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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3.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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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2ㆍ13 공동합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이소형 | 조직교육부장

2007년 2월 13일 베이징으로부터, 5차 6자회담 3단계회의에서 "9.19공동선언 초기이행조치"라는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합의문의 내용에 따르면, 60일 이내에 북한이 핵시설을 폐쇄ㆍ봉인하는 것에 대한 반대급부로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와 대 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하기 위한 과정을 제시하고, 5개 국가는 중유 5만톤 상당의 에너지를 긴급지원 하게 된다. 또한 참가국들은 ①한반도 비핵화 ②북미관계 ③북일 관계 ④경제 및 에너지 협력 ⑤동북아 평화와 안보체제 등의 5개 항에 대한 실무그룹(working group)을 30일 이내에 설치하여 각 항을 구체화시킬 프로그램을 논의하게 된다. 이상의 초기이행조치가 완성이 된 이후,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와 흑연감속로 및 재처리시설을 포함한 모든 현존하는 핵시설의 불능화"가 진행된다면, "최초 중유 5만 톤 선적 분을 포함 중유 100만 톤 상당의 경제, 에너지, 인도적 지원"을 실행하고, 6개국 장관급회담을 개최하여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방안을 논의하게 된다.
한편 6자회담 타결직후, 미국은 지난 연초 베를린 회담에서 약속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계좌를 '선별적으로 해제'하는 작업을 실행하기 위해 북한 측과 실무적 접촉을 하기도 했고, 초기이행조치 기간 동안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은 그 구체적인 실행이 유보될 수 있다고 한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4~5월 경 방북 일정이 예정되었고, 남북 장관급 회담개최와 개성공단 추가 분양, 남측의 쌀, 에너지, 비료지원 방안과 남북정상회담 성사여부까지 낙관적 전망이 우후죽순처럼 제기되고 있다.

북-미관계의 봄날?

이번 6자회담의 타결로 부시행정부의 대북전략의 전술적 기조가 변화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 내 정치지형 변화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라크 상황의 악화와 이란공습을 앞두고 미국이 군사적 역량을 중동지역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며, 민주당의 총선승리와 부시행정부의 지지율 하락과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이 맞물려 대북 외교안보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했다는 분석이다. 또한 일부 운동진영에서는 2.13 합의가 "핵보유선언과 핵실험, 미사일 발사실험을 감행한 북한의 선군정치에 미국이 굴복했다는 증거이며, 정전협정폐기와 평화협정체결이 임박하여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때."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내놓고 있다.
향후 미국의 군사패권이 중동지역으로 집중될 것이라는 전망이나, 이번 기회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평화체제의 발판이 마련될 것이라는 전망은 모두 6자회담이라는 외교안보회의의 형태가 한반도 전쟁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중대한 해법'이라는 시각을 일정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왜 6자회담 자체의 진척이나 타결의 국면들과는 별개로 북한이 핵보유선언과 미사일 발사실험, 그리고 핵실험으로 이어지는 강도를 높여가는 군사적 행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해본다. 시야를 좀 더 확장해 돌아보면, 1990년대 초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미, 혹은 다자간 협상의 타결과 고착상태는 지속적으로 반복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이 처한 외교적, 경제적 고립은 단 한 차례도 제대로 해결된 적이 없으며, 생존을 위한 '벼랑 끝 전술'로서 북한의 군사적 행동과 이에 대한 미국의 '응징'이 얽혀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지속적으로 고조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애초부터 문제는 '협상'이 아니다

