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7.3.72호

사회주의와 세계대전: 제2 인터내셔널의 붕괴(2)

조르주 옵트 |
<2부: 패배를 향한 길>


1913년의 전환점

1913년 발칸의 끊임없는 분쟁이 진정되었다. 1911년의 심각한 위기가 끝나자 1912년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는 낙관주의의 물결이 일었다. 이는 열강들 사이의 긴장 증대라는 장기적 분석을 왜곡했고, 단기적 이론을 정당화했다. 국제정책 추세의 재평가는 단순히 정치상황에 대한 평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카우츠키, 베벨, 바우어(Otto Bauer) 등이 승인한 제국주의에 대한 접근법에 따른 것이었다. 발칸의 위기가 끝나자 유럽전쟁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은 확증되는 듯 보였다. 점점 더 많은 사회주의 지도자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경제적 이해관계는 매우 가까운 미래에 열강 간의 화해(rapprochement) 정책과 일반적 군축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1911년,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중도좌파 이론가 레데부어(George Ledebour)1)는 자본주의 사회질서에 반전이라는 강력한 요인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모든 활동이 더 이상 전적으로 호전적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고 정식화했다. 조레스(Jean Jaur z)는 이런 태도의 위험성을 의식했고, 위협이 어느 때 보다 더 거대하며, 날이 갈수록 유럽의 무기력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봤다.
2차 발칸전쟁은 이전 분쟁의 사후효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단지 지역적으로 중요한 현상일 뿐이라 여겨졌으며, 더 이상 유럽의 평화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으로는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조레스와 프랑스 통합사회당(SFIO)은 낙관주의 물결의 영향을 받았지만, 국제행동을 늦추지 않았다. 사회주의 언론은 군국주의에 대한 경계를 항상 호소했지만, 위협이 여전히 즉각적이라는 감정을 전달하지는 않았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ISB, International Socialist Buerau)은 위기 동안 국제적 명성이 높아진 오스트리아 정당 지도자 아들러의 조언에 따라 감시자의 역할을 유지했다. 그는 인터내셔널이 바젤에서 얻은 추진력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바젤대회에서 형성된 공세적 추진력은 약화되었고, 억눌렸다. 1913년 『새시대』2)는 독일에서 반군국주의 운동의 붕괴에 주목했다. 로자는 노동자계급에게 '바젤의 횃불'을 더 널리 전하지 않는 당 지도부의 수치스러운 행동을 비난했다. 1913년 9월 예나 대회에서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3)은 당 지도부가 공세적 추진력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는 데 실패했다고 인정했지만, 그에 따르면 그것은 불가능한 과제였다. 인민들은 수개월 동안 '생계비'의 상승, 발칸전쟁과 군비지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으며, 인구 전체가 어떤 피로감에 지쳐있었다. 사실상 이러한 방향전환은 전술적 고려의 결과가 아니라 인터내셔널의 기본 방향과 전체 전략의 결과였다.
비록 평화를 위한 투쟁은 선전 주제로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대중을 동원할 수 없었다. 유럽 위기의 진정은 낙관주의 물결의 하나의 요인이었다. 유럽 사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전쟁의 위협과 쇼비니즘의 부상에 저항할 수 있다는 확신은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의 자기만족을 반영했다. 위스망스는 1913년 인터내셔널이 스칸디나비아 자본가계급으로부터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뻔 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증거를 찾았다(실제로는 벨기에 상원의원 라퐁텐이 수상했다). 리비아 전쟁에서 민족주의적 태도를 취한 이탈리아 분파의 지도력 붕괴를 중요하게 여긴 사회주의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반면 발칸의 소규모 사회주의 정당의 사례(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와,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정당의 확고한 자세와 투쟁은 자랑스럽게 지적되었다.
매우 분명해 보였던 각 정당들의 관점 차이는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조레스는 "독일 의회 체계의 취약성, 독일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전체주의와 연방주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당으로 통일된 400만 명의 결정을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은 없다"고 말하며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을 인정했다. 조레스의 발언은 1913년 3월에 처음으로 계획된 SFIO와 SPD 간 공동 투쟁의 정신을 반영한다. 양국의 프롤레타리아는 평화의 보증자일 뿐만 아니라, 양국을 더욱 가깝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1913년 3월 1일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대규모 군비지출의 입법화를 준비하고 있는 시점에서 지배계급의 음모에 대항해 함께 싸우는 것은 프랑스와 독일의 사회주의자의 의무다."라는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평화, 민족독립, 민주주의의 진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국내영역에서는 상비군을 오직 국가 방어만을 목적으로 하는 '인민의용군'(peoples' militia)으로 대체하고, 국제영역에서 모든 국가 간 분쟁이 조정수단을 통해 해소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ISB의 중개 역할은 점점 더 제한적이게 되었다. ISB는 두 정당을 신뢰했고, 그들의 공동행동을 승인했다. 두 정당의 공통된 목적은 프랑스와 독일에 대한 여론의 인식을 바꾸는 것이었다. SFIO는 독일 노동자 대중의 평화주의적 경향, SPD의 반전활동, 수년간에 걸친 SPD의 반군국주의 교육에 대해 관심을 주목시키기 위해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1912년 1월 SPD의 승리(400만 득표, 하원 397석 중 110석 장악)는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1913년에 SFIO가 SPD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는지, 아니면 프랑스의 새로운 접근법이 단지 선전을 위한 책략이었는지에 관한 문제가 제기된다. 그에 대한 증거는 모순적이다(불신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도 있고,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증거도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소르본느의 교수이며 독일문제 전문가인 앙들레(Charle Andler)는 독일 사회주의 중에서 민족주의적, 제국주의적 조류가 있다는 증거를 제시했고,4) 이는 제2인터내셔널의 기층에서 갑자기 시한폭탄이 터진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앙들레의 논문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거대한 흥분을 자아냈다. 조레스는 그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고, SFIO는 공개적으로 그의 관점과 관계를 끊었다. 조레스와 SFIO의 대응은 정치적 목적 때문인가(앙들레의 주장은 사회주의의 적대자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3년 징병법'의 승자에 의해 활용되었다), 아니면 선전 목적 때문인가? SFIO는 사회주의의 국제적 연대라는 신화의 영향을 받았나? SFIO의 대응이 SPD 지도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카우츠키는 조레스와 프랑스 통합사회당 상임운영위원회(CAP)의 대응이 늦었다고 비난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 투쟁의 두 번째 목적(무장화 반대)은 프랑스의 '3년 징병법'에 대한 강력한 반대운동으로 해석되었다. 독일에서 SPD는 군비지출법 초안에 반대하는 투쟁을 제안했다. 독일 하원에서 사회민주주의그룹이 이러한 의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한다. 1913년 6월 법안이 52대 37로 승인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당내 좌파들은 "우리의 반군국주의 투쟁은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비판했지만, 국제적인 사회주의 여론은 그렇지 않았다. 하제(Ernst Haase)는 "특별군비과세(special military assessment)가 사회민주주의의 요구에 조응하는 과세 시스템을 향한 첫 번째 단계가 될 것"이라며 그 법이 반전 투쟁에 기여한다고 입증하고자 했다.5)
독일 프랑스 간 공동행동을 펼치자는 열망은 확고한 대중시위로 발전하지 않았다. 투쟁의 초점은 우선 여론을 형성하고, SPD가 의회 내에서 좌익과 자유주의자들을 결합시키기 위한 의회활동을 펼치는 데에 맞췄다. 1913년 4월 9일 스위스의 여러 인사들이 두 나라 사이의 군비증강에 항의하고, 특히 알사스-로렌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의 의원들을 소집했다. ISB의 서기장은 이러한 움직임을 전면적으로 지지했다(ISB의 서기장은 국제사회주의의원위원회(International Parliamentary Socialist Commission)의 서기장이기도 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사회주의 정당이 어떤 형식과 조건으로 참여할 것인지가 유일하게 남은 문제였다. 바이앙은 사회주의 정당은 자신의 관점을 원리선언문의 형태로 표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 제안은 채택되었다. CAP, SPD 집행부, 두 나라의 사회주의 의원그룹이 합의한 선언문은 부르주아 평화주의 운동과의 협력 증진을 목표로 했다. 선언문은 바젤 결의안을 상기하면서, 사회주의적 평화주의 원칙을 제시했고, "근대전쟁은 중간계급의 광범위한 부문을 위협한다. 쇼비니즘적 도발, 정복정책, 군비증강에 반대하는 부르주아 그룹과 정당은 양국 사민주의자들의 전면적인 지지를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협의회는 1913년 5월 11일 베른에서 열렸고, 155명의 의원이 참여했다(독일 34명, 프랑스 121명). 독일 대표단 중에서 (사실상 다수인) 28명이 SPD 소속이었고, 프랑스 대표단 중에서는 38명이 SFIO 소속이었다. 그런가하면 나머지 83명은 급진파, 독립 사회주의 당, 또는 여타 집단을 대표했다. 이 회의에는 베벨, 하제, 리프크네히트, 샤이데만, 몰켄부르, 조레스, 바이앙, 토마, 셈바트(Marcel Sembat)가 참여했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개최되었다. 결의안은 평화주의적 부르주아가 받아들일 만한 일반적 용어로 작성되었다. 여기에는 해군 및 육군 군비지출의 제한과 헤이그중재재판소(Hague arbirtation Court)에 의한 국제분쟁의 정착에 대한 청원이 포함되었다. 협의회 활동의 지속과 확대를 위해 '프랑스-독일의 화해를 위한 양국의원위원회'가 구성되었다.6) 협의회에 대해 독일은 회의적이었지만, 프랑스 사회주의자는 위대한 성공으로 간주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에게 이는 영국, 프랑스, 독일의 삼자동맹을 지지하는 광범위한 운동이라는 최종적 목적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이 시기 조레스의 논문에서도 영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외교정책이 국제긴장 완화를 위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언급을 종종 찾을 수 있다. 1908년 이후 조레스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화친협상으로 평화를 보장한다는 계획을 구상했다. 로자는 조레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이런 생각을 엄중하게 비판했다. 그 결과 조레스는 자신의 구상을 바이앙의 제안에 맞춰 수정했다. 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인사들은 프랑스, 영국, 독일 삼자동맹 구상을 소중하게 생각했지만,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환상도 없었다. 그러나 1913년 여름, 바이앙은 영국 노동당의 지도자와 관계를 맺을 때가 왔다고 믿었다. 그는 오랜 친구인 키어 하디를 통해 즉각 결과를 얻고자 했다. 이에 대해 키어 하디는 ISB 또는 ISB 집행위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고 제안했고, 바이앙은 그것을 약속했다. 7월 중순 위스망스와 반데르벨데가 런던의 협의회에 참석했을 때, 바이앙은 영국 사회주의 정당들과의 통일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와 관련된 행동을 촉구했다. 위스망스와 반데르벨데는 요청을 수락했지만, 노동당 지도자들은 이러한 제안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바이앙은 ISB 집행위가 이를 최대한 정력적으로 추진하길 촉구했지만, 집행위의 권위는 노동당이 행동에 돌입하도록 자극하기에는 불충분했다. 바이앙은 영국의 침묵을 나쁜 징조 또는 그들의 부동성의 증거로 해석하지 않았고 SFIO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아미엥, 1914년 1월 25-28일). 글래스고 영국 노동당 연례 대회는 아미엥 대회가 끝난 바로 그 날 시작되었고, 바이앙의 제안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글래스고 결의안은 해군 군비지출의 급증에 대한 비난과 영국, 독일, 프랑스의 평화적 동맹에 대한 요구를 채택했다. 클라인즈(John Robert Clynes)가 바이앙의 제안을 지지했고, 당이 세계 평화를 보장할 영국-프랑스-독일 협정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노동당은 이런 생각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당의 관심 부족을 유럽 대륙의 문제들에 대한 영국 노조주의자들의 전통적인 '무관심'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노동당의 태도는 1914년 봄 인터내셔널에서 우세해지기 시작한 사고 틀의 징후였다.

