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반제국주의를 생각한다
혼란스러워하는 운동진영의 모습
최근 들어 '반미자주화' 투쟁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SOFA개정투쟁이 광범한 지지를 얻고 있는가 하면, 매향리 미군사격장반대투쟁은 공중파에 1시간짜리 르포로 보도되기도 했다. 또한 녹색연합이 폭로한 용산 미군기지 포름알데히드 방류사건은 미군 당국의 사과 거부로 국민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동안 한총련 학생들의 철없는 구호로만 여겨져왔던 '주한미군철수' 요구는 이제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과연 지금 한반도에는 '반제국주의 직접투쟁'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의 이면에는 이와는 다소 모순된 듯이 보이는 또 다른 변화도 감지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 당국이 천명하고 있는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전향적' 접근이 그것이다. 북한 당국은 주한미군 문제를 남북회담의 기본전제로 내세워왔던 그 동안의 태도를 백팔십도 바꿔 이제는 단순히 주한미군 문제 거론을 유보하는 정도를 넘어서, 주한미군의 장기간 주둔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언질을 흘리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 통일운동 일각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진보진영의 통일 관련 토론회석상에서는 일부 통일운동 활동가들이 북한의 입장 변화에 따라, 남한 통일운동 진영도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신축적인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주한미군철수 요구가 모처럼 대중적인 슬로건으로 등장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까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던 통일운동 내부에서 소위 '유연한' 입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이런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작금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그 동안 우리 민중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제 위치를 찾지 못했던 반제국주의투쟁이 그 뿌리부터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한다. 사실 민중운동 내 비NL 진영이 주한미군철수 요구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 내세웠던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해당 국면에서 지극히 몰정세적이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반미투쟁은 그러한 비판의 사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의 새로운 가능성
사실 미군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이미 제도 언론에서도 관심 있게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남미의 미국 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섬에서도 미군사격장에 대한 반대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몇십 년의 전통을 갖고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반대운동이 최근 일련의 미군 범죄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크게 불붙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미군 문제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반미투쟁의 물결은 전세계적인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미에서는 냉전 붕괴 이후 미국 자본의 경제 침투와 미국 정부의 대(對)남미 직접지배전략이 노골화되면서 반미제국주의투쟁이 새로운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반미 민족해방투쟁을 핵심 강령으로 삼았던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주의는 더 이상 단순한 저항의 아이콘만이 아니라 하나의 노선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상황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유일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미국은 경제, 정치, 군사를 막론하고 말 그대로 총체적으로 지구 전체를 옥죄고 있다. 우리가 흔히 자본의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의 이면에서는, 사실 전 세계의 미국화라는 또 다른 진실이 자리잡고 있다. 앵글로색슨 자본주의를 보편화시키고 있는 세계은행과 IMF의 뒤에는 미국의 금융자본과 초국적자본이 웅크리고 있고 이들의 집행기관이 바로 미국 정부다. 미국 재무부 장관이 한국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을 검열했던 1997년의 상황은 이제 월스트리트 자본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보들을 미국으로 소환해 '검증' 절차를 거치는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걸프전이 그래도 UN이라는 껍데기를 걸쳤다면, 코소보 폭격을 계기로 미국은 이제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워하고 있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마저도 저항의 대열에 불러들이고 있는 반미투쟁의 전세계적인 확산은 결국 이러한 도도한 흐름에 대한 필연적인 반작용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 반미투쟁의 전통은 주로 NL 진영에 의해 견지돼 왔다. 그런데, NL 경향은 주로 '민족자주화'와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주의 담론에 기반해 반미투쟁을 지속해 왔다. 반면 NL 경향의 이러한 측면을 비판한 남한 민중운동의 여타 흐름들은 상대적으로 반미제국주의의 문제를 소홀히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세계적으로 미제국주의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NL 전통은 반미투쟁의 자원으로서 새롭게 활력을 되찾고 있다. 