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운동으로서, 실업노동자 운동을 향하여
들어가며: 갈림길에 선 실업운동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대량 실업사태가 우리 사회를 휩쓴 지도 2년 반이 지났다. 정권은 이제 IMF를 '졸업'했다고 선언하고, 이에 발맞추어 부유층의 과소비도 IMF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언론에서 떠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전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용 사정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결과 다수의 노동자들이 고용과 실업을 넘나드는 준실업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대다수 장기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수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헤메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요컨대, 지금의 실업은 과거의 '대량실업'처럼 눈에 쉽게 띠지는 않지만, 과거보다 훨씬 제도화되고 구조화된 형태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실업자들의 생존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들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했던 실업운동은 변화해가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정권의 관리와 분열의 전략이 한 몫 하고 있다. 즉, 정권은 실업자들의 일부를 선별하고 또 실업운동의 일부를 선별하여, 후자로 하여금 전자를 관리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따라, 실업 운동은 전체 실업자 혹은 실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 전체를 스스로의 활동 근거로 삼고 투쟁을 발전시키고 있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스스로의 활동 기반과 수준을 축소시키도록 강제받게 된다. 그 결과 실업운동은 실업자들 전체의 권리 의식을 향상시키고, 이들과 함께 투쟁하기보다는 자그마한 물질적 혜택을 소수에게 제공하는 데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실업 운동의 활동이 이러한 양상을 띤 것만은 아니다. 실업운동은 '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해왔고, 실업자들의 최소한 생계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스스로의 운동의 대중적 기초를 미약하나마 형성해왔다. 하지만, '가시적인 대량실업'이 훨씬 은밀하고 다양한 형태로 구조화되면서, 사회적 관심도 줄어들고 정권의 양보도 축소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실업운동은 정권의 전달 통로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사회운동의 주체로, 민중연대 전선의 주체로 스스로를 정립할 것인가? 혹은 관성 속에서 스스로의 대중적 기반과 활동의 동력을 조금씩 소진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보다 적극적인 사회운동으로 성장해나갈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실업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실업운동이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관점의 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실업운동의 이념과 목표는 무엇인가?
어떤 운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이념과 목표를 올바르게 설정해야만 한다. 운동의 이념과 목표는 단순한 공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활동 속에서 언제나 재확인되고 풍부화되면서 운동의 다양한 양상들을 통합하고, 나아가 운동의 전진 방향을 지시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좌표가 정립되지 않을 경우 아무리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운동도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좌표가 불투명한 운동은 수많은 운동의 일꾼들을 방황하게 만들고, 더욱 더 많은 대중들을 미혹에 빠지게 한다. 나아가 운동의 이념과 목표가 올바로 서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지 않을 때, 활동가들은 분열되거나 스스로가 왜 운동을 하는가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 관성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운동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바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실업 운동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논의하지 못해왔다. 많은 경우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실용적 대책과 처방을 마련하고 집행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현실이다. 이는 실업 운동이 형성된 사회적 상황이나 조건에서 비롯된다. 즉, 한국에서 실업 운동은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실업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고 살길을 찾아주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업운동은 '생계보장'이라는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활동들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이제 변화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실업운동의 관점과 활동방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실업 운동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왜 실업 노동자들은 투쟁해야만 하는가?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실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실업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바뀌어가면서 실업자가 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 실업이 줄어들 거라고 떠들고는 있지만, 생산적 부문보다는 주식시장 활성화를 통한 경기부양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한낮 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업운동의 이념은 '실업'의 원인을 제거하고, 모두가 떳떳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스스로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펼쳐질 수 있다. 예컨대, 지역 차원의 다양한 공동체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공공근로의 확대를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활동은 어디까지나 실업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 공동체, 협동조합, 그리고 공공근로 등이 실업노동자를 빈곤으로부터 탈피시킨 사례는 전국 어디에도, 아니 전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업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방식-협동조합, 공공근로 등-에 대한 어떤 '장미빛 환상'도 조직화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하루 아침에 실업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공문구나 구차한 현실을 미화하는 것보다 끊임없는 투쟁없이는 실업이 사라지지도 실업노동자의 권리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실업운동의 주체와 관점을 바로 세우자