1914년의 데탕트: 하나의 환상

장기간의 긴장과 부침을 거친 후, 모든 사회주의자들은 유럽이 지속적인 데탕트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믿었다. 간혹 표현된 지역 분쟁에 대한 근심은 무시되었다. 분쟁을 증식하는 경제시스템에 대한 관점은 근대 자본주의 내부의 평화주의적 경향의 증대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오직 소수의 좌익만이 뿌리 깊은 낙관주의와 투쟁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7)
1914년 1월 8일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그룹 위원회'는 프랑스에 공개서한을 보내서,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대표단이 이탈리아 또는 스위스에서 모여 세 나라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하는 회합을 열자고 요청했다. 이 제안에 열정적으로 응한 곳은 없었고, 프랑스 사회주의자 의원단은 제안된 협의회의 방편에 대한 논평을 구하기 위해 이 서한을 ISB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탈리아의 제안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의 즉각적 응답을 요구했다. 1905년 이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사회주의 정당 사이에는 연계가 있었고(특히 1911년), 두 정당은 군비 증대에 반대하는 공동행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공동행동의 모양새를 유지하면서도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들이 항상 향유했던 해동의 자유를 지킬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는 숙고를 거쳐 답신을 보냈다. 답신은 신중했지만 대부분 이탈리아의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 사무국이 보기에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이 여론에 바라던 효과를 미치기에는 상황이 (특히 프랑스-이탈리아 관계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이러한 회합을 그 시점에서 개최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 간 평화가 위협 받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알바니아 국경문제가 야기한 외교 분규를 우려한 이탈리아 사회당이 제안을 되풀이했고, SFIO 사무국,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 ISB에게 알바니아 문제에 대한 공동행동에 합의하기 위한 회의를 제안했다. 비엔나, 브뤼셀의 반응 못지않게 파리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위스망스는 "이러한 경솔한 조치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CAP는 "프랑스만 알바니아 문제에 간접적으로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모임에 대표단을 보내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CAP는 8월 비엔나에서 국제대회가 열리므로, 모임을 그때까지 연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내셔널은 세력균형의 변화가 일반적인 상황을 바꿨고 외교적 긴장을 감축했다고 믿었다. 아들러는 러시아가 발칸전쟁으로 인해 약화되었고, 오스트리아 역시 그러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독일과 영국의 분쟁을 끝났다는 확신은 강화되었다. 따라서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은 발칸전쟁의 전리품을 둘러싼 음모들(예를 들어 알바니아 문제)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긍정적인 추세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1914년 5~6월, 인터내셔널은 처음으로 일반적인 데탕트가 현재 상황의 특징이라고 분명히 언급했다. 사회주의자들은 국제외교가 점점 더 문명화되고 있다는 조레스의 생각에 동의했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은 경제호황과 장기적 경제추세 간의 결합이 확립됨으로써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설명했다. 사회주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루이스(Paul Louis)는 'The causes of the international detente(국제 데탕트의 원인들)'이라는 논문에서 정부의 평화정책을 경제적 요인을 통해 설명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자본주의적 낭비가 엄청나게 증가했기 때문에 모든 열강은 '실질적 재정 실패'로 고통 받고 있다. 예산균형을 위해 정부들은 군비지출을 상당히 감축할 수밖에 없다. ② 무장분쟁의 위협은 열강이 식민지를 두고 싸우는 동안 지속된다. 현재 식민지 전리품은 분배되었기 때문에 정부들은 정복정책의 성과를 거둬들이려고 한다. ③ 예상할 수 없는 사회 정치적 반발을 동반하는 세계적 경제위기는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한다. 루이스는 "자본주의 체제는 평화와 전쟁을 반복한다. 현재 정부들은 평화를 선호한다. 경제적 상황이 그들을 신중하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사회주의 좌파가 더 선견지명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 1914년 6월 로자는 반전행동 때문에 고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 로자는 독일 군대의 전횡을 공격했지만,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진영에서 의견 차이는 일반적인 국제상황에 대한 평가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고, 부르주아 평화주의자와 협력을 지속할 것인지 여부와 관련된 문제였다. 좌파의 권위자인 로자는 심각한 유보 조항을 두었지만, 부르주아 평화주의자가 군사공채(military credits)에 반대하는 투표를 해야 한다는 조건부로 동맹을 승인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평화의 보전을 특별한 쟁점으로 세우거나, 평화주의적 선동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하다고 생각했다.8) 앞으로의 임무는 데탕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비엔나 국제대회에서 장기 정책이 제시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때까지 ISB가 제안한 것은 ① 프랑스-독일 화해를 위한 캠페인과 같은 현존하는 행동을 지속한다, ② 우호적인 환경을 활용하여 사회주의를 확산하고 인터내셔널의 기층을 강화한다. 1914년 봄, SFIO의 선거 승리는 민주주의 세력과 특히 프랑스 사회주의의 강화로 해석되었다. 조레스는 쇼비니즘적 우파에 대한 방어적 투쟁은 군사적 위협을 대부분 제거했고, 남아 있는 장애는 대단치 않다고 생각했다. 독일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당은 시급한 목표를 달성했으므로, 더 나아가 진정한 독일-프랑스 화해를 이루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결국 일반적 군비철폐와 중재재판소(Compulsory Arbitration Court)의 실행을 이끌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5월 31일 바젤에서 열린 프랑스-독일 의원위원회는 "현 시점은 지속적인 화해를 달성하기 위해 잘 계획된 운동을 펼치기에 순조로운 시점이다"라고 합의했다.
그러나 이 시기 운동에 활용된 몇 가지 사실은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결정적인 시기 동안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이 마음에 품었던 희망과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중요하다.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는 프랑스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평판을 끌어 올렸고, 라인강 다른 편에 있는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국제적 의식이 성장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확신을 강화했고,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주전론자이고, 군국주의자이며, 쇼비니스트다"라는 부르주아 언론의 고발이 뻔뻔스러운 거짓말임이 드러나도록 했다. 첫째는 차베른 사건9) 이후, 독일 제국의회 내에 알자스-로렌의 자치체제를 요구하는 사회주의 그룹의 존재다. 둘째는 로자의 재판이다. 그녀는 프랑크푸르트의 회합에서 "독일 노동자가 원하는 최후의 것은 프랑스에 대한 침략전쟁이다. 우리의 프랑스 형제들에 대해 무기를 드는 게 예상된다면, 우리는 '안 된다. 우리는 이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혐의로 고소되었다. 셋째는 5월 외교정책에 관한 제국의회의 토론과정에서 사회주의자 대표단의 벤델(Wendel)은 프랑스-독일의 우호를 호소하고, 프랑스와의 협정(understanding)을 달성하기 위한 독일 노동자계급의 결정을 엄숙히 선언하는 연설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1914년 봄 SFIO의 선거강령에도 널리 활용되었다. 강령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나라가 공격의 위협을 받는다면 결연히 민족독립을 방어할 것이며, 탐욕스러운 군국주의와 참담한 전쟁에 반대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상호 이해와 평화를 위해 투쟁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문장은 시사적인데, SFIO와 SPD 간 연계의 정도와 그들 간 협력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원칙은 국제주의, 반군국주의가 아니라, (위협을 받는 자신의 나라를 방어하길 원하는 사람들의) 자코뱅주의적 애국주의와 방어적 전쟁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태도를 화해시키는 것이다. SFIO 선거강령의 작성자로 짐작되는 조레스는 이러한 시도의 한계를 의식했지만, 두 개념들이 충돌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원칙이 현실에서 검토되고 나서야 차이가 드러났다. ISB는 프랑스-독일의 화해를 위한 운동을 정치적 전술적 각도에서 사고했고, 이 투쟁이 데탕트에 기여하고 인터내셔널의 영향력을 전체적으로 강화하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여겼다.
인터내셔널 구성원의 수는 증가했고, 정치적 입지는 상승했다. 1914년 세계 사회주의 정당의 전체 회원 수는 420만 명이었고, 이는 코펜하겐 대회의 당원 숫자인 240만 명의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인터내셔널은 1913~14년의 선거 승리, 특히 1913년 가을 이탈리아의 승리와 1914년 봄 SFIO의 승리를 평화주의자의 승리로 간주했다. 1차 세계대전 전야에 각국 의회에는 약 700명의 의원단이 존재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창립하고 의원을 배출하게 되었다. 사회주의는 남아프리카와 아시아에도 진출하여, 일본, 인도네시아, 중국, 이란에서 발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ISB는 도덕적 권위를 활용하여 일부 가맹 정당 간의 통일성을 재확립하고자 했다. 반군국주의는 분할된 운동의 공통분모로 이해되었고, 인터내셔널의 도덕적 지위를 강화함으로써 비엔나 대회 이전에 영국, 러시아, 폴란드, 불가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의 통일성을 회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ISB는 다음을 긴급히 제안했다. 첫째, 영국 내 세 개의 사회주의 정당의 대표단 회의를 개최할 것.(이 회의에서 세 정당이 1915년까지 점진적으로 통합한다는 원칙을 합의한 듯하다.) 둘째, 불가리아의 두 사회주의 정당 간 경쟁을 종식하라는 긴급한 호소를 발표할 것. 셋째, 7월 중순 브뤼셀에서 개최될 러시아(와 폴란드) 사회주의자 통합대회를 정력적으로 준비할 것. 이 회의때문에 인터내셔널 의장 반데르벨데는 1914년 6월 러시아를 방문했다. 사회주의자는 이 방문을 짜르 정부에 대한 유화적 태도로 해석했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카우츠키는 1914년 7월 인터내셔널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고 단결되었다고 주장했다.