이에 반해 IMF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다소 추상적이며 합의가 덜된 구호에 열중하던 운동 세력들은 반미문제에 관한 한, 여전히 소극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낡은 논의 지형을 벗어나 2000년의 세계 상황을 직시하는 가운데, 반미제국주의 문제는 진보진영 전체의 적극적인 과제로 부각되어야만 한다.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이 과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NL-비NL 분열 구도의 일정한 극복 가능성까지 내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미·반제투쟁의 주체가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타 진영으로부터 NL 진영에 가해졌던 비판의 쟁점들은 여전히 문제거리다. 하나의 '국가 공동체'(물론 통일을 통해서만 완성될 미완의 공동체)로 전제되는 '민족' 관념이 반제국주의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어쩌면, 반미투쟁의 호기에 등장한 통일운동 내부의 일정한 혼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NL 경향은 반제국주의투쟁의 근거를 '민족'에서 찾고 이 '민족'을 통일민족국가의 건설로 완성되는 무엇으로 상정한다. 반미'자주화'라는 말 자체가 민족국가에 대한 관념을 깊숙이 깔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미제국주의 과제란 것도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과제에 통합되어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성취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한편으로 반미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동시에 이러한 NL 경향의 전통적인 관념에 기반한 반미투쟁에 일정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즉, 한편에서는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의 존재가 냉전 해체 이후 줄곧,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더더욱 그 정당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 점에서 최근 오키나와와 매향리 투쟁의 부각은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북한 당국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하여 오히려 주한 미군의 장기주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베를린 합의 이후 열린 잠정적인 평화 국면을 북한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여유 시간으로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위해서 미군 문제 등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는 흡수통일 가능성의 차단을 위한 북한 국가의 지속과 발전이라는 점에서 현실정치상의 가능한 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 국가의 선택이 동아시아 전체 차원에서 과연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만을 지니는 것인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미군 문제는 이미 북한과 미국의 대치라는 수준을 넘어섰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아래서 동아시아 주둔 미군은 미국의 최대 가상적국인 중국에 대한 무력 견제 장치로 존재한다. 미군의 존재가 일본 군사력에 대한 일정한 견제력이 된다는 일부 궤변은 그야말로 궤변일 따름이다. 일본의 군사력은 미국의 대(對)중국 전략파트너로서 육성되어 왔고, 지금 판은 정확히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군철수투쟁은 중·러 대 미·일의 신제국주의 분열 구도를 낳고 있는 미제국주의의 전략 사슬의 한 고리를 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전세계 반미제국주의 투쟁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를 이룬다.
어쩌면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중국, 베트남, 북한 등의)이 반미제국주의의 핵심 주체를 이루던 시기는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국가의 선택과 동아시아에서의 반제국주의 과제가 꼭 일치를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도 한 획을 그은 것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NL 노선의 한 논리적 귀결은,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북한 정권이 취했다고 생각되는 정책 노선의 추종을 위해 동아시아 차원의 반미제국주의 과제를 소홀히 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 정권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동아시아 각국의 민중운동에 기반한 반미제국주의 역량의 성장은 북한 정권이 주한미군 문제를 양보하면서까지 확보하려 한 평화국면, 그것을 위해서도 북한 정권의 현재의 정책 노선보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진보세력은 현재 이 국면을 주도하는 것이 각국 정부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확고히 할 것은 각국 정부가 아니라 반제국주의 평화·민중운동 역량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한다. 역사의 불가역지점을 넘어선 듯이 보이는 남북정상회담 국면조차도 단기적으로는 부시 공화당 정권과 한나라당 정권의 출범 가능성에 의해, 장기적으로는 중·러-미·일의 신냉전 구도에 의해 충분히 교란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대중운동과 반제국주의 과제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SOFA개정투쟁과 매향리투쟁은 확실히 반미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매향리의 경우, 어떤 추상적인 이념으로부터가 아니라 피해 대중들 자신의 투쟁의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앞으로 주한미군반대투쟁은 계속해서 이러한 대중적 이성에 기반해 발전해야만 한다. 요구사항이 SOFA 개정이어야 하느냐 철폐여야 하느냐, 혹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냐 즉각 철수냐 하는 것은 순전히 논리적인 쟁점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중간적인 요구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투쟁의 대중적인 발전을 이루느냐가 관건이다.
