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입식 교육이 좋다
고민 상담자 귀중
안녕하세요?
저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직장에 다니고 있는 여성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한 여성'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저는 맡은 일이나마 제 나름대로 성실히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긴 집안일과 직장일이 겹치고 정신없이 쫓길 때에는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과 피곤함에 목놓아 울고 싶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긴 했습니다. 그래도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았어요. 남편의 벌이만으로는 사실 너무 빠듯하고 또 저도 전업주부로 있는 것보다는 직장을 다니고 싶었습니다. 중산층이냐고요?
음……. 글쎄요. 우리나라 사람의 80%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데, 그렇다면 하위 10%나 20%에 속하지는 않겠지요. 세상에는 저나 저희 가족보다 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넉넉한 생활은 아닙니다. 가족들과 외식이라도 한번 하기 위해서는 몇주일이고 별러 계획을 세우고 지갑의 돈을 세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니겠어요? 물론 더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특별히 배운 게 많거나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것도 없는 처지에서야 사는 게 그렇지요, 뭐.
어머나, 너무 서설이 길어졌네요.
바쁘실텐데 죄송합니다. 저의 고민거리는 아이들 교육 문제랍니다. 저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역시 자식 교육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지요.
한 애는 이제 중학교에 들어갔고 둘째 아이는 초등학생이랍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어서 대학입시나 고액과외는 지금은 조금 먼 이야기지요. 하긴 큰 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또 그것도 큰 문제가 될 터여서 신문기사를 관심있게 보긴 합니다만, 그건 그때 가서 깊이 생각할 문제고요. 사실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도 지금 발등의 불도 만만치 않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다른 건 힘들게 살아도 자식 교육만큼은 최고로 시키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온갖 특기교육이나 학원으로 아이들을 하루종일 내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정서를 풍부히 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군요.
숙제가 너무 힘들어요
지난 주에 정말 가슴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이의 숙제가 '주말에 부모와 교외에 나간 후 체험담 써오기'였어요. 네, 그 정도는 해야죠. 아이 숙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물론 아이의 정서함양에도 좋을 거구요.
그런데 같은 반 아이의 학부형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숙제를 위해서 학부형 몇이 아이들을 데리고 콘도로 주말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겠냐는 것이었어요. 저는 망설였답니다. 잠깐 교외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콘도까지 빌려서 갔다오는 거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용이 들 테니까요. 부담이 되더군요. 그렇지만 결국은 가기로 했었요. 이렇게 예상치 않았던 비용이 들면 이번 달 가계부가 적자날 게 뻔했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를 위한 일이니까요.
무리를 해서라도 이 기회에 아이들에게 여행경험 시켜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싶었고요. 결과적으로는 잘한 결정이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는 숙제를 전혀 해 가지 못했을 테니까요.
여행을 가기로 한 날, 직장에서 갑자기 특근이 있었어요. 빠지기도 어려웠고, 저는 정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남편 직장은 24시간 교대근무하는 곳이어서 원래 주말여행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요. 할 수 없이 다른 아이 학부형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설명을 하고 우리 아이도 데리고 가줄 수 없냐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낙을 받긴 했지만 그쪽에서도 탐탁치 않은 것 같았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여행을 같이 가더라도 콘도에서 저녁은 가족끼리 오붓하게 보낼텐데, 낯선 아이가 끼어드는 셈이니까요. 아이는 아이대로 울고불고 야단이었어요.
"그 숙제는 엄마, 아빠랑 같이 가라고 했던 거야!" 그러면서 말이지요. "엄마, 아빠가 바쁠 때에는 괜찮은 거야. 숙제에 그렇게 쓰면 돼."하고 간신히 달래서 보냈지만,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걱정도 되고요. 다른 가족틈에서 아이가 얼마나 눈치가 보일까, 그 가족에는 폐를 끼친 것이 아닐까 싶어서 가슴이 정말 아팠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작년 여름방학 숙제는 뭐였는지 아십니까? '신라시대 유적을 탐방하고 사진과 설명, 느낌을 적어오기', '들풀 50가지 채집하기' 등이었답니다. 신라 유적이라면 경주에 가야 되는 것 아니예요? 남편과 저는 간신히 여름 휴가날짜를 맞춰서 경주여행을 갔지요.
