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찾기가 드러내는 잊혀진 기억들
잊혀진 역사들
남한에서 해방정국,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기는 '잊혀진 역사'이다. 물론 누구나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고, 또 1945년 8월 15일부터 '6.25사변'까지 공식적인 견해에 따라 기습적 남침으로 인식되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만,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해방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인공의 활동, 좌익들의 투쟁들은 너무나 대중적인 것이었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 하며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과 갈등도 잊혀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산가족'의 문제가 지난 남북정상회담 이후 '상봉'이라는 방향으로 잡히면서, 그 잊혀진 것들이 되돌아 올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남한 정부가 가장 비정치적인 분야라고 생각했던 이산가족 상봉의 문제는, 가장 정치적인 쟁점들을 잠재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산가족이란 누구인가'라는 문제들이다.
남한의 공식적인 인식에 있어서 이산가족이란 전쟁통에 '공산도당'을 피해 월남한 사람들과 미처 월남하지 못한 가족들, 그리고 남한에서 '북괴 침략군'에 의해서 '끌려간 의용군'과 남은 가족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주류적 입장에 따라서 당연히 이산가족은 전쟁의 비극이자 동시에 '북의 무력도발'에 의한 것으로, 그 원죄는 북측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인식은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휴머니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체제대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강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이산가족은 누구인가? - 북쪽에서 찾는 사람들
쟁점은 북측이 제시한 이산가족 명단의 부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북측은 전체 200명의 명단을 교환하기로 한 협의에 따라서 명단을 보내왔는데,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이들은 그 동안에 남측의 공식적인 입장과 그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으로 ('입대'한 것이 아니라) 끌려갔거나' '납북당한' 혹은 '실종된' 사람들이었다. 남에 남겨진 가족들은 가혹한 연좌제 속에서 그런 식으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번에 만나게 되는 가족들도 각 신문-방송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대로, 이들은 당연히 북의 정부에 의해 선택된, 혹은 선발된 사람들이며, 그렇다면 그들의 출신과 활동이 그 기준인 것은 명확하다. 이들 상당수는 북에서 전문직이나 학계,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그 동안 북한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이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북에 가게된 동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전쟁 이전에는 노동자, 학생, 교원 등이었으며, 상당수는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사람들이거나 해방 이후 좌익활동을 벌이다 산으로 들어간 이른바 '산사람'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과 무관하게라도 월북한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은 남한에서는 상당히 불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남한에서 좌익은 항상 한줌 무리들에 불과하며 대중의 무지와 감정에 호소하여 폭동을 선동하는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상당수가 자발적인 월북이라든가, 상당수가 지식인이라든가 하는 사실은 남한에서의 통념에 정면배치되는 것이다.
1945~46년 조선 민중의 자주적인 의사로 구성된 건준과 인민위원회이 미군정에 의해 파괴된 사실, 1946년 전평의 총파업투쟁으로부터 10월 대구 항쟁, 1948년 남한의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제주 4.3항쟁, 여순봉기…. 그리고 그 이후 남로당이 취한 무장투쟁 노선으로의 (강요된) 전화와 빨치산 투쟁의 과정에서 수 만 명의 좌익 활동가가 투옥-살해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으로 들어간 후 전쟁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남과 북, 어느 한 쪽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그들은 당연히 '북에서의 혁명을 완수하고 이를 전한반도로 확장하려고 한 쪽으로', 북으로 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태백산맥과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끝까지 벌이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해방공간에서의 수많은 대중투쟁의 기억은 강제적으로, 집단적으로 망각되었지만 그 역사의 흔적은 이런 식으로도 남아 있다.
이산가족은 누구인가? - 남쪽에서 찾는 사람들
한편, 남에서 북에 상봉을 요청한 사람들의 사연은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대부분은 전쟁과정에서 월남하던 도중 헤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이산가족'이라 할 수 있다. '전쟁=공산주의'를 피해오던 중 헤어진 사람들이라는 인식이다. 한편으로는 월북한 가족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상봉 신청을 하기 힘든 사연이 작용했을 것이다.