바로 이러한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는 반제국주의 과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함과 동시에 반제국주의 투쟁의 근본적인 혁신을 시도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진보세력들이 반미투쟁 구호가 몰정세적이고 기계적이라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대중운동과 반제국주의 과제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 미제국주의의 경제지배전략과 정치·군사지배전략을 총체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제국주의 비판의 새로운 전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매각반대투쟁 등의 노동자 투쟁을 반제국주의 인식과 분명히 연결시켜야 한다. 이 점에서 IMF 위기 당시에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등이 현실적 전술로 제시했지만 노동운동 주류에 의해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됐던 모라토리움 요구 같은 것을 재평가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다른 과제는 반미투쟁의 근거인 '민족'의 내포와 외연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족=민족국가'라는 제한을 넘어서는 게 관건이다. 여기에서 오키나와 기지반대투쟁과의 연대 가능성은 단순한 전술적 중요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존재 의의가 의문에 부쳐지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는 동아시아 차원의 미군반대 국제연대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들이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주된 주체는 아니게 된 현재의 상황에서, 반미제국주의의 새로운 주체가 형성될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더구나 이는 연대 '투쟁'뿐만 아니라 연대의 '사상'의 발전 가능성까지 암시해 준다.
지금 반미투쟁은 민중운동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각자의 과거 노선과는 상관없이 이에 주목해야 하며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난 세기의 민족해방투쟁과 그것의 민족주의적 편향과는 다른 근거를 찾는 가운데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문제제기의 핵심이다. 20세기 민족해방투쟁의 와중에서도 그 단초를 보여준 바 있었던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한 핵심으로 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정신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결코 빈약하지만은 않은 실마리임에 분명하다.
최근 들어 '반미자주화' 투쟁이 다시 힘을 얻고 있다. SOFA개정투쟁이 광범한 지지를 얻고 있는가 하면, 매향리 미군사격장반대투쟁은 공중파에 1시간짜리 르포로 보도되기도 했다. 또한 녹색연합이 폭로한 용산 미군기지 포름알데히드 방류사건은 미군 당국의 사과 거부로 국민적인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동안 한총련 학생들의 철없는 구호로만 여겨져왔던 '주한미군철수' 요구는 이제 전혀 그렇게 다가오지 않는다. 과연 지금 한반도에는 '반제국주의 직접투쟁'의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의 이면에는 이와는 다소 모순된 듯이 보이는 또 다른 변화도 감지된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 당국이 천명하고 있는 주한미군 문제에 대한 '전향적' 접근이 그것이다. 북한 당국은 주한미군 문제를 남북회담의 기본전제로 내세워왔던 그 동안의 태도를 백팔십도 바꿔 이제는 단순히 주한미군 문제 거론을 유보하는 정도를 넘어서, 주한미군의 장기간 주둔까지도 수용할 수 있다는 언질을 흘리고 있다. 이에 따라 남한 통일운동 일각에서도 미묘한 변화가 감지된다. 최근 진보진영의 통일 관련 토론회석상에서는 일부 통일운동 활동가들이 북한의 입장 변화에 따라, 남한 통일운동 진영도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신축적인 입장을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주한미군철수 요구가 모처럼 대중적인 슬로건으로 등장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제까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보여왔던 통일운동 내부에서 소위 '유연한' 입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이런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작금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그 동안 우리 민중운동의 큰 흐름 속에서 제 위치를 찾지 못했던 반제국주의투쟁이 그 뿌리부터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필요성을 웅변한다. 사실 민중운동 내 비NL 진영이 주한미군철수 요구 등에 대해 비판하면서 내세웠던 가장 강력한 논거는 그것이 해당 국면에서 지극히 몰정세적이라는 데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반미투쟁은 그러한 비판의 사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다.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의 새로운 가능성
사실 미군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것은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이미 제도 언론에서도 관심 있게 보도하고 있는 것처럼 남미의 미국 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섬에서도 미군사격장에 대한 반대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일본의 오키나와에서는 이미 몇십 년의 전통을 갖고 벌어지고 있는 미군기지반대운동이 최근 일련의 미군 범죄를 계기로 다시 한 번 크게 불붙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단순히 미군 문제에만 한정하지 않는다면, 반미투쟁의 물결은 전세계적인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남미에서는 냉전 붕괴 이후 미국 자본의 경제 침투와 미국 정부의 대(對)남미 직접지배전략이 노골화되면서 반미제국주의투쟁이 새로운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반미 민족해방투쟁을 핵심 강령으로 삼았던 체 게바라와 카스트로주의는 더 이상 단순한 저항의 아이콘만이 아니라 하나의 노선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상황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 유일 강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미국은 경제, 정치, 군사를 막론하고 말 그대로 총체적으로 지구 전체를 옥죄고 있다. 우리가 흔히 자본의 세계화라고 부르는 현상의 이면에서는, 사실 전 세계의 미국화라는 또 다른 진실이 자리잡고 있다. 앵글로색슨 자본주의를 보편화시키고 있는 세계은행과 IMF의 뒤에는 미국의 금융자본과 초국적자본이 웅크리고 있고 이들의 집행기관이 바로 미국 정부다. 미국 재무부 장관이 한국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을 검열했던 1997년의 상황은 이제 월스트리트 자본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보들을 미국으로 소환해 '검증' 절차를 거치는 것으로까지 발전했다. 걸프전이 그래도 UN이라는 껍데기를 걸쳤다면, 코소보 폭격을 계기로 미국은 이제 그마저도 거추장스러워하고 있다.