비용이요? 네, 만만치 않았지만,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어쨌든 애들에게 역사유적을 탐방하게 하는 건 좋은 일이고 뿌듯한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들풀 50가지였습니다. 학교에서 목록으로 내준 들풀 이름에는 저도 모르는 게 대부분이었고요. 어쩔 수 없이 식물도감을 사야 했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동네야산을 뒤져도 발견할 수 있는 들풀은 몇가지 없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북한산까지 갔었지만, 그래도 별로 찾지 못했어요. 저는 무리한 숙제였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아이들도 다 못 했을 거야"라고 뿌르퉁한 아이를 달랬지요. 그런데 개학을 하고보니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그 숙제를 해 왔다는 겁니다. 그 중 많은 게 강원도에 주로 있는 들풀이었다는군요, 글쎄.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은 경주여행 뿐 아니라 강원도여행도 갔었다는 겁니다.
저야 50, 60명씩 되는 콩나물교실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은 세대 아닙니까? 무조건 달달 외우는 게 공부고 숙제였지요. 그에 비하면 요즘 아이들의 교육은 정말 열린 교육이라고 할 만 합니다. 유적지 탐방이나 자연 탐방, 체험기 써오기…… 이런 숙제가 많아요.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사고력과 정서를 키운다는 점에서 물론 환영할 일이지요. 하지만 솔직히 너무 부담이 됩니다. 그런 숙제는 어린 아이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전혀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학교에서 그것을 돕는 프로그램도 별로 없고요. 그러니까 부모가 돌봐준다는 전제 하에서 내는 건데, 돈도 돈이지만 저희같은 맞벌이 부부는 어떡하라고요.
중학생인 큰 아이 숙제도 놀랄 만한 게 많습니다. 며칠 전 숙제는 컴퓨터로 광고를 만들어 오라는 거였어요. 퇴근해서 집에 갔더니 큰 아이가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더군요. 광고 그림을 예쁘게 만들려면 무슨 프로그램(이름도 까 먹었네요)이 필요한데 집 컴퓨터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냥 문서작성기 정도로 해도 되지만 점수를 잘 받으려면 그 프로그램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없는 프로그램은 할 수 없고, 밤늦도록 아이와 함께 인터넷을 뒤지고 해서 그림을 만들었지요. 저는 아이가 컴퓨터나 인터넷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더군요. 학교에서 컴퓨터 배우지 않냐고 물었더니, 몇 시간 안되어서 능숙할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도와주어야 했지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못 하는 부모들은 어떡하나, 아니 아예 컴퓨터가 없는 집은 어떡하나……. 모든 집에 컴퓨터가 있다는 전제하에 숙제를 내는 것 같더군요. 하긴 저희도 그래서 몇년 전에 큰 돈 들여 컴퓨터를 장만한 것이긴 하지만요. 지금은 이런 구식 컴퓨터는 아무도 쓰지 않는다며,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한 걱정입니다. 아이가 찾던 그 프로그램도 집에 있는 구형 컴퓨터에는 설치도 안 된다나요.
신문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저는 신문을 열심히 보는 편입니다. 집에서는 한겨레신문을 보지요. 네, 진보적인 신문입니다.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따로 지면을 발행할만큼, 관심도 많고요. 직장에서는 조선일보도 보는데 그 신문은 정말 살벌하더군요. '영어 조기교육만이 살 길이다', '컴퓨터 조기교육만이 살 길이다' 이런 표제가 서슴없이 나오고 기획기사로 실리거든요. 그에 비하면 한겨레신문은 '경쟁 교육'이 아니라 '열린 교육, 함께 하는 교육'을 주창하고 있어서, 교육에 대한 제 평소 소신과 맞는 편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그 신문의 교육면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열린 교육, 그러니까 자연을 사랑하고 역사를 알고 창의성을 키우는 그런 교육을 시키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떤 때는 부모들이 적극 참여하는 공동체 교육프로그램이나, 더 극단적으로는 홈스쿨링 같은 것 또는 학부모 참여학교 프로그램같은 것이 좋은 사례로 소개됩니다. 그런 부모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 교육을 시키든지 교육참여를 열심히 하든지, 둘 다 돈과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네, 물론 훌륭한 부모들입니다. 자기자식만 잘 되겠다고 촌지를 갖다바치고 고액과외를 시키고 온갖 학원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부모에 비해, 얼마나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자란 아이들도 정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시민이 될 거예요. 저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구요. 제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단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문에 나오는 생태기행이나 역사기행같은 것 데리고 갈 시간이 없어요. 학교에서 학부모 참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까 봐 겁납니다. 그런 게 만들어지면, 거기에 참여하는 부모를 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사이에 또 벽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공동체 교육 같은 데 적극 참여하는 부모들도, 많이 배우고 시간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야 뭐, 참여를 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신문에 '부모가 말하는 자식교육'이라는 연재란이 있습니다. 