북에 남겨진 가족의 상당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전쟁 과정에서 북이 입은 피해 정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 전 인구비율이 남쪽이 2배 가까웠을 정도였음에도, 사망한 민간인은 오히려 북이 200만, 남이 100만으로 북의 인구감소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를 합당한 용어로 말하자면 북한 인민들이 '학살'당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 학살은 미국의 장기 폭격과 미군-국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북 민간인 중 5명에 1명 꼴로 살해당했다) 남쪽에서 192명, 북쪽 138명이라는 가족찾기 결과의 차이는 또 다른 비극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단지 인구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북의 대부분의 산업 시설은 파괴되고, (예를 들어 발전(發電) 능력은 전쟁 전의 26%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대규모의 인구 감소, 산업의 파괴가 이루어졌다. 이 속에서도 북은 1970년대 중후반까지 남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는 또한 남쪽의 인식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는 항상 굶주린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열악한 환경, 남쪽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은 외국의 원조(사회주의권의 전체 원조는 남한에 대한 미국의 원조에 1/5에 불과하였다), 미군에 대응하기 위한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북이 이룬 경제적 성과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수사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1980-90년대 들어 발생한 북의 경제위기 속에서 과거의 왜곡까지 정당화되고 만다.
이산가족 상봉이 말하는 것들
이산가족 찾기가 진행되면서 더 다양한 쟁점들이 부각되고 있다. 북에 있는 가족과의 호적 정리의 문제나 재산상속 문제들이 벌써 하나둘씩 터져나오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성급하게 북에 있는 토지의 재산권 문제까지 언급하기도 한다.(이 역시 북한의 혁명과정에서 토지개혁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는 쟁점이다. '봉건적인 소유권'과 사회주의적 토지 개혁이라는 쟁점에 대한 판단은 아마도 '정책적으로'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쟁점들이 저널리즘적으로 부각되는 동안 여전히 역사의 진실은 잠재된 쟁점으로 남아 있다.
전쟁이 단지 비극의 역사였다는 인식이 아니라 (이런 인식은 전쟁=공산주의라는 도식으로 조작되어 대중의 공포를 야기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그 원인과 갈등의 구조를 인식한다면 이산가족 찾기라는 민족적 이벤트 속에서 진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남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는데 집착한 이유는, 남북대화에서 정치-군사적인 의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려진 대로이다. 남측이 핵-미사일 문제를 언급하더라도 북이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나, 섣불리 평화협정 체결 등의 문제를 협상할 수 없는 상황(과 국제법적 자격)이 있었고, 남한 정부에게 민간 교류, 경제협력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대중적인 성과로 보이게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분야로 생각되던 이산가족 상봉의 문제는 실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격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산가족의 문제가 비정치적인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 속에서 끊임없이 '가족이 만난다'는 단순한 사실만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헤어짐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대중매체나 대중들이나 이 껄끄러운 주제를 다시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문제는 아직 드러나지 못하고 있고, 단지 남북정상회담의 대중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용될 뿐이다. 역사에 대한 집단적 망각과 정치적 호들갑 속에 이산가족의 비극의 역사는 또 한번 왜곡되는 것이다.
북의 어머니, 혹은 딸을 위해서 누런 금딱지를 준비했다는 남쪽의 가족들, 족보를 준비해서 '혈통'을 보여주겠다는 남쪽의 가족들…. 그 순수한 마음 뒤에 깔려있는 무의식적 배금(金!)주의와 '봉건적 가부장주의'를 북의 가족들에게 선물하게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중의 어떤 모습들은, 이런 집단적인 역사 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소극(笑劇)중 하나일 것이다.