현재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북-미간의 협상이 타결되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처음부터 북한을 고립, 봉쇄하고자 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이고, 여기에서 북-미간의 협상은 갈등을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었다.
1990년대 초, 1차 연료를 공급해주던 소련이 몰락하자 북한은 에너지를 충당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소를 개발했다. 이에 대해 미국과 남한정부는 지속적으로 북한과의 핵무기 경쟁을 통해 갈등을 유발해왔다. 당시 '교차승인'의 흐름에서 북한은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정상화를 목표로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과적으로 한국과 미국, 일본은 중국과 구소련을 동원하여 북한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켰다. 북한은 내부의 경제적 위기 상황을 해결할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계속해서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에 의존하게 되었다. 1991년 「남북화해를 위한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북한은 경제적, 외교적 고립을 극복하고자 노력하였으나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 대한 실질적인 공격을 예비하는 팀스피릿 훈련을 재개하였고, UN을 통한 대북제재와 영변 선제공격계획이 가시화되었다. 미국이 주변국들을 활용해 북한의 경제적, 외교적 고립을 강화하고, 북한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군사행동을 선택하도록 유도했던 미국의 전략은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를 만들어 냈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는, 미국이 의도적으로 유발한 '북핵 위기'로 인해 촉발된 북한의 군사 행동을 '경수로 건설과 에너지 지원'이라는 카드를 통해 무마하려했던 일시적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1998년 '페리 보고서'를 통해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새로운 북-미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삼아 북한을 압박할 새로운 빌미를 개발해낸 미국의 행동으로 증명된다. 미국이 의도한 제네바 합의의 파기 이후, 미국이 애초부터 북-미 양자회담을 통한 문제의 해결을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2000년 북한 조명록 차수가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한 뒤, 클린턴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될 것을 약속했던 "북미 공동 커뮤니케"가 무산된 전례도 있다. 이 때 북한은 10억 달러 상당의 식량 원조를 받고 장거리 미사일을 규제하는 미사일 기술통제체제(MTCR)에 가입하여 미국이 '추가적으로' 제시했던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다시 일본을 향해 배치된 100여기의 노동미사일을 문제 삼아 방북을 취소하였고, 합의는 파기되었다.
이후 부시행정부는 북-미 양자 간의 직접적인 협상을 거부하고,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봉쇄정책을 강화하고, 체제붕괴를 노리는 이른바 '북 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하였다. 2002년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따라 핵 선제공격의 대상 7개 국가에 북한이 포함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는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북한은 주권 인정과 불가침 보장, 경제적 지원의 대가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과 미사일 수출 포기를 약속하는 등, 지속적으로 북-미관계 정상화를 요청하였다(2002년 11월). 그러나 미국은 켈리 국무부차관보의 방북 때에도 농축 우라늄 개발(HEU)문제만을 언급하면서 북한의 제안을 또다시 무시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제네바 합의 무효를 선언하고,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요원을 추방, 핵발전소 봉인을 해제하고 연료봉을 재처리했다고 발표, 이른바 '2차 북핵 위기'가 현재에 까지 이르게 된다.