제국주의에 대하여: 실패한 논쟁

1913년 말, 사회주의 정당들은 비엔나 대회를 준비하는 데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1912년 9월, ISB의 네델란드 대표 트룰스트라(Pieter Jelles Troelstra)10)는 인터내셔널 정기회의의 위상을 제고하고 관장 범위를 넓히는 데 사회주의 지도자들이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1913년 12월 13~14일, 런던에서 열린 ISB의 13차 정기회의는 국제대회의 의제를 검토했다. 여러 정당이 작성한 13개 제안이 정기회의 개회 전에 제출되었다. 전쟁의 위협은 몇 달 전에 비껴갔고, 국제 상황은 고요해 보였다. 따라서 ISB는 비엔나에서 검토될 주제를 선택하면서, 유럽 노동자운동 내부의 문제를 가장 시큽한 문제로 삼았다. 정기회의 두 달 전 카우츠키는 노동자운동이 『권력을 향한 길』(Der Weg dur Macht)에 묘사된것과 같은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다. 즉 노동조합의 투쟁과 계급적대의 악화를 통한 진보는 끝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 달랐다. 1913년 10월 18일 아들러(Victor Adler)는 "정치투쟁 배후의 더 거대한 혁명적 추진력이 아니라, 광범위한 무관심, 실망, 불안이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카우츠키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에 "행동하기를 원하지만, 어떤 형태의 행동을 취해야 할 지 모르는 딜레마에 처해 있다는 정서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 말했다. 이런 환경에서 당 내부의 다양한 조류들 간의 차이가 더 분명해졌고, 로자가 이끄는 좌파는 당 지도부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SPD 지도자들의 수동성 탓에 대중들이 용기를 잃고 사기가 저하되었다고. 카우츠키는 국제적 불안의 성격을 강조했고, 당 지도부나 당의 운동 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퇴행적인 정치적 조류에 문제가 있다고 대응했다.
ISB 런던회의에서는 카우츠키의 관점이 우세했고, 그 관점에 따라 비엔나에서 토론될 문제를 결정했다. 동시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는 데 동의가 이뤄졌다. 따라서 비엔나 대회의 조직과 의제를 준비하기 위한 조정이 그 이전 대회들보다 더 신중하게 이뤄졌다. 이에 따라 조직적 개선과 프로그램의 진보가 이뤄졌다.11) 의제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코펜하겐에서는 12개 의제를 다루었지만 비엔나에서는 5개 의제로 줄었다), 더 폭넓은 문제들이 제기되었고 쟁점적인 문제들을 검토해야 한다는 인식도 늘어났다. 이전 대회에서는 당면한 정치상황에 초점을 맞췄지만, 비엔나 대회에서 제 2 인터네셔널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를 검토하자고 제안했다. 반데르발데의 용인에 따라 ISB는 알코올 중독에 대한 투쟁을 의제에 상정했다. 러시아 정치수의 상황도 의제로서 고려되었다.12) 수년 동안 인터내셔널은 러시아의 정치테러를 규탄했고, 짜르 체제에 대한 여론을 불러일으키려고 노력했다. 1913년 러시아 노동자운동의 성장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두 요인을 배경으로 러시아 정치수 문제가 주요한 이슈로 부상했다. 인터내셔널은 정당 내부 문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 사회주의자의 통합 문제를 '국제사회주의자의회'(International Socialist Parliament)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제기했다.
세 가지 주요한 의제는 실업, 생계비의 증대, 제국주의였다. 세 가지는 유기적 전체를 구성했다. 실업 문제에 관한 보고서는 가장 중요한 서구 세 정당의 대표가 맡았다. 인터내셔널의 베테랑이며, ISB의 가장 적극적인 대표이며,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지도자 바이앙이 (조레스의 주장에 따라) 프랑스 대표로 지목되었다. 독일에서는 SPD의 서기관 몰켈부르가 임명되었다. 그는 담배 노동자 출신이며, '반사회주의법' 당시부터 당원으로서 제국의회 의원이었고, 1896년 런던 인터내셔널 대회와 1904년 암스텔담 대회에서 사회정책과 노동자 보험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었다. 또한 영국 노동당의 맥도널드(Ramsey MacDonald)13)가 보고서를 제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가 보고서를 제출할 수 없게 되자 벨기에 노동자당이 보고서를 제출했다. 1908년 이후로 생계비의 상승은 인터내셔널의 뜨거운 주제였고, 노동조합은 분주히 캠페인을 펼쳤다. 생계비의 상승은 경제정책의 불가피한 결과인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떤 조류를 표현하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 인터내셔널은 비엔나대회에서 분명한 해답을 찾고자 했다. 웹(Sidney Webb)(페비안협회의 창립자이자 이론가, 저명한 정치경제학자이자 노동조합 전문가), 후스토 박사(Juan B. Justo)(아르헨티나 사회주의자당의 지도자, 라틴아메리카 마르크스주의의 개척자, 『자본』의 스페인어 번역자), 바우어가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주요한 쟁점인 제국주의에 대한 네 명의 연사 중에서 조레스와 하제는 1913년 사망한 베벨의 후임자로 들어섰다(베벨은 '인터내셔널의 도덕적 권력자'로 여겨졌다). 그러나 베벨의 의장직을 계승한 하제는 아직 권위가 부족했다. 조레스는 국제적 명성이 높았지만, 인터내셔널에서 중재자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머지 둘은 개량주의적인 '네델란드사회민주주의당'의 의장인 블리겐(Willem Hubertus Vliegen)과 영국 사회주의자 키어 하디였다. 1914년 6월 말, 대부분은 임무를 완수했다. 연사 선정은 주제 선정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러나 급진 좌파는 리프크네히트만이 단지 상징적으로 참여했다. 중도좌파 중에서는 하제와 뷔름(Wurm)뿐이었다(게다가 알코올 중독 문제에 참여했다). 대부분의 연사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생계비 상승 문제에 관한 세 명의 연사를 보면, 후스토는 공공연한 개량주의자였고, 웹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오스트리아-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존경 받는 대표인) 바우어 역시 '수동적 급진주의'의 옹호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비엔나 대회는 인터내셔널 내의 다양한 경쟁적 조류 간 투쟁에서 중요한 단계였다.
생계비와 제국주의 문제의 관계는 1910~13년 동안 SPD의 연례총회에서 전술 채택에 관한 토론, 특히 대중파업에 대한 토론을 통해 드러났다. 좌익 급진주의자인 판네쿠크는 "새로운 위험과 파국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제국주의가 대중을 위협하고 있다. 조세·생계비 상승, 전쟁의 위협의 상황에서 대중의 저항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이 초래되는 데 있어 의회 결정의 책임은 단지 부분적일 뿐이며 따라서 의회 내에서는 이 문제에 관해 부분적으로만 싸울 수 있다. … 그러므로 대중투쟁은 현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적 전개의 자연적 결과이며,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필수적이다."라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인 엘런보겐(Wilhelm Ellenbogen)은 "지속적인 물가상승이 폭동을 불러일으킴에 따라 당은 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일련의 시위를 조직해야 했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은 조직된 회합으로 제한될 수 없었고, 적의에 찬 시위가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사회주의자 정당에 고유한 불안을 드러냈다. 특히 영국과 오스트리아에서 항의운동은 중요성을 획득했고, 급진적 조류를 고무했다. 오스트리아에서 투쟁은 당의 명령을 넘어섰고, 1911년 9월 비엔나에서 경찰에 의해 난폭하게 진압된 가두 충돌을 낳았다. 독일 좌파는 대중파업의 문제를 더 넓은 범위에서 토론하기 위해 생계비의 문제를 인터내셔널에 제출했다. 로자의 요청에 따라 1911년 9월 23일 ISB 회의에서 그 문제에 대한 토론이 열렸고, 그녀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결의안은 "생계비의 끔찍한 증가는 굶주린 대중의 폭력적 항의투쟁을 유발하고 그것은 유럽국가들이 추구하는 관세정책, 농업 압력집단의 범죄적 보호주의 정책의 결과다", "생계비의 증가는 자본가 카르텔의 책략이며, 프롤레타리아의 최악의 적"이라고 밝혔다. 다음 해 바젤 대회는 "세계적 무기증강 광란은 생계비의 폭등을 낳고, 계급격차의 거대한 증대와 노동자계급 내부의 엄청난 긴장을 창출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구조적 위기인가, 또는 순전히 우연적(일시적)인 것인가? 하지만 후스토의 보고서는 실망스러웠다. 보고서는 물가상승에 대해서나, 금본위제의 가치와 근본위제가 물가상승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간의 논쟁에 대해서나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이 논쟁에 관해 1912년 『새시대』의 칼럼에서 카우츠키, 힐퍼딩(Rudolf Hilferding), 바르가(Evgenii Samoilovich Varga)와 싸운 이는 바우어였다). 그러나 웹과 특히 바우어의 보고서는 매우 중요한 문서였다. 웹은 지난 20년 동안 물가가 상승한 속도만큼 임금이 상승하지 않았다고 강조했고, 이에 따라 실질임금 하락 원인과 개선책에 집중했다.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학파의 지도자 중 하나인 바우어는 이미 1910년 생계비 문제에 관한 방대한 분석을 출판했다. 1911년 9월의 동요하는 시기가 지난 후 그의 정당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 시위는 당의 대의에 피해를 끼쳤다. 그것은 노동자의 전투성에 제한을 가했고, 적의 난폭성을 불러 일으켰다. 거대한 당에서 대중행동은 공동의 책임감에 기초해야 하며, 자신과 적의 힘에 대한 잘못된 계산은 정치적 대오류를 낳는다." 바우어도 이런 관점을 공유했나? 그의 신중한 보고서에서 그는 명확한 태도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발언했지만 다른 영향, 특히 한계효용학파의 영향도 엿보인다.