남한에서 해방정국,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변기는 '잊혀진 역사'이다. 물론 누구나 역사를 학교에서 배우고, 또 1945년 8월 15일부터 '6.25사변'까지 공식적인 견해에 따라 기습적 남침으로 인식되는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서도 알고 있지만,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몇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해방공간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인공의 활동, 좌익들의 투쟁들은 너무나 대중적인 것이었지만, 대중들은 그것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 하며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과 갈등도 잊혀진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산가족'의 문제가 지난 남북정상회담 이후 '상봉'이라는 방향으로 잡히면서, 그 잊혀진 것들이 되돌아 올 수 있는 시간이 도래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남한 정부가 가장 비정치적인 분야라고 생각했던 이산가족 상봉의 문제는, 가장 정치적인 쟁점들을 잠재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산가족이란 누구인가'라는 문제들이다.
남한의 공식적인 인식에 있어서 이산가족이란 전쟁통에 '공산도당'을 피해 월남한 사람들과 미처 월남하지 못한 가족들, 그리고 남한에서 '북괴 침략군'에 의해서 '끌려간 의용군'과 남은 가족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주류적 입장에 따라서 당연히 이산가족은 전쟁의 비극이자 동시에 '북의 무력도발'에 의한 것으로, 그 원죄는 북측에 있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인식은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하는 휴머니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체제대립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강하게 기능하고 있었다.
이산가족은 누구인가? - 북쪽에서 찾는 사람들
쟁점은 북측이 제시한 이산가족 명단의 부분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북측은 전체 200명의 명단을 교환하기로 한 협의에 따라서 명단을 보내왔는데,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문제인 것이다. 이들은 그 동안에 남측의 공식적인 입장과 그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의용군으로 ('입대'한 것이 아니라) 끌려갔거나' '납북당한' 혹은 '실종된' 사람들이었다. 남에 남겨진 가족들은 가혹한 연좌제 속에서 그런 식으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번에 만나게 되는 가족들도 각 신문-방송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답변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 정확하게 지적하는 대로, 이들은 당연히 북의 정부에 의해 선택된, 혹은 선발된 사람들이며, 그렇다면 그들의 출신과 활동이 그 기준인 것은 명확하다. 이들 상당수는 북에서 전문직이나 학계,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그 동안 북한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이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북에 가게된 동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전쟁 이전에는 노동자, 학생, 교원 등이었으며, 상당수는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인민군에 입대한 사람들이거나 해방 이후 좌익활동을 벌이다 산으로 들어간 이른바 '산사람'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의용군과 무관하게라도 월북한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은 남한에서는 상당히 불편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남한에서 좌익은 항상 한줌 무리들에 불과하며 대중의 무지와 감정에 호소하여 폭동을 선동하는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상당수가 자발적인 월북이라든가, 상당수가 지식인이라든가 하는 사실은 남한에서의 통념에 정면배치되는 것이다.
1945~46년 조선 민중의 자주적인 의사로 구성된 건준과 인민위원회이 미군정에 의해 파괴된 사실, 1946년 전평의 총파업투쟁으로부터 10월 대구 항쟁, 1948년 남한의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제주 4.3항쟁, 여순봉기…. 그리고 그 이후 남로당이 취한 무장투쟁 노선으로의 (강요된) 전화와 빨치산 투쟁의 과정에서 수 만 명의 좌익 활동가가 투옥-살해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산으로 들어간 후 전쟁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남과 북, 어느 한 쪽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았을 때, 그들은 당연히 '북에서의 혁명을 완수하고 이를 전한반도로 확장하려고 한 쪽으로', 북으로 갔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도 없이 태백산맥과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끝까지 벌이다가 유명을 달리했다. 해방공간에서의 수많은 대중투쟁의 기억은 강제적으로, 집단적으로 망각되었지만 그 역사의 흔적은 이런 식으로도 남아 있다.
이산가족은 누구인가? - 남쪽에서 찾는 사람들
한편, 남에서 북에 상봉을 요청한 사람들의 사연은 사뭇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대부분은 전쟁과정에서 월남하던 도중 헤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이산가족'이라 할 수 있다. '전쟁=공산주의'를 피해오던 중 헤어진 사람들이라는 인식이다. 한편으로는 월북한 가족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경우에는, 공개적으로 상봉 신청을 하기 힘든 사연이 작용했을 것이다.