대부분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애들과 부모가 나오지요. 글을 잘 쓴다든지, 발명을 잘 한다든지, 춤을 잘 춘다든지……. 그 부모들은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이고 적성에 맞는 교육을 시켰다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 항상 그런 특기를 가지면 대학도 가기 쉽다고 되어 있고요. 이상하게도 또 그런 아이들은 공부까지 잘 하더군요.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할 것도 없네요. 그렇게 창의적일 정도로 부모의 보살핌을 잘 받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에 비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지 한 가지 재능은 있다며 애들을 잘 관찰해 보라는데 저는 그럴 시간이 없거든요. 빠듯한 살림 탓, 직장 일로 바쁜 탓만 대는 것 아니냐고요?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정말 좋은 부모라면 아무리 빠듯하고 바빠도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해야겠지요. 그런데 저는 너무 힘들어요. 저도 아이들 데리고 박물관도 가고 공연도 보러가고 교외에도 나가보고 하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일요일에는 집에서 쉬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불충실한 어머니인가 봐요. 이러니 애들 정서고 교양이고 뭐가 되겠어요? 열린 교육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애들이 될 것 같아요. 신문에서는 무엇보다도 애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대화를 나누고 같이있는 시간을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저는 어떤 때는 신문을 던져버리고 싶어집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보살펴 주려면 제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됩니다. 그러면 특기교육은커녕, 보습학원비 대는 것도 어려워지겠지요. 아이들을 가장 잘 키우고 싶지만, 그걸 위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지요. 여기에 제 고민이 있는 겁니다.
주입식 교육이 낫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열린 교육, 적성 교육, 창의력 교육, 다 좋은 말이지요. 앞으로 점점 그렇게 변할 거구요. 옛날같은 주입식 교육으로는 안된다고들 합니다. 사회와 시대가 다 그걸 요구하고 있다는군요. 대학입시도 그런 아이들을 뽑는 쪽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보면, 아니 사회적 프로그램이 있기나 있나요? 거의 전적으로 부모와 가족의 책임으로 넘겨지는 것 아닌가요? 그런 프로그램이 전제하는 가정은 항상 아이들을 주의깊게 살펴주고 주말에는 자가용을 타고 교외로 나가는 그런 가정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충분히 돈을 벌고 어머니는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는 교양있고 여유있는 그런 가정을 전제하는 게 아닌가요?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저는 차라리 제가 배운 것같은 주입식 교육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때는 적어도 잘 외우기만 하면 점수도 잘 받고 대학도 갈 수 있었지요. 그냥 성실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학교에서는 컴퓨터로 숙제를 해오고, 역사적 유적지나 자연탐방기를 써오라 하고, 예술공연 참관기를 쓰라고 하더군요. 아이들의 정서나 교양을 위해서 아주 좋은 일인데, 저는 왜 서글플까요? 컴퓨터나 예술에 대해서 아이들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부모가 이런 시대에 경쟁력을 갖겠지요.
컴맹인 부모, 고전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부모, 아이들 손 잡고 산으로 바다로 갈 수 없는 부모, 그런 부모의 아이들은 점점 더 낮은 점수를 받겠지요. 열린 교육은 정말 좋은 것이고 빨리 그런 식으로 교육개혁을 해야 한다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다 소리높여 외치는데, 저는 왜 거꾸로 주입식 교육을 바랄까요? 제 정신상태가 뒤집힌 걸까요? 이 고민도 더불어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실은 학부형도 아니고 교사도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교육현장의 모습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 글의 사례들은 몇몇 학부모와 교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례들은 일부 사립초등학교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열린 교육이나 창의성 교육이 사회적으로 프로그램화되기보다는 가정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한, 그리고 그것이 교양있는 중산층-전업주부 가정을 모델로 하고있는 한, 교육 불평등이 오히려 심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두 아이의 어머니이고, 직장에 다니고 있는 여성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한 여성'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저는 맡은 일이나마 제 나름대로 성실히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하긴 집안일과 직장일이 겹치고 정신없이 쫓길 때에는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과 피곤함에 목놓아 울고 싶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긴 했습니다. 그래도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았어요. 남편의 벌이만으로는 사실 너무 빠듯하고 또 저도 전업주부로 있는 것보다는 직장을 다니고 싶었습니다. 중산층이냐고요?