그의 보고서는 물가변화에 대한 조사로부터 출발해서, 자본주의의 거대한 팽창은 급격한 물가상승과 관련을 맺는다는 데 주목했다. 그가 19세기 경제발전의 특징으로 보았던 이러한 현상은 1873년 위기와 함께 끝났다. 1895년 이후 자본주의는 무제한적 성장을 경험했고, 또 다른 물가상승을 낳았다. 바우어가 보기에 물가운동은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과정의 표현이었고, 그는 당시의 물가상승 조류가 지속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특히 그가 보고서를 준비했던 1914년 5월 시점에서). 바우어는 자본주의 경제를 부양하는 요인들을 평가하고 농업의 상당한 후진성을 조사하면서 제국주의를 경제적 현상의 하나로서 분석했다. 산업구조의 변화(카르텔, 트러스트, 독점)를 다룬 장은 그의 초기 작업과 힐퍼딩의 저서에 기초했다. 바우어는 급속한 산업발전과 농업후진성의 불균형이 당대 자본주의가 극복할 수 없는 생계비 증대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보았다. 농업생산은 계속 증대하는 산업사회의 필요를 더 이상 충족할 수 없었다. 바우어는 이를 '소농 대중의 도시화'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후에 세계시장의 압력 때문에 동유럽 농업이 생산성을 증대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극복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의 사회적 결과는 무엇인가? 바우어의 결론은 신중하고 모호했다. 노동자계급은 19세기 후반 20년 동안 강력한 산업화로부터 이득을 얻은 후 다시금 착취의 강화에 노출되었다. 따라서 생계비는 노동자 저항을 자극하는 요소가 되었고, 나아가 산업 자본주의 국가 밖에서도 생계비는 사회적, 민족적 운동의 일차적 요인이다. 이에 따라 개량주의적 환상은 일소되었고 계급투쟁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은 복권되었다. 그러나 바우어는 현존하는 격차는 커지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즉각적인 위기의 위협을 받는 것은 아니고 단지 성장 리듬이 증대하는 정도의 구조적 변화를 겪을 것이라고 보았다. 제국주의 국가들 내부의 훨씬 더 뚜렷한 계급적 차이, 아시아와 식민지 국가의 혁명운동의 강화는 장기적 과정으로 간주되었다. 생계비는 노동조합에 의한 공세를 부활시켰다. "생계비는 노동자계급이 더 높은 임금을 위해 싸우게 했다."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 생계표준을 낮추는 경향에 제한을 가하게 했다.
웹은 생계비가 1914년 최고조에 오른 영국의 사례를 분석했고, 그는 생계비 상승에 대해 덜 단정적이었다. 그의 보고서는 독점의 성장이 소비재 가격의 인위적 상승을 낳기 때문에 실질임금의 하락을 이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실질임금의 하락은 상대적이고, 노동자의 구매력 하락은 생계표준이 상승한 전체적인 발전과정에서 분리된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는 노동조합이 독점체가 잉여가치를 새롭게 분배하도록 강제하는 게 가능하다고 제시했다. 이러한 노선은 제국주의가 계급차이를 강화하고 혁명적 전술을 필요케 한다는 좌파 이론과 모순되었다. 웹에 따르면 혁명과 대중파업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가속화된 발전으로부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개혁과 노동조합 투쟁이 필요했다.
자본주의 조류를 분석한 모든 보고서는 훗날 루카치가 '자본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경제적 항복'이라고 부른 것을 반영했다. 즉 자본주의 체계 내에서 잘 조절된 생산의 응집력에 대한 믿음과 이것이 팽창하여 경제위기가 극복될 것이라는 견해를 담고 있었다. 여러 실업에 대한 보고서는 모두 이러한 결론에 동의 했다. 실업은 제한된 규모로 증가했으며, 이는 인터내셔널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적은 규모였다. 과잉생산에 따른 경치침체나 위기의 징후가 있다면, 오직 독일에서만, 그것도 건설산업 영역에서만 발견될 수 있었다.
SPD의 제안에 따라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토론이 요청되었다. 외견상 명백해 보이는 '제국주의'라는 용어를 두고 실제로 두 가지 문제에 대해 토론해야 했다. 한 편으로는 열강들 간의 차이의 성격을 정의하고 유럽의 충돌위협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결정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전쟁발발을 막기 위해 어떤 수단을 취할지, 총파업에 호소할지 아니면 단순히 중재재판소 방식을 재현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1913년 12월 ISB의 짧은 회의에서 의견을 교환한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대표부는 "키어 하디-바이앙 제안을 비엔나 대회의 의제로 상정하고, 그것을 중재재판소 문제와 함께 더 광범위한 제국주의 문제와 연결하는 데 동의했다." 19세기에 '제국주의'라는 사회주의자의 용어는 열강의 새로운 팽창정책, 침략정책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14) 1900년 이후로 좌익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를 "사멸하는 자본주의의 정책"으로 간주했고, 레데부어는 "자본주의 최고 단계의 고유한 현상"으로 간주했다. 비록 1901년, 1902년 ISB 정기회의에서 제국주의가 의제로 상정되었고 수많은 논문의 주제였지만, 그것은 열강이 세계를 지배하고 분할하는 데 따르는 세계평화의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의 저작 중에서는 1902년에 출판된 『제국주의』의 저자인 영국 경제학자 홉슨(John Atkinson Hobson)에 대한 참고자료를 찾기는 힘들다. 그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제국주의 개념을 정의했고, 팽창의 정치적 측면이 아니라 제국주의 사회 그 자체에 끼치는 효과를 강조했다. 그는 발전된 민족에 의한 후진적 민족의 착취, '기생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개념은 매우 천천히 사회주의 이론에 침투했다. 1909년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의미에 서 경제적 의미로 강조점이 변경되었고,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시장, 원자재 공급원, 투자처를 위한 투쟁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의 사회주의 지도자 힐퀴트(Morris Hillquit)가 1914년에 "제국주의는 유럽 정치사전에서 상대적으로 새로운 용어지만, 그 정의는 어느 정도 모호하다"라고 썼던 것처럼, 활동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명확히 흡수되지는 않았다.
비엔나 대회에서의 토론과 조사를 위한 출발점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 힐퍼딩의 『금융자본: 최근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연구』이었다. 힐퍼딩은 마르크스의 『자본』에 의식적으로 의지하면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경제체계의 중요부분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금융자본에서 유래하며 최대 이윤을 위한 산업·금융 독점체의 세계적 투쟁의 특정한 결과이며, 무장충돌을 불가피하게 하는 모순이다. 그러나 국제 금융자본가가 식민지 전리품을 평화롭게 나눌 수 있으므로, 자본주의가 침략적 제국주의로 변질될 필요가 없다. "자본주의적 집적과 제국주의적 경쟁의 극적인 국면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증법의 한 단계일 뿐이다." 힐퍼딩의 분석은 첨예한 논쟁을 낳았다. 1911~13년 사회주의 저널에 발표되고, 1914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주장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특징이 분쟁을 창출하는 모순을 중화하며 자본주의의 이해는 유럽 전쟁의 위협을 감축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 이론에 의해 형태를 갖추었다.15) 그는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자연적, 필수적 팽창 경향이라고 보지 않았고, 농업 분야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본주의 국가가 행사하는 폭력으로 간주했다. 군비경쟁이 경제적 필요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므로, 제국주의 내의 평화주의 이론을 강조하는 게 중요했다. 경쟁을 위한 투쟁 대신에 국가는 카르텔을 형성할 수 있다. 카우츠키에 따르면, 국제적 규모의 집적 경향은 위기 국면의 종료를 나타냈다. 베벨 역시 이런 관점을 공유했다.
1912년 9월 켐니츠에서 열린 SPD 대회에서 당 지도부는 사회주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제국주의 문제를 대회 의제로 상정했다. 대회 보고자 하제는 제국주의의 호전적 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나 동시에 군비증강을 제한하자는 영국의 제안 속에 군비증강이 다른 이해와 경제적 조류를 지닌 자본주의에 사활적인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담겨있다고 보았다. 하제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침략적 경향은 세 가지 주요 요인에 의해 제한되었다. 첫째는 세계시장에서 영국자본과 독일자본의 협력이다. 이는 영국-독일의 분쟁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다. 둘째는 평화를 보장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형제애적 연대다. 셋째는 전란의 결과에 대한 공포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SFIO도 이러한 관점들을 공유했다. 불일치는 원칙보다는 상황에 따른 것이었다. 1911년 12월 20일, 모로코에 관한 프랑스-독일 협정을 비준한 의회에서 연설에 나선 조레스는 베벨과 동일한 생각을 전개했다. 그러나 조레스에 따르면, 평화를 보장하는 요인으로 경제결정론에 기초한 것 외에 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군국주의적 조류에 저항하는 인류애라는 도덕적 요인이다. 금융자본주의의 탐욕성에 고유한 전쟁의 항구적 위협이 존재한다는 것이 조레스의 관점이었다. 위기는 지방적 분쟁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이러한 분쟁들을 불러일으키고 활용하는 방식으로부터 출현한다. 따라서 이러한 영향에 항상 대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조레스의 평화주의는 급진적이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좌파는 제국주의의 평화적 발전에서의 새로운 단계라는 전망뿐만 아니라 '초제국주의' 이론도 단호히 거부했다. 