또 하나의 '추가조치'로서의 6자 회담

북-미 제네바 협상 타결을 계기로 북한은 북-미관계를 어떻게든 진전시켜보기 위해 '합의'를 넘어서는 미국의 요구들까지 모두 수용하여왔다. 그러나 미국은 전후맥락도 없이 "북-미 양자 회담으로는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적반하장 격 주장을 하며 북미 양자 간 대화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2002년까지 있었던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미국이 스스로 만들어 낸 '북핵 위기'를 북-미간의 협상으로도 전혀 해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취해왔으며, 나아가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항의하는 북한의 '군사적 행위들'에 대해서 더욱 강도 높게 응징을 가하는 것으로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켜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03년에 들어 이른바 '6자 회담'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이 회담의 목표는 간단한데, 첫째 '북핵문제'를 이제 '국제 문제화'하여 북한을 더욱 고립시키는 것, 둘째 협상 대상으로서 미국이 해야 할 책임을 모호하게 분산시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참가국들에게 북한의 경제 지원 비용을 떠넘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미국이 이행하지 않은 조치들을 분담해서 실행하는 것과, 그것의 전제조건으로서 또 한 번 북한의 '항복 선언'을 받아내는 것 이 외에 6개국의 논의과제는 애초부터 있을 수 없었다.
2003년 8월 1차 6자회담에서, 북한의 대담한 제안(북핵포기와 불가침 조약 체결 동시타결)은 단번에 묵살되었는데 이 회담 직후, 미국은 PSI 참가국을 모아 WMD 확산 차단을 위한 육해공 합동 훈련계획을 발표하여 대북공격의 의지를 재차 보여주었다(2003.9.3). 또한 IAEA 총회는 북한의 핵 폐기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고(2003.9.20 47차 총회), 미국의 제네바 합의 이행사항이었던 2003년까지의 경수로 공사는 KEDO집행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2003.11.21).
이처럼 6자회담은 시작부터 미국의 모순적인 행동을 무마할 수 있는 다자적 압력 틀에 불과했다. 2004, 2005년을 거치면서 미국의 이러한 행동은 더욱 노골화 되었는데, 6자회담을 통해 6개국이 공동으로 합의하여 회담이 진척되는 기미가 보일 때 마다, 미국은 독자적으로 또 다른 압박 전술을 활용해 북한을 공격하여 6자회담의 합의사항을 원점으로 되돌렸다. 2004년 3차 회담 개최를 6개국의 합의를 통해 도출(2004. 4. 29) 하자마자, 부시는 대북 직접대화 거부의사를 표명(2004. 4.30)하였고, 3차 회담에서 "미국, 북핵 5단계 해법 제시. 북한, 미 보상 수용시 핵동결 폐지."라는 내용으로 의장 성명이 발표되자, "북한 인권법"이 미 상원에서 통과되어 부시대통령은 이에 서명하였다. 2005년 1월, 콘돌리자 라이스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으로 북한은 6자회담 참가 무기한 중단과 핵보유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지 않을 시에 유엔 안보리 회부 검토를 발표(2005. 4. 19)하고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보유를 선전하였다. 북한은 즉각 유엔 안보리 회부를 북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하였고, 그 해 5월 북한 외무성이 '8천 여 개 폐연료봉 인출 작업 완료"를 발표(2005.5.11)하면서 갈등은 극대화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2005년 4차 6자회담에서 합의된 9.19 공동선언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는 전혀 상관없이 만들어졌던 종이 한 장에 불과했다. 왜 6자회담이 3차 이후, 긴 교착상태 속에서 한동안 진행되지 못하였는지, 또한 왜 6자회담은 미국이 다른 수단들을 통해 북한을 압박하는 행동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의문을 낳으며 급작스럽게 발표되었던 것이다. 현재에도 9.19 공동선언은 "6자회담이 낳은 평화체제의 기초"로 둔갑하여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지만, 우리는 9.19 선언 이후 미국이 또다시 북한에 대해 마약, 무기 거래를 빌미로 본격적인 금융제재를 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체제붕괴를 유도하기 위해 경제의 목줄을 조인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계좌동결 문제는 2006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과 핵실험이라는 비가역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결국 현재의 한반도 위기를 조성해 온 북-미간의 공방은 6자회담 '외부'에 존재해왔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6자회담이 지난 5년 동안 미국과 북한의 행동을 조금도 제어할 수 없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초기이행조치'의 불투명성과 한반도 핵 위기의 비가역적 상황