실업운동은 누구의 운동인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실업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실 '실업자'라는 명칭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업자가 기실은 '일을 하고 싶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받지 못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실업자는 바로 '실업 노동자'이다. 그리고 실업운동은 바로 이러한 실업 노동자의 자주적 요구, 즉 떳떳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그것을 통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실업 노동대중의 자주적 요구와 그것에 입각한 자주적인 실천은 실업운동의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자주적 운동이란, 운동의 주체들이 스스로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대해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의 요구들을 정식화하며, 나아가 그러한 요구에 입각한 투쟁들을 조직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실업노동자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스로의 권리를 대중적으로 제기하고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서구의 사례를 보거나 1999년 실업 운동이 조직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정부로부터 부분적인 양보를 얻기 위해서도 언제나 자주적 권리에 입각한 투쟁이 선행했다는 점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실업노동대중운동의 특수성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즉,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노동운동과는 다른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실업운동은 그 스스로의 자주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물질적 자원과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실업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그들 스스로 실업이 개인의 무능이나 실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고 권리의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게끔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각만으로는 조직을 운영할 수 없다. 따라서 실업 노동자가 최소한 집단적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
실업 노동자들의 경우 보다 직접적으로 생계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관계로, 이에 대한 직접적 대안이 비록 부분적이나마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주적이고 집단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토론하고 해결해나가는 점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실업 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장기적인 삶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투쟁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사실 실업 노동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점은 자신의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다양한 정신적 압박이나 당장의 생계가 막막하다는 사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살 길, 즉 삶의 장기적 전망이 불안정하다는 점이다. '실업자의 아들이 실업자가 되는' 서구의 사례를 보더라도, 조직적 투쟁이 없다면 실업과 불안정 노동이 반복되는 생활은 결코 손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실업운동의 활동가들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업 노동자들이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조직화 노력과 함께, 실업 운동은 언제나 더 큰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투쟁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전선을 형성하며, 민중연대 전선의 일주체로 스스로를 세워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 속에서 정권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수도 있고,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지원을 얻어낼 수도 있으며, 실업 노동자들 스스로가 최소한의 생활을 공동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정부와의 교섭이나 이를 통한 재원확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섭이나 양보가 활동의 목적은 아니며, 대중운동에 근거해서 활용가능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의 관점 속에서, 실업운동은 하나의 사회운동이 될 수 있다.
정부의 실업 정책을 정확하게 인식하자
<정부 정책 개요>
2000년 들어 정부는 실업에 대한 근원적 대책으로 노동시장 유연화와 벤처 창업 지원, 지식기반 산업 중심의 직업훈련 등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대책은 불안정 노동의 확산으로 실업을 해결하거나 혹은 '지식'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허무맹랑한 대책에 불과하다. 결국 정부의 실업 정책의 핵심에는 실업 노동자에 대한 고려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소위 '생산적 복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생산적 복지'가 지칭하는 바는, 안정된 일자리의 창출보다는 미봉적이고 선별적인 시혜와 불만을 무마시키고, 실업노동대중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정책은 정부 정책의 주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국민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서 사회적 복지 원리와는 상충되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는 결코 빈곤층을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선별적 원리를 적용하여 실업 노동대중을 분할하고 관리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분할관리의 논리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 민간실업운동단체들이 정부의 실업노동자 관리 정책의 '민간 전달자'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과 정부 사이에도 일정한 갈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좀더 면밀하게 고찰해보았을 때 이는 기실 정부와 일선 정부기관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갈등과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정책과 재정동원을 둘러싼 민간단체와 정부사이에 발생하는 '갈등 속의 협력', '협력속의 갈등'을 통해 실업자에 대한 분할관리는 관철되고 있다.