켐니츠 대회에서 논쟁은 절정에 도달했다. 다양한 조류의 대표들은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고, 좌파 자신도 분할되었다. 렌쉬(Paul Lensch), 라덱(Karl Radek), 판네쿠크가 소속된 극좌파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발전의 내재적 필연성으로, 군비증강 경쟁을 불가피한 '궁극적, 최고 단계'로 간주했다. 그들이 보기에 무장해제를 달성하고 정부 간 합의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유토피아적이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리프크네히트는 이런 분석을 거부했다. 그는 무장해제와 국가들 간의 협정이 평화를 보존하는 기회라고 보았다. 급진 좌파들 간의 뉘앙스의 차이나 기본적 불일치는 모두 제국주의적 현상이 나타내는 이론적 난점을 묘사했는데, [SPD 대회에서] 전술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후 사라졌다. 1912년, 판네쿠크는 이렇게 썼다.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은 의식적인 프롤레타리아가 새로운 방식의 행동을 취하게 한다. 우리가 대중 행동과 그것의 필연성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조직된 노동자에 의한 의회 외부의 개입을 뜻한다. 노동자는 그들의 대표자들을 통해서가 이니라, 정치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16) 급진 좌파들의 합의사항은 집행부의 방어적 전술과 제국의회에게 모든 정치투쟁을 위탁하려는 시도에 대해 격렬히 비판하자는 것이었다. 당 집행부는 자본주의 사회의 조건에 대한 예측과 진단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노동자운동의 즉각적인 목표와 혁명적 수단을 위한 급진 노선의 필요성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켐니츠 대회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1913년 1월 로자는 (켐니츠 대회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자본축적』을 출판했고, 이는 의견 차이와 논쟁의 진정한 성격을 드러냈다. 그녀는 '非자본주의 지역'으로 자본의 팽창을 분석하면서, '제국주의의 공포'를 격렬히 공격했다. 이 이론의 목적은 제국주의의 혁명적 함의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붕괴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체계의 붕괴는 역사적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로자의 이론은 신중하게 받아들여졌고, 심지어 적대감을 낳았고,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로자의 저서는 판네쿠크, 엑슈타인(Gustav Eckstein), 바우어의 공격을 받았다. 레닌은 이러한 비판을 승인했고, 로자의 저서가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릇되게 해석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1913년 3월 카마네프에게 쓴 편지에서 "그녀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다. 그녀는 마르크스를 불구로 만들었다. 내가 1899년 인민주의자들을 비판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판테쿠크, 엑슈타인, 바우어가 그녀를 비난한 것에 대해 나는 기쁘게 생각한다"고 썼다. 로자의 제국주의 이론은 수정주의자들뿐만 아니라 급진 좌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SPD는 인터내셔널에 논쟁을 제기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인터내셔널 대회는 민족 정당 내부의 차이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을 삼갔다. 유일한 예외는 '밀레랑(Millerand) 사건'과 같이 원칙적 문제가 걸린 것이었다. 1914년 SPD가 제기하고자 했던 것은 그와 같은 경우였다. 그러나 집행부는 그 방식을 매우 조심스럽게 모색했고,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이 지지를 받고 있다고 간주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우어의 보고서는 핵심 문서이자 구실이 되었다. 바우어는 카우츠키 이후 마르크스의 권위자로 간주되었고, 제국주의 문제에 대해 이론적 해명을 할 것이라고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바우어는 기대를 받았던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난점을 의식했고, 신중함을 선택했다. 그는 이론적 문제의 해답에 관해 회피했고, (로자를 처음으로 비판했었지만) 로자에 대한 공격을 억제했다. 그래도 바우어의 보고서는 로자와 좌파에 대한 간접적인 회답이었다. 그는 이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반대해야 하고, 의견 차이나 논쟁이 언급되어선 안 된다고 제안했다.
한편 조레스는 여러 이유 때문에 보고서를 만들지 않았다. 키어 하디는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다양한 영국 정당들의 대표로 구성된) 영국 ISB 회의 후에 보고서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보고서는 제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년 전 1912년 켐니츠 대회에 보고서를 제출했던 하제는 자세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대신에 1914년 6월 말에 당 집행부가 채택한 결의안을 비엔나 대회에 제출했다. 그 문서는 켐니츠 대회 결의안의 희석된 변종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하제의 국제 상황에 대한 재평가는 본질적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제의 새로운 보고서는 독일과 영국의 화해 때문에 국제 긴장이 상당히 완화되고 있다고 제시했다.
하제는 당의장으로서의 입장 때문에 독일 정부의 최근 억압적 조치들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었지만, 네덜란드의 보고자 블리겐은 훨씬 더 자유로웠다. 비엔나에서 모이기로 한 '국제사회주의자의회'에 제출된 보고서 중에서 그의 보고서는 바우어의 분석 다음으로 관심을 끌었다. 물론 그의 관찰 범위나 영향력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의 이론은 개인적인 것도 아니고, 독자적인 것도 아니다.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 사이의 제국주의와 전쟁 조류에 대한 사고를 공개적으로 설명하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개량주의적 테제와 초제국주의 이론을 조리 있게 제시했다. 바우어가 경제적 분석을 통해 자본주의의 기본적 특징을 설명하고자 했다면, 블리겐은 이러한 발전이 국제정치에 끼치는 효과를 연구하고 유럽 전쟁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론을 정식화했다. 그들의 출발점과 접근법은 다르지만 바우어의 분석과 블리겐의 이론은 어떤 연관성이 있었다. 만약 자본주의가 경제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면, 결국 자본주의가 전쟁을 유발하는 요인을 제거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이다. 국제적 정치위기를 국지화하고 위기의 효과를 평화주의적 정책으로써 점진적으로 감축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하고 나아가 개혁을 통해 불평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역할은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즉 사회영역에서는 노동자의 이익을 방어하고, 외교정책에서는 모든 군국주의적 경향을 저지하고 반전운동을 강화하는 것이다. 블리겐은 군국주의적 조류와 무기경쟁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장래에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이해관계는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고 확신했다. 블리겐은 1914년 6월 이러한 입장을 제시했다. 무엇 때문에 그는 이렇게 생각했나? 첫째,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전쟁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전쟁이 모든 나라에 경제적 파멸을 안겨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그는 국가들이 서로 싸우게 된 주요 원인은 식민지 경쟁 때문에 나타났는데, 세계분할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열강들의 특정 지역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위한 분투에 기인한 분쟁은, 러일전쟁과 발칸전쟁이 증명하는 것처럼 세계대전을 촉발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배계급에서조차 평화주의적 요소가 우세하고, 정부들은 이중적 위협에 맞서 전쟁을 피하고자 한다고 생각했다. 블리겐은 여론과 정부집단들이 중재재판소를 받아들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의 보고서의 중요성은 바젤 임시대회의 선언문을 수정하려는 시도에 있다. 당시의 문헌들을 자세히 조사하면, 1913년 이후로 바젤 결의안이 수정되고 재해석되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바젤 대회는 "인위적으로 보존되는 영국과 독일의 적대는 평화에 대해 최대의 위협"이라고 간주했지만, 블리겐은 두 열강 간의 가시적 화해는 위험을 떨쳐버린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하제의 보고서와 조레스의 저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숙명론적 비관주의는 결정론적 낙관주의로 대체되고, 실천적 결과는 부동주의(wait-and-see)였다. 이런 관점에 관해 SFIO, 특히 조레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노선을 취했다. 의견은 분할되었고, 특히 코펜하겐 국제대회에서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은 문제에 관해 의견이 나뉘었다. 즉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취해져야 할 수단을 정의하는 문제였다. 비엔나 대회는 이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