현재 합의된 2.13 초기이행조치들이 제대로 이행될 수 있을지의 여부가 매우 불투명하다는 사실은 언론을 통해서도 많이 알려져 있다. 2.13 합의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영변 이외에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핵시설에 대한 문제, 핵 프로그램 중 고농축 우라늄(HEU)을 미국이 추가적으로 제기하는 문제, 핵시설 사찰의 주체(IAEA인가, 6자회담 내의 새로운 실무 그룹인가)와 방법의 문제 등이 있다. 또한 '핵시설의 불능화'라는 표현이 매우 모호하여, 이 부분에 따른 해석의 차이가 '언어의 지뢰밭'을 만들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북-미관계 정상화의 지표가 되는 '테러지원국 해제와 대 적성국 교역법 적용을 종료하기 위한 과정'은 절차적으로 미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만 해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더군다나 6자회담이라는 틀이 북-미 갈등의 해결에 있어 어떠한 구속력도 발휘하지 못해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이행조치 실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갈등과 변수들은 사실상 통제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이행조치들이 수많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는 논평 수준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이행조치가 60일 이내에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게 될 변수는 무수히 많고, 이번 합의가 1994년 제네바 합의처럼 휴지조각이 되어버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이후 한반도에서 북-미간의 갈등문제가 표출되는 방식은 어떠할 것이며, 만약 극단적인 '핵의 대립'으로 치달을 경우 어떠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겠는가. 이미 6자회담은 북-미간의 양자 간 협의가 미국에 의해 더 이상 유지 될 수 없었을 때 고안된, '극단적 갈등을 무마하는 미봉책'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지난 5년 동안 6자 회담을 통한 갈등의 봉합이 북한의 핵보유선언과 핵실험이라는 비가역적인 한반도의 군사적 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번 공동합의로 일정 기간 북-미관계가 진척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겠지만 이번 공동합의가 또 다시 미국의 모순적, 돌발적 행동으로 파기될 경우, 한반도의 위기는 6자회담을 통한 '갈등의 봉합과 관리'조차 불가능한 극단적 상황으로 진입하게 될 수 있다. "6자회담이 한반도 평화체제의 초석"이라며 장밋빛 전망이 터져 나오고 있는 지금, 이 합의가 본질적으로 미국의 전략-동아시아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의 위기를 '단순히 관리'하는 전략-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에 이르는 길

57년이라는 길고 긴 분단의 역사로 평화체제 구축은 한반도 민중의 염원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수 십 년의 세월 동안 동아시아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패권을 통해 압도적인 힘으로 북한을 압박해오면서, 결국 한반도의 역사를 평화체제 구축과는 정반대의 길인 일초즉발 전쟁의 위기로 몰고 왔다. 5차 6자회담 3단계회의가 채 일주일도 안 되어 타결에 이르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자, 일부 사회운동진영에서는 "동북아 균형자(평화유지군)로서 주한미군의 문제는 정전협정 폐기와 평화협정 체결과는 별도로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즉 미국이 동북아의 패권을 포기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에 의한 북한의 체제보장이 이행되기만 한다면, 주한미군의 철수는 정전협정폐기와 평화 협정 체결의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6자회담 공동합의문이 체결된 2007년 2월 13일, 평택 대추리 주민들은 정부와의 이주협상을 마치고 끝내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한반도 평화체제가 시작되었다고 선전하는 날, 대추리의 평화적 생존권은 무참히 짓밟히며 주한미군의 동북아 신속 기동군으로의 재편과 평택 전쟁기지 건설이 차질없이 추진될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모순된 결론은 결국 현재 거론되는 '한반도의 평화체제'가 한반도 민중들이 염원하는 반미, 반전, 평화와는 전혀 다른 길임을 알려주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비극적인 역사와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극단적인 핵 위기로 비화될 위기에 처해있더라도, 민중이 원하는 평화체제의 원칙은 오히려 더욱 굳건히 지켜져야 한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6자회담 타결이라는 잠정적이며 위태로운 미봉책에 부화뇌동하는 것으로는 결코 얻어질 수 없다. 또한 미국의 이란확전계획을 근거로 한반도에 대해 미국이 일정한 양보를 감행했다고 주장하는 안이한 논평의 자세로는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한반도에 드리워진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의 위기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남한에서부터, 민중으로부터 전쟁의 유발요인을 제거해 나가는 반미, 반전, 반핵 평화운동이 가장 올바르며 현실적인 대안이다. 6자회담의 2.13 공동합의는 미봉책에 불과할 뿐,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와 주한미군의 즉각적인 완전 철수라는 한반도 평화체제의 기본적인 원칙을 다시금 강인하게 사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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