<정부정책의 전달자 민간실업운동단체>
민간실업운동단체들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적 논리는 무엇인가? "정부와의 교섭 ▶ 실업자 관리 기금 및 독점적 교섭권 확보 ▶ 구제사업을 통한 실업자 조직화 + 네트워크 확보와 전달체계 효율화 ▶ 정부와의 교섭 및 압력행사(로비 등) ▶ 더 많은 기금과 교섭권 확보"
이러한 '더 많은 교섭을 통한 더 많은 조직화'. 외형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다단계 판매가 전국민을 피라미드로 조직할 수 없는 것처럼 내적 한계를 가진다. 더군다나 이 시각은 실업운동이 결국 계급적, 대중적 세력관계의 문제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한계적이다.
구호방책은 이제 그만!
실업과 불안정노동. 이는 구조조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자본의 지속적인 금융투기와 생산비 절감으로 인하여 산업 예비군은 포화상태에 이른다. 노동계급 내에서 경쟁과 빈곤은 증가하고 있으며, 노동자 대중이 자본의 구조적 공세에 맞서 광범위한 연대를 일구어내지 못할 경우, 어떠한 교섭도 불가능하다.
이를 망각한 관리주의적 논리는 '실업'을 제거하지 못하고, 빈곤의 재생산과 악순환으로부터 빈곤층을 구출하지 못한다. 그리고 실업노동자는 언제나 최소생계만 유지하면 되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따라서 실업노동자들을 보다 각성된 권리의 주체로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단순한 '구호방책'만이 부각된다. 그러나 어떤 미사여구로 이를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할 뿐이다.
민중연대 전선의 주체로 서야 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쟁점들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주식투기나 벤처 창업으로 한몫을 챙긴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IMF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벤처 벤처라고 외쳐댔지만,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는 한낮 꿈에 불과했으며, 생산적 일자리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물가인상으로 민중의 삶은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실업노동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해야만 한다. 즉, 실업 노동자들은 약사나 의사들처럼 밥그릇을 챙기는 추악한 투쟁이 아니라, 사회를 책임지고 세상을 바꾸는 정치적 투쟁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실업 노동자의 운동은 바로 살아있는 정치의식을 필수 요소로 한다. 실업 노동자들이 정권의 비리와 사회의 불평등, 불의에 대해 일상적으로 문제제기할 때 진정한 전선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스스로의 생존권도 사수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단계의 실업운동의 조건 속에서 이러한 과제는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기존 실업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명확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제까지의 실업운동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실업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조직화를 일구어냈다. 그리고 나름의 모범과 전형을 만들어가면서 미약하나마 안정화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조직적 틀이 부분적으로 '실업 노동자에 대한 관리'의 양상과 단절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문제는 이제까지 일궈낸 조직화의 성과를 어떻게 보다 자주적인 사회운동으로 전화시켜낼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업운동이 보다 적극적인 대중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실업 노동자의 자주적 권리 속에서 전사회적 연대를!
첫째, 지난해 기초적 조직화에 근거해서 '안정적이고 떳떳한 일자리'를 요구하는 대중적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할 수도 있다. 실업의 문제는 바로 '일자리'의 문제이고, 정부가 제시하는 노동시장 유연화나 벤처 창업, 전노동자의 지식노동자화 등은 '안정적인' 일자리의 창출과 결코 무관한 '자본 살리기' 정책일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터무니없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존의 공공근로를 축소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그나마 존재했던 실업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관리조차 포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공근로축소'에 대한 반대를 투쟁의 고리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양한 투쟁의 고리들을 '안정적 일자리 창출'이라는 요구과 결합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둘째, 실업 운동이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부문적 요구'를 넘어 전사회적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개입을 해야 한다. 사실 실업 노동자가 사회의 수혜 및 관리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먼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이 결국 주식시장을 부양해서 전사회를 비생산적인 투기와 소비의 나락으로 빠뜨린다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해외 금융자본에 대한 예속과 전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즉 실업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발언할 뿐만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일자리 창출'의 요구를 금융화에 대한 반대와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금융소득 과세를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은 그러한 맥락에서 활용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으로서 실업운동이 전사회적인 핵심적 쟁점에 대한 투쟁을 통해 전국민적 지지와 정당성을 획득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업 운동의 활동가들은 누구보다도 사회적 쟁점들에 민감한 자기 인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먼저 일꾼들이 서야 실업 노동자들을 제대로 조직할 수 있다.