총파업 논쟁의 재연

비엔나 대회의 목적은 상황을 재평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반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책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주의와 독일 사민주의자들 간의 접근법의 차이 때문이 그러한 결정은 매우 어렵다는 점이 드러났다. 새로운 낙관주의로 인해 전통적이고 의회적인 틀 안에서만 해결책이 고려되었다. 하제와 블리겐의 보고서는 국제중재재판소라는 착상의 구실이 되었다. 그들은 지난 대회의 권고안 내에서만 사고했다. 하지만 그들은 중재재판소를 즉각적인 정치적 목적으로 재정의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파업에 대한 공개적 거부가 재확인되었다. 블리겐은 "국제대회에서 [반전활동에 관한] 수많은 결의안이 통과되었지만, 각 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 수단들을 자유롭게 선택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1914년, 프랑스 사회주의자 대부분은 지난 코펜하겐 대회에서 바이앙과 키어 하디가 제출한 제안이 채택되어야 한다고 확고히 결정했다. 1914년 7월 14~16일, 파리에서 열린 SFIO 임시대회에서는 평화를 위한 투쟁의 무기로서 총파업이 채택되어야 한다는 조레스의 제안이 승인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분할되었고, 기존의 의견 차이에 이런 차이가 더해졌다. 독일 사민주의 지도자는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을 공공연히 반대했다.17) 그들이 보기에 총파업은 전쟁을 방지하는 데 아무런 도움도 안 되었다. 왜냐하면 총파업에 대한 호소는 각 민족들에서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국제주의적 신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결정은 "프롤레타리아가 가장 잘 조직되고 인터내셔널의 결정을 이행하는 데 가장 충실한 국가가 패배하고, 사회주의가 가장 약하고 가장 덜 훈련된 국가가 승리하는 것을 보장할 뿐이었다." 게다가 총파업은 수많은 사회주의 정당들(특히 SPD)이 박해를 받거나, '조직된 노동자에 대한' 비상사태법(emergency legislation)이 발동될 구실을 제공함으로써, 각 정당들을 위험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키어 하디-바이앙 수정안은 정부에 긍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국제적 데탕트에 건설적 기여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것들이 여론에 개진된 주요 반대 근거였다. 하지만 독일 정당 지도부의 부정적 태도(그들은 프랑스와 독일의 급진주의가 순전히 수사일 뿐이라는 관점을 숨기지 않았다)의 뒷면에 숨겨진 동기가 있었다. 독일의 의견에는 반전 총파업이 무계획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이라는 관점이 있었다. 그것은 카우츠키에게는 '영웅적 어리석음'(heroic folly)이었고, 바우어에게는 유토피아적인 것이었다. 1913~14년 대중파업이 SPD 내부 전투적 좌파의 장기말이 되었고 동안 사회민주주의자의 이론적 거부와 정치적 의심이 증대했다. 1913년 예나 대회의 논쟁에서 승리한 후 SPD 지도부가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을 지지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결국 수정안의 정식화는 설욕의 기회를 노리던 좌파가 SPD 내부의 논쟁을 재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었다.
이러한 개요는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해석의 요점이다. 이는 사실과 일치하는가? 공개적으로 표현된 관점을 살펴보면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특히 1914년의 문서들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 이데올로기, 외교, 전략, 전술적 고려가 모두 혼합된 파업이라는 쟁점 뒤에 진정 무엇이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
1913년 말, 데탕트의 분위기에서 SPD 지도부는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이 더 이상 쟁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의 지지자들이 비엔나 대회의 의제에서 제안을 철회하거나 그 비중을 줄이길 기대했다. 하제는 1913년 12월 11일, SPD 지도부와 노동조합 일반위원회(general committee)의 회합에서 "우리는 대중파업이 세부적으로 다뤄지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당의 결정을 따를 의무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 회합에서 하제는 노동조합 지도부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특히 레기엔(Legien)은 "노동조합은 대중파업 문제가 노동조합의 이해에 따라 정리되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당 집행부는 독일에서의 총파업 지지 입장에 대해 굳건히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06년 정당과 노동조합 양자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은 양측 지도부가 공동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만하임 대회의 합의 때문에 노동조합 지도부의 반대는 무시될 수 없었다. 더욱이 총파업은 노동조합이 당 지도부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1913년 말 당 집행위는 자신이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1913년 12월 런던에서 열린 ISB 정기회의의 독일 대표단이었던 에베르트(Ebert, Friedrich)18)와 하제는 비엔나 대회의 의제에 관해 논의할 때 파업 문제를 재빨리 제외했다. 그들은 무관심을 표명함으로써 제안이 의제에 상정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거나, 또는 다른 항목('제국주의와 중재재판소')으로 대체되길 희망했다.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 반대에 여러 정당의 지지를 얻으면서 그들은 일정하게 성공했다. 특히 오스트리아 정당과 아들러는 결정적인 동맹자였다. 나아가 그들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정당들, 네덜란드 정당, 프랑스 게드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볼셰비키를 포함하여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역시 다양한 이유로 총파업에 의심을 품었다. 세르비아와 같은 소규모 정당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았고, 경험이 풍부하고 의회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지닌 정당들에 결정을 맡겼다. 키어 하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총파업에 대한 결정이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고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의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19)
그러나 독일 대표단의 계산은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고, 그들의 책략은 실패했다. 바이앙은 이전 어느 때 보다 단호하게 자신의 제안이 비엔나에서 토론되고 채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반대 측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근본적 반대 입장은 없고, 표현상의 유보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1914년 바이앙은 그의 제안을 다시 제출했고, 독일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노력했다. 먼저 그는 SFIO 서기장 뒤브레이(Louis Dubreuilh)에게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바이앙은 여기에 실망하여 1914년 5월 20일, ISB를 직접 접촉해서 서기장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설득해달라고 촉구했다. 바이앙의 제안으로 ISB 집행위는 난처해졌다. 집행위는 바이앙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집행위는 몇 가지 어색한 행동을 취했고, 바이앙은 위스망스의 충실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5월 말 바이앙은 ISB 정기회보에 실린 ISB 정기회의에 대한 보고서에서 그의 제안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위스망스는 이를 정정한 후 '우연한 사고'라고 말했다. 위스망스는 바이앙이 야기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바이앙의 편지를 아무런 언급도 없이 SPD 집행부에게 보냈다. SPD 집행부는 가시 같은 이 제안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14년 6월 초,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프랑스와 영국 사회주의자 일부는 바이앙과 키어 하디의 제안에 호의를 표하고 있으며, 세계의 눈은 독일을 응시하고 있다. 인터내셔널의 결정은 독일에 달려있다." 따라서 독일 사민주의자들은 매우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다. 특히 1914년 프랑스-독일의 데탕트는 사회주의 선전의 초점이었으며, 프랑스와 독일 정당 간의 불일치는 적대자들에 의해 쉽게 활용되었다. 집행부가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대책은 ① 제안을 절대 반대하는 것, ② 바이앙이 대회에 제안을 제출하는 것을 포기하게 하는 것, ③ 타협책을 찾는 것이었다. 첫 번째는 너무 위험했고, 두 번째는 불가능했다. 독일 집행부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활용하여, 더 많은 양보를 얻으려고 했다. 키어 하디는 1912년이 지난 후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12년 8월, 그는 영국 노동조합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반전 파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정치행동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 그것은 정치행동이 전쟁을 방지하기에 충분히 효과적이지 못할 때 활용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1914년 5월 말 바이앙에게 보낸 하제의 응답은 이런 요소를 고려했다. 하제는 바이앙의 제안 중 특정 세부사항, 즉 운송 노동자의 파업을 통한 공급 마비와 전쟁에 대한 응답으로서 총파업을 거부했다. 하지만 평화를 위한 투쟁의 무기로서 총파업이란 원칙에 대해서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하제는 바젤 결의안의 현상 유지, 즉 "인터내셔널에 가입한 각 정당이 전쟁에 저항하는 수단을 선택할 자유"를 원했다. 하지만 하제는 타협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편지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왜 우리가 비엔나에서 분열의 인상을 야기해야 합니까? 