프랑스와 같은 선진자본주의 국가마저도 저항의 대열에 불러들이고 있는 반미투쟁의 전세계적인 확산은 결국 이러한 도도한 흐름에 대한 필연적인 반작용인 셈이다.
우리의 경우, 반미투쟁의 전통은 주로 NL 진영에 의해 견지돼 왔다. 그런데, NL 경향은 주로 '민족자주화'와 '조국통일'이라는 민족주의 담론에 기반해 반미투쟁을 지속해 왔다. 반면 NL 경향의 이러한 측면을 비판한 남한 민중운동의 여타 흐름들은 상대적으로 반미제국주의의 문제를 소홀히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세계적으로 미제국주의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면서 NL 전통은 반미투쟁의 자원으로서 새롭게 활력을 되찾고 있다. 이에 반해 IMF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다소 추상적이며 합의가 덜된 구호에 열중하던 운동 세력들은 반미문제에 관한 한, 여전히 소극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낡은 논의 지형을 벗어나 2000년의 세계 상황을 직시하는 가운데, 반미제국주의 문제는 진보진영 전체의 적극적인 과제로 부각되어야만 한다. 앞질러 이야기하자면, 이 과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NL-비NL 분열 구도의 일정한 극복 가능성까지 내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미·반제투쟁의 주체가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여타 진영으로부터 NL 진영에 가해졌던 비판의 쟁점들은 여전히 문제거리다. 하나의 '국가 공동체'(물론 통일을 통해서만 완성될 미완의 공동체)로 전제되는 '민족' 관념이 반제국주의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어쩌면, 반미투쟁의 호기에 등장한 통일운동 내부의 일정한 혼란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NL 경향은 반제국주의투쟁의 근거를 '민족'에서 찾고 이 '민족'을 통일민족국가의 건설로 완성되는 무엇으로 상정한다. 반미'자주화'라는 말 자체가 민족국가에 대한 관념을 깊숙이 깔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미제국주의 과제란 것도 통일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과제에 통합되어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성취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 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한편으로 반미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면서 동시에 이러한 NL 경향의 전통적인 관념에 기반한 반미투쟁에 일정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즉, 한편에서는 동북아시아 주둔 미군의 존재가 냉전 해체 이후 줄곧, 그리고 남북정상회담 이후 더더욱 그 정당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 점에서 최근 오키나와와 매향리 투쟁의 부각은 동아시아 정세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미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북한 당국은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하여 오히려 주한 미군의 장기주둔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베를린 합의 이후 열린 잠정적인 평화 국면을 북한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여유 시간으로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이며, 이를 위해서 미군 문제 등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양보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는 흡수통일 가능성의 차단을 위한 북한 국가의 지속과 발전이라는 점에서 현실정치상의 가능한 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 국가의 선택이 동아시아 전체 차원에서 과연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만을 지니는 것인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미군 문제는 이미 북한과 미국의 대치라는 수준을 넘어섰다. 미국의 세계지배전략 아래서 동아시아 주둔 미군은 미국의 최대 가상적국인 중국에 대한 무력 견제 장치로 존재한다. 미군의 존재가 일본 군사력에 대한 일정한 견제력이 된다는 일부 궤변은 그야말로 궤변일 따름이다. 일본의 군사력은 미국의 대(對)중국 전략파트너로서 육성되어 왔고, 지금 판은 정확히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미군철수투쟁은 중·러 대 미·일의 신제국주의 분열 구도를 낳고 있는 미제국주의의 전략 사슬의 한 고리를 끊는다는 것이며, 따라서 전세계 반미제국주의 투쟁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를 이룬다.