음……. 글쎄요. 우리나라 사람의 80%가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는데, 그렇다면 하위 10%나 20%에 속하지는 않겠지요. 세상에는 저나 저희 가족보다 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넉넉한 생활은 아닙니다. 가족들과 외식이라도 한번 하기 위해서는 몇주일이고 별러 계획을 세우고 지갑의 돈을 세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다들 그렇게 사는 것 아니겠어요? 물론 더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특별히 배운 게 많거나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려받은 것도 없는 처지에서야 사는 게 그렇지요, 뭐.
어머나, 너무 서설이 길어졌네요.
바쁘실텐데 죄송합니다. 저의 고민거리는 아이들 교육 문제랍니다. 저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역시 자식 교육문제가 가장 큰 관심사지요.
한 애는 이제 중학교에 들어갔고 둘째 아이는 초등학생이랍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어서 대학입시나 고액과외는 지금은 조금 먼 이야기지요. 하긴 큰 애가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또 그것도 큰 문제가 될 터여서 신문기사를 관심있게 보긴 합니다만, 그건 그때 가서 깊이 생각할 문제고요. 사실 아직 어린 아이들인데도 지금 발등의 불도 만만치 않습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다른 건 힘들게 살아도 자식 교육만큼은 최고로 시키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온갖 특기교육이나 학원으로 아이들을 하루종일 내모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정서를 풍부히 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 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되는군요.
숙제가 너무 힘들어요
지난 주에 정말 가슴아픈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이의 숙제가 '주말에 부모와 교외에 나간 후 체험담 써오기'였어요. 네, 그 정도는 해야죠. 아이 숙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물론 아이의 정서함양에도 좋을 거구요.
그런데 같은 반 아이의 학부형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 숙제를 위해서 학부형 몇이 아이들을 데리고 콘도로 주말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가겠냐는 것이었어요. 저는 망설였답니다. 잠깐 교외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콘도까지 빌려서 갔다오는 거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용이 들 테니까요. 부담이 되더군요. 그렇지만 결국은 가기로 했었요. 이렇게 예상치 않았던 비용이 들면 이번 달 가계부가 적자날 게 뻔했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이를 위한 일이니까요.
무리를 해서라도 이 기회에 아이들에게 여행경험 시켜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싶었고요. 결과적으로는 잘한 결정이었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이는 숙제를 전혀 해 가지 못했을 테니까요.
여행을 가기로 한 날, 직장에서 갑자기 특근이 있었어요. 빠지기도 어려웠고, 저는 정말 좌불안석이었습니다. 남편 직장은 24시간 교대근무하는 곳이어서 원래 주말여행같은 건 엄두도 못 내고요. 할 수 없이 다른 아이 학부형에게 전화를 걸어 사정설명을 하고 우리 아이도 데리고 가줄 수 없냐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승낙을 받긴 했지만 그쪽에서도 탐탁치 않은 것 같았어요. 그렇지 않겠어요? 여행을 같이 가더라도 콘도에서 저녁은 가족끼리 오붓하게 보낼텐데, 낯선 아이가 끼어드는 셈이니까요. 아이는 아이대로 울고불고 야단이었어요.
"그 숙제는 엄마, 아빠랑 같이 가라고 했던 거야!" 그러면서 말이지요. "엄마, 아빠가 바쁠 때에는 괜찮은 거야. 숙제에 그렇게 쓰면 돼."하고 간신히 달래서 보냈지만,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걱정도 되고요. 다른 가족틈에서 아이가 얼마나 눈치가 보일까, 그 가족에는 폐를 끼친 것이 아닐까 싶어서 가슴이 정말 아팠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작년 여름방학 숙제는 뭐였는지 아십니까? '신라시대 유적을 탐방하고 사진과 설명, 느낌을 적어오기', '들풀 50가지 채집하기' 등이었답니다. 신라 유적이라면 경주에 가야 되는 것 아니예요? 남편과 저는 간신히 여름 휴가날짜를 맞춰서 경주여행을 갔지요.