우리는 모두가 전쟁의 위협이 증대되는 것에 대해 우리의 노력을 배가해야 하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정치상황과 프롤레타리아의 힘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나는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기 위해 당신과 합의에 도달하길 바랍니다." 바이앙은 ISB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랫동안 비타협적 태도를 취했지만 이러한 타협이 그의 바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나아가 1914년 봄부터 하제는 온건 노선을 표명했다. 카우츠키가 바이앙의 제안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유지했지만, 집행부의 다수는 의장보다 더 타협적인 태도를 취했다. 1914년 4월 28일, 당 집행부와 제국의회 사민주의자 그룹간의 합동회합에서 몰켄부르는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과 타협할 의사를 밝혔다. 그것은 SPD가 인터내셔널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회합은 예방정책의 강화를 강조했다. 예방정책이 효과적이지 않다면, SPD는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총파업이나 [제국의회 의원직] 사퇴(desertion)와 같은 수단은 더 이상 단호히 거부되지 않았다. 이것은 원칙의 선언이었다. 그러나 강제적이고, 통일되고, 정확하게 규정된 전술 합의는 거부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것인가? 몰켄부르의 착상은 대회에 새로운 제안을 제출하자는 것이었다. 즉 ISB에 전쟁위원회(war council)를 창설하고, 그 임무를 '어떤 결정이 필요하다면 각 국의 상황에 따라 행동을 위한 근거를 ISB에 제공하는 것'으로 설정하자는 것이었다.(이러한 사실은 경찰 보고서에만 발견할 수 있고, 다른 어떤 것에서도 볼 수 없다.)
하제의 편지에 프랑스는 어떻게 대응했나? 이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모든 정황을 볼 때, 바이앙과 조레스는 하제의 편지를 타협적 제안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최근에 역사가들은 1914년 파리에서 열린 임시대회에서 "온건파, 조정파였던 조레스가 왜 갑자기 좌파와 결합했는지, 급진파들이 봉기의 가능성을 폐기했지만 왜 조레스가 총파업의 가장 단호한 옹호자가 되었는지" 의아해한다. 이러한 의문은 앞서의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파리 대회에서 조레스의 태도와 1914년 7월 26~31일의 결정적인 시기 동안 조레스의 행동 사이에는 화해 불가능한 모순이 있었는가? 먼저 조레스는 갑자기 총파업의 옹호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의 행동은 평화를 위한 투쟁이 더욱 효과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정치적 관념의 지도적 원칙에 따라 결정되었다. 1914년 6월과 7월, 조레스는 그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방어한 노선, 즉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의회 개입부터 총파업과 봉기의 선동에 이르기까지'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의무라는 노선을 채택했다. 동시에 그는 온건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비엔나 대회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충돌을 막고자 했다. 그는 슈투트가르트 대회를 준비하면서 경험을 얻었고, 인터내셔널을 잘 아는 영리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조레스는 프랑스가 최선을 다해야만 타협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랑스 정당은 1914년 총선에서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상당한 입지를 획득했다. 1914년 6월 게드주의자가 우세한 노르연합(Federation du Nord)은 슈투트가르트 결의안과 충돌된다는 근거로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을 거부했다. 반면 1914년 7월 5일 세느연합(Federation de la Seine) 회의에서 다수파는 바이앙-키어 하디 수정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토마의 보고서를 채택했다. 조레스는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침묵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전국대회 직전에 수정안에 대한 지지가 늘어난다면, SFIO가 단독으로 제안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터내셔널 내부의 반대파가 새로운 타개책을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레스는 SFIO 대회에서 총파업을 옹호했지만, 바이앙-키어 하디 제안을 방어하는 대신에, "대회는 모든 참가국의 조직된 노동자의 총파업, 대중에 대한 반전 선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모든 수단들, 국제분쟁 중재재판소를 위한 대정부 압력 등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는 새로운 문서를 제출했다. 긴 토론 후에 조레스의 제안은 1690 대 1174로 승인을 얻었다.
제안된 총파업은 국제적으로 통합된 행동을 전제했고, 독일의 협력 없이는 실행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레스는 반대파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 어떤 새로운 주장을 발전시켰나? 조레스는 국제중재재판소와 짝을 이룬 총파업이 독일의 관점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다. 조레스의 제안은 외교적 수단의 효율성과 "노동자계급의 창조적 정신이 창조하는 행동수단"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또한 조레스는 총파업이 전쟁선포 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요구된다는 하제의 가장 중요한 반대를 받아들인다. 이런 관점은 조레스의 제안을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행위로 받아들인 게드주의자에 대한 응답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20) 마지막으로 그는 인터내셔널이 저항할 수 없는 주장을 펼쳤다. 인터내셔널이 반전을 위한 무기로서 총파업이란 원칙을 인정한다면, 프랑스 노동자운동이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단결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14년 7월 프랑스노동조합총연맹(CGT)과의 화해는 전술적 책략이 아니라 조레스가 항상 염두에 둔 생각을 실현한 것이었다. 암스테르담 대회 이후 조레스가 사회주의자의 단결을 옹호한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단결이라는 주장은 특히 효과적이었다.
조레스는 독일 사회주의자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는가? 파리 대회 이후 조레스는 이 주제에 관해 낙관적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1914년 7월 19일, 그는 "SPD가 기본적으로 모험과 혁명적 슬로건을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력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점점 더 의식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거의 15년 전에 거부된 대중파업이라는 관념이 이제는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은 단지 사람들을 안심시키려는 것이었는가, 아니면 그가 열강의 진정한 입장을 오해했다는 것을 보여주는가? 사실 조레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수정안을 거부하는 상태에서, 수정안이 채택되어 국제운동이 위험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레스는 죽기 며칠 전 비엔나에서 그 수정안에 대해 압력을 가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불행히도 조레스는 비엔나 대회에 제출하기로 했던 보고서를 작성하지 못했다. SFIO 서기장 뒤브레이는 ISB 집행위에 양해를 구하며, 조레스가 과중한 업무 때문에 보고서를 작성할 시간을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도 조레스는 당의 다수파가 그의 편에 가담하기를 기다렸다. 또한 문서를 작성하지 않기를 원했는데, 상황에 따라, 그리고 반대의견이 있었던 탓에 그의 주장을 조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14년 7월 25일 뒤브레이가 위스망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레스의 기본적인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조레스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생각들은 프랑스 전국대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요약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잘 알려졌기 때문에 그는 보고서를 따로 제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엔나 대회에서는 타협안이 나오거나 또는 조레스의 제안이 그대로 통과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결의안이 강제력을 지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해결책은 '피루스의 승리'(Pyrrhic victory)였을 것이고, 아마도 노동조합 지도자와의 분열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프랑스는 프랑스의 제안을 매번 거부했던 독일을 신뢰하지 못했다. 독일 노동조합 지도부가 비엔나에서 승인된 어떤 결의한도 거부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단순한 억측이 아니다. 레기엔은 "노동조합 없이는 총파업의 낙관적 옹호자들이 그들의 계획을 실행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의 주장을 프랑스의 사례를 통해 정당화했다. 즉 "프랑스에서 총파업을 옹호하는 최면술에 걸린 발언들은 노동조합을 약화시켰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는 프랑스 노동조합이 자신의 분석을 수용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 예를 들어 인쇄공 노동조합은 총파업 전술을 반대하고, 독일이 지금까지 우리가 추구한 노동조합의 사고와 정치활동을 선호한다." 레기엔이 인용한 사례는 정확하지만, 그 맥락을 벗어난 것이었다. CGT는 분명히 아무런 환상을 품지 않았고, 국제적인 규모가 아니라면 반전 총파업을 옹호하지 않았다. 오직 개량주의적 소수파만이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CGT는 방어적 전쟁에서 이러한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언급을 피했고, 국제적 수준에서의 고립을 피했다.
최후의 수단으로서 프랑스와 독일이 취한 입장은 자신들의 선의에 따라 결의안의 형태와 적용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타협안의 의미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낙관적인 바이앙은 희망을 느꼈지만, 토론은 어떤 책임으로도 나아가지 않는 순전히 이론적인 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구체적 수단의 문제가 즉각 중요성을 띠게 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미주>