어쩌면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중국, 베트남, 북한 등의)이 반미제국주의의 핵심 주체를 이루던 시기는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국가의 선택과 동아시아에서의 반제국주의 과제가 꼭 일치를 보인다고 말할 수 있는 시대도 한 획을 그은 것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NL 노선의 한 논리적 귀결은, 통일민족국가 건설을 위해 북한 정권이 취했다고 생각되는 정책 노선의 추종을 위해 동아시아 차원의 반미제국주의 과제를 소홀히 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 정권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동아시아 각국의 민중운동에 기반한 반미제국주의 역량의 성장은 북한 정권이 주한미군 문제를 양보하면서까지 확보하려 한 평화국면, 그것을 위해서도 북한 정권의 현재의 정책 노선보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진보세력은 현재 이 국면을 주도하는 것이 각국 정부 당사자들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동아시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확고히 할 것은 각국 정부가 아니라 반제국주의 평화·민중운동 역량이라는 점을 확신해야 한다. 역사의 불가역지점을 넘어선 듯이 보이는 남북정상회담 국면조차도 단기적으로는 부시 공화당 정권과 한나라당 정권의 출범 가능성에 의해, 장기적으로는 중·러-미·일의 신냉전 구도에 의해 충분히 교란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대중운동과 반제국주의 과제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야
SOFA개정투쟁과 매향리투쟁은 확실히 반미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매향리의 경우, 어떤 추상적인 이념으로부터가 아니라 피해 대중들 자신의 투쟁의지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앞으로 주한미군반대투쟁은 계속해서 이러한 대중적 이성에 기반해 발전해야만 한다. 요구사항이 SOFA 개정이어야 하느냐 철폐여야 하느냐, 혹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냐 즉각 철수냐 하는 것은 순전히 논리적인 쟁점일 뿐이다. 어떻게 하면 중간적인 요구의 적절한 활용을 통해 투쟁의 대중적인 발전을 이루느냐가 관건이다.
바로 이러한 발전을 위해서도 우리는 반제국주의 과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야 함과 동시에 반제국주의 투쟁의 근본적인 혁신을 시도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진보세력들이 반미투쟁 구호가 몰정세적이고 기계적이라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대중운동과 반제국주의 과제를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선 미제국주의의 경제지배전략과 정치·군사지배전략을 총체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제국주의 비판의 새로운 전개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외매각반대투쟁 등의 노동자 투쟁을 반제국주의 인식과 분명히 연결시켜야 한다. 이 점에서 IMF 위기 당시에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 등이 현실적 전술로 제시했지만 노동운동 주류에 의해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됐던 모라토리움 요구 같은 것을 재평가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또 다른 과제는 반미투쟁의 근거인 '민족'의 내포와 외연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민족=민족국가'라는 제한을 넘어서는 게 관건이다. 여기에서 오키나와 기지반대투쟁과의 연대 가능성은 단순한 전술적 중요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존재 의의가 의문에 부쳐지는 가운데 이뤄지고 있는 동아시아 차원의 미군반대 국제연대는,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정권들이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주된 주체는 아니게 된 현재의 상황에서, 반미제국주의의 새로운 주체가 형성될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더구나 이는 연대 '투쟁'뿐만 아니라 연대의 '사상'의 발전 가능성까지 암시해 준다.
지금 반미투쟁은 민중운동의 중요한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진보진영은 각자의 과거 노선과는 상관없이 이에 주목해야 하며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지난 세기의 민족해방투쟁과 그것의 민족주의적 편향과는 다른 근거를 찾는 가운데에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 필자의 문제제기의 핵심이다. 20세기 민족해방투쟁의 와중에서도 그 단초를 보여준 바 있었던 동아시아 국제연대를 한 핵심으로 하는 진보적 민주주의 정신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결코 빈약하지만은 않은 실마리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