비용이요? 네, 만만치 않았지만, 그건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어쨌든 애들에게 역사유적을 탐방하게 하는 건 좋은 일이고 뿌듯한 경험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들풀 50가지였습니다. 학교에서 목록으로 내준 들풀 이름에는 저도 모르는 게 대부분이었고요. 어쩔 수 없이 식물도감을 사야 했답니다. 그런데 아무리 동네야산을 뒤져도 발견할 수 있는 들풀은 몇가지 없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북한산까지 갔었지만, 그래도 별로 찾지 못했어요. 저는 무리한 숙제였다고 생각을 하고 "다른 아이들도 다 못 했을 거야"라고 뿌르퉁한 아이를 달랬지요. 그런데 개학을 하고보니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그 숙제를 해 왔다는 겁니다. 그 중 많은 게 강원도에 주로 있는 들풀이었다는군요, 글쎄. 그러니까 다른 아이들은 경주여행 뿐 아니라 강원도여행도 갔었다는 겁니다.
저야 50, 60명씩 되는 콩나물교실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은 세대 아닙니까? 무조건 달달 외우는 게 공부고 숙제였지요. 그에 비하면 요즘 아이들의 교육은 정말 열린 교육이라고 할 만 합니다. 유적지 탐방이나 자연 탐방, 체험기 써오기…… 이런 숙제가 많아요.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사고력과 정서를 키운다는 점에서 물론 환영할 일이지요. 하지만 솔직히 너무 부담이 됩니다. 그런 숙제는 어린 아이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전혀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학교에서 그것을 돕는 프로그램도 별로 없고요. 그러니까 부모가 돌봐준다는 전제 하에서 내는 건데, 돈도 돈이지만 저희같은 맞벌이 부부는 어떡하라고요.
중학생인 큰 아이 숙제도 놀랄 만한 게 많습니다. 며칠 전 숙제는 컴퓨터로 광고를 만들어 오라는 거였어요. 퇴근해서 집에 갔더니 큰 아이가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리더군요. 광고 그림을 예쁘게 만들려면 무슨 프로그램(이름도 까 먹었네요)이 필요한데 집 컴퓨터에는 그런 프로그램이 없다는 거였어요. 그냥 문서작성기 정도로 해도 되지만 점수를 잘 받으려면 그 프로그램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없는 프로그램은 할 수 없고, 밤늦도록 아이와 함께 인터넷을 뒤지고 해서 그림을 만들었지요. 저는 아이가 컴퓨터나 인터넷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니더군요. 학교에서 컴퓨터 배우지 않냐고 물었더니, 몇 시간 안되어서 능숙할 정도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도와주어야 했지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컴퓨터를 못 하는 부모들은 어떡하나, 아니 아예 컴퓨터가 없는 집은 어떡하나……. 모든 집에 컴퓨터가 있다는 전제하에 숙제를 내는 것 같더군요. 하긴 저희도 그래서 몇년 전에 큰 돈 들여 컴퓨터를 장만한 것이긴 하지만요. 지금은 이런 구식 컴퓨터는 아무도 쓰지 않는다며, 다른 것으로 바꿔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한 걱정입니다. 아이가 찾던 그 프로그램도 집에 있는 구형 컴퓨터에는 설치도 안 된다나요.
신문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저는 신문을 열심히 보는 편입니다. 집에서는 한겨레신문을 보지요. 네, 진보적인 신문입니다.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따로 지면을 발행할만큼, 관심도 많고요. 직장에서는 조선일보도 보는데 그 신문은 정말 살벌하더군요. '영어 조기교육만이 살 길이다', '컴퓨터 조기교육만이 살 길이다' 이런 표제가 서슴없이 나오고 기획기사로 실리거든요. 그에 비하면 한겨레신문은 '경쟁 교육'이 아니라 '열린 교육, 함께 하는 교육'을 주창하고 있어서, 교육에 대한 제 평소 소신과 맞는 편이지요.