1) [역주] (1850-1947) 독일사민당(SDP) 소속 제국의회 의원. 1918년부터 급진적인 입장을 취하여 1919년 1월 베를린 봉기 때 지도자로 활동했다. 본문으로

2) [역주] Neue Zeit(노이에 차이트). 독일사민당 기관지 본문으로

3) [역주] 언론인으로 활약하다가 1903년 사회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의 참전을 지지했고, 1917년 화평을 주장, 내정개혁을 역설했다. 1918년 바덴공(公) (Max von Baden) 내각에 무임소장관으로 입각했고, 11월 9일 공화제를 선포하여 사회민주당만의 내각을 선언하여 급진화에 제동을 걸었다. 이듬해인 1919년 공화국 최초의 총리가 되었으나, 베르사유조약에 반대하여 사임했다. 1920 1925년 카셀 시장을 지내고, 1933년 나치스 정권이 성립하자 덴마크로 망명, 코펜하겐에서 죽었다. 본문으로

4) 그는 SPD에서 '신-라쌀레주의'에 주목했고, 신라쌀레주의 자본주의, 독일의 식민지 정책, 무장화정책(원칙적으로는 방어적이지만, 긴급 상황에서는 공격적인)에 노동자계급이 동정심을 느끼게 했다. 그는 "독일 제국이 공격적 또는 방어적 전쟁에 연루되면 독일 노동자는 독일의 패배를 원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본문으로

5) 1914년 SFIO의 선거강령은 "(프랑스가 '3년 징병법'을 막지 못했듯이) SPD가 군비 증대를 막지 못했지만 매우 높은 재산세를 도입함으로써 특권층이 주요한 부담을 지도록 제국 정부를 압박했다. 따라서 부르주아는 처음으로 어리석은 쇼비니즘의 직접적인 결과를 느끼고 있다"고 썼다. 본문으로

6) 국가들 간의 모든 불화와 분쟁에 대한 의무적 국제중재는 평화주의 운동의 기본 원칙 중 하나였다. 본문으로

7) 발칸 국가의 사회주의자들(Rakovsky, Blagoev)을 빼면 이러한 투쟁을 지지한 사회주의자들은 조레스와 바이앙 쪽 인사들이었다. 본문으로

8) 이런 관점은 널리 유포되었고, 프랑스의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조차 이런 관점을 받아 들였다. 1914년 9월 그르노블에서 열릴 프랑스노총(CGT) 대회 참여에 관해, <민중의 소리>(La Voix du Peuple)는 무엇이 의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노동조합의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영국주간'이 71표, '파업과 사회적 행동'이 57표, '외국노동자와 여성노동자의 문제'가 42표, '반군국주의'가 가장 적은 35표를 받았다. 본문으로

9) [역주] 1913년 11월 프랑스 알자스주의 소도시 차베른(Zabern;프랑스어로는 사베르느 Saverne)에서 발생한 독일군과 이 지역주민과의 충돌사건. 이 지역에 군국주의적 성격의 젊은 장교 폰 포르스트너가 부임해 온 뒤 신병교육시 알자스주민을 모욕한 일이 지방신문에 폭로되자 주민들이 포르스트너가 외출할 때마다 그를 둘러싸고 욕설을 퍼부었던 것이 발단이 되어, 군부가 11월 28일 27명의 청년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 독일제국의회는 수상이 이 사건에 대하여 사과표명을 하지 않자, 12월 4일 제국의회 창설 이후 처음으로 수상불신임안을 가결했다. 본문으로

10) [역주] 19세기 중엽, 네델란드의 요한 루돌프 토르베케 (Johan Rudolf Thorbecke, 1798-1872)는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자유주의자 지도자였다. 그는 1849 ~1853, 1862~ 1866에 걸쳐 수상을 두 번 역임했다. 그가 만든 새 헌법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인 사고의 산물이었으므로, 그를 비판한 사람들은 이 헌법과 또한 다른 법에 대해 반대투쟁을 벌였다. 새 헌법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정치운동을 시작했고 결국 정당을 설립했다. 새 헌법에 비판적인 사람들 중 피터 트로일스트라( Pieter Jelles Troelstra, 1860-1930)는 사회주의자들이 세운 '피고용인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 of Employees)의 주요한 지도자였다. 본문으로

11) 각 항목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했고, 보고서를 제출할 3-4명의 전문가를 임명했다. 대회가 열리기 전에 보고서를 발표하기로 했고, 보고서는 위원회의 토론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하기로 했다. 인터내셔널의 대표단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다양한 연사가 선택되었다. 의제의 항목에 대한 간결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 연사들의 의무였다. 본문으로

12) 1913년 이후 러시아 정치수들의 죽음은 유럽 여론의 중대 관심사였다. 1913년 독일 사회주의와 생디칼리스트의 발의로 러시아 정치수에 대한 호소가 이뤄졌다. 본문으로

13) [역주] James Ramsay MacDonald 1866 1937 영국의 정치가. 스코틀랜드 출생.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학을 했으며, 1894년 독립노동당에 가입했고, 1900년 창설된 노동대표위원회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1906년 하원의원, 11년 노동당 당수가 되었으나, 1차 세계대전 때 반전론을 주장하고 사임했다. 전쟁 말기에는 노동당의 재건과 강화에 협력했고, 22년 하원의원에 재선되어 또다시 당수가 되었다. 24년 29년 2회에 걸쳐 노동당 단독내각을 구성했는데, 제 3 당인 자유당의 각외협조(閣外協調)를 전제조건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국내문제는 외교에 종속한다고 믿어 외교에 주력했다. 1차 내각에서는 소련과의 국교회복을 강행했고, 제 2 차 내각에서는 재차 소련과의 국교 회복, 기타 외교상의 업적을 남겼다. 31년 여름 세계공황 아래 격증하는 실업보험비의 삭감 가부를 둘러싸고 각내(閣內)가 분열되자 사직했다. 그러나 노동당에서 제명되면서도 수반으로서 보수당 및 자유당의 거국연립내각을 만들고, 오카와회의 런던군축회의 등에서 여전히 외교에 주력했다. 35년 3월 재군비에 관한 백서를 발표한 후 추밀원의장을 지냈다. 본문으로

14) '제국주의'라는 표현은 1880년대 식민지 제국을 강화, 확대하려는 의도를 품은 영국 정치평론가들과 식민지 관리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본문으로

15) 앙겔(P. Angel)은 카우츠키의 시각의 기원을 모로코 위기의 귀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문으로

16) 1909년, 판네쿠크는 자본주의의 제국주의로의 도약을 분석했다. 이는 새로운 전략의 채택을 필요로 하게 했다. 사회주의 운동은 의회 단계를 넘어서 대중행동 단계로 나아가야만 했다. 본문으로

17) 1911년 9월 23일 ISB 회의에서 바이앙의 제안은 총파업에 대해 새로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다양한 조류의 [입장의] 결정체가 드러났다. 베벨은 아들러와 (덴마크의 대표단인) 스타우닝(Stauning)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계획이 드러날 수 있고 사회주의자들(특히 SPD)이 정부의 보복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현했다. 게드주의자 루쎄(Rousset)는 정당이 노동조합에 대해 어떤 영향력도 없다는 다른 쟁점을 강조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총파업의 시작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다"). 로자는 총파업에 대한 주도적 관념에 동의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전쟁의 발발 직후 철도파업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바이앙의 제안 자체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전쟁이 선언되면, 사적부문을 제외하면 철도가 총파업에 돌입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철도파업은 독일에 적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본문으로

18) 하이델베르크에서 출생했다. 1889년 사회민주당(SPD)에 입당, 실무가로 인정을 받아 1905년 이래 중앙당에서 주요 책무를 수행하였다. 1912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1913년 당수 베벨의 사후에는 하제와 함께 당 의장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당 우익을 이끌며 정부와 군부를 지지하고 전쟁 중에는 독일의 국민적 단결과 상호이해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여 혁명파의 계급투쟁 정책과 싸우는 한편, 군부의 병합주의적 요구와도 싸웠다. 이 정책에 의하여 자유주의 정당과의 유대를 공고히 하여 1918년 11월 혁명에서는 좌우익과 대항하면서 민주적 의회제도의 수립에 노력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19년 2월 국민의회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독일 국내외에서의 적대세력과 싸우기 위하여 제정(帝政) 군부의 재건에 의한 군비강화에 노력한 결과 우익 제정파의 힘의 증대를 가져왔으며, 1920년 3월 카프 봉기(Kapp Putsch)를 초래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전승국의 과대한 배상요구에 대항하려 하였으나, 영국 프랑스의 압박에 굴복하여 베르사유조약을 승인하였다. 이후 조약이행을 충실히 해가면서 그 부담의 경감을 도모하려고 특히 영국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1925년 임기만료 직전 사망하였다. 본문으로

19) 키어 하디-바이앙의 제안에 관한 의견을 묻는 수백장의 질문서가 노동조합에 발송되었지만, 단지 8개의 답장을 받았다. 본문으로

20) 파리대회에서 게드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총파업을 한다면, 어떻게 그리고 어떤 수단으로 ISB는 모든 곳에서 동시적으로 운동을 조직할 수 있나? 노동자와 사회주의자 조직의 불균등성은 계속 존재할 것이며, 가장 잘 조직된 나라의 패배로 귀결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고의 배신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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