 회사를 끔찍히 싫어한다.
이것이 고시열풍과 전문가로서이 자격증 준비, 대학원에 무더기로 진학하는 진짜 이유이다.

다른 한편, 마이너 캠의 학생들은 이 지옥을 감지덕지하며 목매단다. 그나마 상층노동자로 행세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이 노동자로서의 운명을 절대로 회피한다. 그렇다면 자유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이젠 분명해진다. 아직도 남아있는 엘리트로서의 대학생의 그림자, 그 기대수준에 비추어 노동자로서의 현실을 기피하고자 하는데 자유주의의 본질이 있다.
그건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의 모습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현실에서 증명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걸까? 그 대답은 전제2에 의해 이미 주어졌다. 그들은 잘만하면 자본의 떡고물을 먼저 주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먼저' 또는 '유리한' 이라는 조건이야말로 그들의 삶에 있어 근원적인 전략이다. 그들은 말한다. 방송인, 작가, 벤처사업가, 글쟁이, 기자, 연예인, 대중음악가나 영화인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그것은 하고 싶어하는 일이라고. 그러나 그 실제 이유가, 노동자가 되지 않고 가능하면 편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는 것보다 진실에 더 가까운 걸까?

가장 불쌍한 일은 이들이 자신들을 자유의 투사나 되는 것처럼 스스로 치장하는 데 있다. 사실 나라고 해도 이런 시기에 대학생이었다면, 생각하는 모양이 별반 다를 게 있나 싶다. 우리는 사회 안에 살기 때문에 의식은 거기에 따라 끌려갈 수밖에 없는 탓이다.

하지만 왜 우겨야 하는 걸까? 가장 솔직하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하는 그들이야말로 가장 자유롭지 못하고 위선적이지 않은가? 현실도 괴로운데 그들의 정신까지 이렇게 썩고 황폐했으니 불쌍하다는 건 지나친 말이 결코 아니다.
대학인들은 이렇게 해서 한쪽으로는 무섭고 야비한 이전투구의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다른 한쪽으로는 그들의 희망처럼 자신만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으려 한다. 이것이 딜레마의 진상이다. 그들은 단지 자본의 바다에서 난파한 표류자들일 뿐이다.


사랑에 국경은 없어도 계급은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명제가 계급간의 혼인이나 연애가 없다는 뜻일리는 만무하다. 단지 우리는 마치 독을 품은 꽃처럼 피어나는 성적 담론의 본질에 대해서 짚어보고자 할 뿐이다. 젊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성에 집착하는 걸까? 그것도 이론적이고 논리적이며 도덕적으로 그렇게 한다. '순결컴플렉스는 사라져야 한다' '성은 자유롭게 누려져야 한다' '좋으면 섹스 할 수 있다' 등등등. 이 자체로만 보면 이는 차라리 하나마나 한 소리와 별로 다를게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태를 아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는 너무도 당연한 얘기라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 당연한 취지가 여간해서는 현실에서 잘 획득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생들은 무얼 주장하는 걸까?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살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여기에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있기라도 하다는 말일까? 먼저 말하자면 천만의 말씀이다.

자본의 바다에 표류하는 자들로서 청년의 이미지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사람은 어쨌거나 직접적인 의미에서, 매일과 매순간이 즐겁고 행복해야 한다. 바로 그래서 묻는 것이다. '노동자'의 운명을 회피하고 '저항'하지도 않으면서 '자본의 떡고물'을 먼저 주워먹겠다는 사람의 하루들은 무얼로 행복할 수 있는가. 모든 이념과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고생하는 노동자에게, 하루들의 행복은 '보다 나아지는 경제조건'과 '가정'과 '자녀들' 그리고 '동료들과의 친교'일 것이다. '저항하는 자'의 그것은 저항을 통해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지식과 그 삶 자체의 창출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주의자들에게는? 내가 보기에, 자유주의자의 낙은 좀더 나은 소비와 무엇보다 성이라는 쾌락 외에는 어떤 것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침팬지나 사람이나 무료하고 권태로우면 스스로를 자극하기 마련이고, 자극 중에는 마약과 섹스를 대신할 것은 별로 없다. 따라서 연애와 성은 자유주의자들의 생존 자체이다. 나는 이런 사정이-정말 인간적으로 하는 말인데- 너무도 이해가 잘 된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이 사명감과 이념으로 성을 논하고 있다는 걸, 나는 전혀 믿지 않는다. 이번에도 증명은 현실에서 주어진다.
대학생들은 성의 자유를 말한다. 또 개성과 튀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들의 삐삐와 핸드폰의, 거의 전체주의를 방불하는 획일성을 보라. 그것도 철저하게 짝짓기 놀음을 위한 목적을 중심으로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커플링이란 반지하며 백일기념 어쩌고 하는 것도 거의 천편일률적이다. 이것부터 우선 몰개성적이다.