그런데 요즘은 그 신문의 교육면을 보면 가슴이 아파요. 열린 교육, 그러니까 자연을 사랑하고 역사를 알고 창의성을 키우는 그런 교육을 시키는 부모들의 이야기가 나오지요. 어떤 때는 부모들이 적극 참여하는 공동체 교육프로그램이나, 더 극단적으로는 홈스쿨링 같은 것 또는 학부모 참여학교 프로그램같은 것이 좋은 사례로 소개됩니다. 그런 부모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린 교육을 시키든지 교육참여를 열심히 하든지, 둘 다 돈과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네, 물론 훌륭한 부모들입니다. 자기자식만 잘 되겠다고 촌지를 갖다바치고 고액과외를 시키고 온갖 학원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부모에 비해, 얼마나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자란 아이들도 정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훌륭한 시민이 될 거예요. 저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구요. 제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고 싶단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신문에 나오는 생태기행이나 역사기행같은 것 데리고 갈 시간이 없어요. 학교에서 학부모 참여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까 봐 겁납니다. 그런 게 만들어지면, 거기에 참여하는 부모를 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사이에 또 벽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공동체 교육 같은 데 적극 참여하는 부모들도, 많이 배우고 시간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래야 뭐, 참여를 하든지 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그 신문에 '부모가 말하는 자식교육'이라는 연재란이 있습니다. 대부분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애들과 부모가 나오지요. 글을 잘 쓴다든지, 발명을 잘 한다든지, 춤을 잘 춘다든지……. 그 부모들은 어렸을 때부터 창의적이고 적성에 맞는 교육을 시켰다더군요. 그리고 마지막에 항상 그런 특기를 가지면 대학도 가기 쉽다고 되어 있고요. 이상하게도 또 그런 아이들은 공부까지 잘 하더군요.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할 것도 없네요. 그렇게 창의적일 정도로 부모의 보살핌을 잘 받은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에 비하면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지 한 가지 재능은 있다며 애들을 잘 관찰해 보라는데 저는 그럴 시간이 없거든요. 빠듯한 살림 탓, 직장 일로 바쁜 탓만 대는 것 아니냐고요? 그런 것 같기도 하군요. 정말 좋은 부모라면 아무리 빠듯하고 바빠도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해야겠지요. 그런데 저는 너무 힘들어요. 저도 아이들 데리고 박물관도 가고 공연도 보러가고 교외에도 나가보고 하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일요일에는 집에서 쉬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불충실한 어머니인가 봐요. 이러니 애들 정서고 교양이고 뭐가 되겠어요? 열린 교육 시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애들이 될 것 같아요. 신문에서는 무엇보다도 애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대화를 나누고 같이있는 시간을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저는 어떤 때는 신문을 던져버리고 싶어집니다.
아이들을 그렇게 보살펴 주려면 제가 직장을 그만두어야 됩니다. 그러면 특기교육은커녕, 보습학원비 대는 것도 어려워지겠지요. 아이들을 가장 잘 키우고 싶지만, 그걸 위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지요. 여기에 제 고민이 있는 겁니다.
주입식 교육이 낫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열린 교육, 적성 교육, 창의력 교육, 다 좋은 말이지요. 앞으로 점점 그렇게 변할 거구요. 옛날같은 주입식 교육으로는 안된다고들 합니다. 사회와 시대가 다 그걸 요구하고 있다는군요. 대학입시도 그런 아이들을 뽑는 쪽으로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보면, 아니 사회적 프로그램이 있기나 있나요? 거의 전적으로 부모와 가족의 책임으로 넘겨지는 것 아닌가요? 그런 프로그램이 전제하는 가정은 항상 아이들을 주의깊게 살펴주고 주말에는 자가용을 타고 교외로 나가는 그런 가정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충분히 돈을 벌고 어머니는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는 교양있고 여유있는 그런 가정을 전제하는 게 아닌가요?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저는 차라리 제가 배운 것같은 주입식 교육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 때는 적어도 잘 외우기만 하면 점수도 잘 받고 대학도 갈 수 있었지요. 그냥 성실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학교에서는 컴퓨터로 숙제를 해오고, 역사적 유적지나 자연탐방기를 써오라 하고, 예술공연 참관기를 쓰라고 하더군요. 아이들의 정서나 교양을 위해서 아주 좋은 일인데, 저는 왜 서글플까요? 컴퓨터나 예술에 대해서 아이들을 잘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부모가 이런 시대에 경쟁력을 갖겠지요.
컴맹인 부모, 고전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부모, 아이들 손 잡고 산으로 바다로 갈 수 없는 부모, 그런 부모의 아이들은 점점 더 낮은 점수를 받겠지요. 열린 교육은 정말 좋은 것이고 빨리 그런 식으로 교육개혁을 해야 한다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다 소리높여 외치는데, 저는 왜 거꾸로 주입식 교육을 바랄까요? 제 정신상태가 뒤집힌 걸까요? 이 고민도 더불어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실은 학부형도 아니고 교사도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교육현장의 모습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이 글의 사례들은 몇몇 학부모와 교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사례들은 일부 사립초등학교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른바 열린 교육이나 창의성 교육이 사회적으로 프로그램화되기보다는 가정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한, 그리고 그것이 교양있는 중산층-전업주부 가정을 모델로 하고있는 한, 교육 불평등이 오히려 심해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