북에 남겨진 가족의 상당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전쟁 과정에서 북이 입은 피해 정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 전 인구비율이 남쪽이 2배 가까웠을 정도였음에도, 사망한 민간인은 오히려 북이 200만, 남이 100만으로 북의 인구감소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를 합당한 용어로 말하자면 북한 인민들이 '학살'당했다고 해야할 것이다.
이 학살은 미국의 장기 폭격과 미군-국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북 민간인 중 5명에 1명 꼴로 살해당했다) 남쪽에서 192명, 북쪽 138명이라는 가족찾기 결과의 차이는 또 다른 비극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는 단지 인구만의 문제는 아니어서 북의 대부분의 산업 시설은 파괴되고, (예를 들어 발전(發電) 능력은 전쟁 전의 26%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대규모의 인구 감소, 산업의 파괴가 이루어졌다. 이 속에서도 북은 1970년대 중후반까지 남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이는 또한 남쪽의 인식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는 항상 굶주린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한 열악한 환경, 남쪽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은 외국의 원조(사회주의권의 전체 원조는 남한에 대한 미국의 원조에 1/5에 불과하였다), 미군에 대응하기 위한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북이 이룬 경제적 성과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수사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1980-90년대 들어 발생한 북의 경제위기 속에서 과거의 왜곡까지 정당화되고 만다.
이산가족 상봉이 말하는 것들
이산가족 찾기가 진행되면서 더 다양한 쟁점들이 부각되고 있다. 북에 있는 가족과의 호적 정리의 문제나 재산상속 문제들이 벌써 하나둘씩 터져나오고 있다. 보수언론들은 성급하게 북에 있는 토지의 재산권 문제까지 언급하기도 한다.(이 역시 북한의 혁명과정에서 토지개혁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는 쟁점이다. '봉건적인 소유권'과 사회주의적 토지 개혁이라는 쟁점에 대한 판단은 아마도 '정책적으로'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쟁점들이 저널리즘적으로 부각되는 동안 여전히 역사의 진실은 잠재된 쟁점으로 남아 있다.
전쟁이 단지 비극의 역사였다는 인식이 아니라 (이런 인식은 전쟁=공산주의라는 도식으로 조작되어 대중의 공포를 야기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그 원인과 갈등의 구조를 인식한다면 이산가족 찾기라는 민족적 이벤트 속에서 진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남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하는데 집착한 이유는, 남북대화에서 정치-군사적인 의제를 제기하고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은 알려진 대로이다. 남측이 핵-미사일 문제를 언급하더라도 북이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나, 섣불리 평화협정 체결 등의 문제를 협상할 수 없는 상황(과 국제법적 자격)이 있었고, 남한 정부에게 민간 교류, 경제협력 등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대중적인 성과로 보이게 하는 노력을 기울이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비정치적인' 분야로 생각되던 이산가족 상봉의 문제는 실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격한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산가족의 문제가 비정치적인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 속에서 끊임없이 '가족이 만난다'는 단순한 사실만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헤어짐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대중매체나 대중들이나 이 껄끄러운 주제를 다시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문제는 아직 드러나지 못하고 있고, 단지 남북정상회담의 대중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이용될 뿐이다. 역사에 대한 집단적 망각과 정치적 호들갑 속에 이산가족의 비극의 역사는 또 한번 왜곡되는 것이다.
북의 어머니, 혹은 딸을 위해서 누런 금딱지를 준비했다는 남쪽의 가족들, 족보를 준비해서 '혈통'을 보여주겠다는 남쪽의 가족들…. 그 순수한 마음 뒤에 깔려있는 무의식적 배금(金!)주의와 '봉건적 가부장주의'를 북의 가족들에게 선물하게되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 중의 어떤 모습들은, 이런 집단적인 역사 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소극(笑劇)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