더 근원적인 것은 전율할 정도로 집요한 자본주의적 시장 논리이다. 롱다리 신화, 폼생폼사 운운하는 것부터 해서 연애라는 것은 지독하게 고생스런 치장의 연속이다. 못생긴 여자는 더욱 가망이 없어지고, 가난하고 못나고 학벌이 나쁜 남자는 그보다 더 가망이 없다. 자유주의자의 머리 속에는 그 자유를 누리는 자들의 그림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하게 윤택함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자격없는 자들에겐 아무 자유도 없는 그런 자유들이다.

그러나 대학생이 갖는 절반의 노동자·절반의 비노동자로서의 가능성은 이들을 끊임없이 그 이미지로 밀어붙인다. 그리하여 보라. 나는 서른이 넘어 너무도 결혼하고 싶어하고, 연애하고 싶어하는 사정의 대졸 여성과 남성들을 참으로 질리게 보아왔다.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자로 잰듯이 인기 없을 모양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자유주의적 이념은 확고하다. 결국은 구걸과 교만과 허영심과 고통의 이전투구가 벌어진다. 이게 자유주의라는 연꽃이 피어난 죽음의 연못이라는 것의 진상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물어야겠다고 말했었다. 자유로운 사랑과 연애란 사람이 사람에게 감동하고 그 인격과 존재에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렇게 시끄러운 소리들 사이에, 이 당연한 자유와 인간됨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사랑에 국경은 없어도 계급은 있다는 말의 의미는 자본주의라는, 특히 한국 자본주의라는 구조를 빼놓고서는 아무 얘기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자유라니! 버젓이 마천루들로 서있는 이 거대한 세계 속에 필사적으로 투쟁하지 않고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지, 어떻게 성과 사랑과 연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인지 난 그 용빼는 재주를 참으로 알고 싶은 것이다.


맺음말

물론 청년들을 비난하고 싶어해서 하는 말이 아니며, 그들이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누구인들 시대의 아들이 아닐 수 없으며, 사회적 존재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엄혹하고 무서운 것임을 재론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그저 사실을 다시 한번 보자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중에는 우리의 청년들이 얼마나 커다란 모순 속에 있으며, 무엇보다 중요한건 이 모순이 축적한 에너지가 얼마나 거대한 것인지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는 것이 숨어있다.

이 모순은 아마도 청년들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말 것이다. 프랑스의 1968년 5월이 괜히 일어났던 것은 아닐 것이다.
벼랑까지 밀려간 그 순간에 한국의 청년들은 이제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나는 거기서 터져나오는 분노와 진실의 함성들이 결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듯 그들 또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야말로 양적 축적 자체가 아닌가 싶다. 우리는 굴러가고 각자는 싸운다. 결국 한점의 어느 곳에서 모두는 폭발하여 만나야 한다. 그러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이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우리 모두는 깊이 사랑한다.

돌아보면 오히려 문제만을 더 남겨놓은 것 같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청년일반, 더 어린 소년들 그리고 대중일반의 삶과 사고는 여기서 언급한 것들과 뗄 수 없이 얽혀있다. 그 전체를 보려고 한다면 이 글은 시론에도 못 미친다. 나아가 이것은 기껏해야 하나의 에세이다. 그러나 어차피 시작은 거기서부터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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