셋째, 전체 전선운동의 강화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실업운동이 결국 실업을 없애는 운동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루 아침에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실업운동은 실업노동자들을 자주적으로 조직하려는 노력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선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민중연대 전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 조직적 형태는 보다 광범위한 민중연대 전선조직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대 조직의 형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국가의 시혜나 관리에 만족하지 않고, 실업운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투쟁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투쟁과정에서 획득된 물질적 양보를 집단적으로 활용하면서 더욱 큰 투쟁으로 전진하고자 한다면, 유일한 길은 지속적으로 전선을 확대시키는 길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대중적 투쟁과 일상적 활동은 '실업 노동자의 자주적 권리'를 인정받고 자주적인 조직 건설로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즉, 현재 존재하는 전실련을 지속적으로 전선운동의 주체로 강화하여 실업운동이 보다 강력한 사회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전선운동의 주체'로 전실련을 강화한다는 것은 동시에 민중연대전선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적 차원에서건, 전국적 차원에서건, 이러한 연대 전선조직의 형성은 실업운동이 더 큰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민중운동 조직들 사이의 보다 개방적이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고, 실업운동도 이러한 작업에 끈기를 가지고 동참해야 한다.
IMF 구제금융 신청 이후 대량 실업사태가 우리 사회를 휩쓴 지도 2년 반이 지났다. 정권은 이제 IMF를 '졸업'했다고 선언하고, 이에 발맞추어 부유층의 과소비도 IMF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노동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언론에서 떠드는 이와 같은 이야기는 전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고용 사정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결과 다수의 노동자들이 고용과 실업을 넘나드는 준실업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대다수 장기 실업자들이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으며, 수많은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헤메고 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다. 요컨대, 지금의 실업은 과거의 '대량실업'처럼 눈에 쉽게 띠지는 않지만, 과거보다 훨씬 제도화되고 구조화된 형태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실업자들의 생존을 보호하고, 나아가 이들의 권리를 쟁취하고자 했던 실업운동은 변화해가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정권의 관리와 분열의 전략이 한 몫 하고 있다. 즉, 정권은 실업자들의 일부를 선별하고 또 실업운동의 일부를 선별하여, 후자로 하여금 전자를 관리하게 만들고 있다. 이에 따라, 실업 운동은 전체 실업자 혹은 실업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사람 전체를 스스로의 활동 근거로 삼고 투쟁을 발전시키고 있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스스로의 활동 기반과 수준을 축소시키도록 강제받게 된다. 그 결과 실업운동은 실업자들 전체의 권리 의식을 향상시키고, 이들과 함께 투쟁하기보다는 자그마한 물질적 혜택을 소수에게 제공하는 데에 스스로를 제한하는 데에 그치고 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실업 운동의 활동이 이러한 양상을 띤 것만은 아니다. 실업운동은 '실업'이라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해왔고, 실업자들의 최소한 생계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스스로의 운동의 대중적 기초를 미약하나마 형성해왔다. 하지만, '가시적인 대량실업'이 훨씬 은밀하고 다양한 형태로 구조화되면서, 사회적 관심도 줄어들고 정권의 양보도 축소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 실업운동은 정권의 전달 통로로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사회운동의 주체로, 민중연대 전선의 주체로 스스로를 정립할 것인가? 혹은 관성 속에서 스스로의 대중적 기반과 활동의 동력을 조금씩 소진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보다 적극적인 사회운동으로 성장해나갈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실업운동의 활로를 찾기 위해서 그리고 실업운동이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관점의 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실업운동의 이념과 목표는 무엇인가?
어떤 운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이념과 목표를 올바르게 설정해야만 한다. 운동의 이념과 목표는 단순한 공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활동 속에서 언제나 재확인되고 풍부화되면서 운동의 다양한 양상들을 통합하고, 나아가 운동의 전진 방향을 지시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좌표가 정립되지 않을 경우 아무리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운동도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좌표가 불투명한 운동은 수많은 운동의 일꾼들을 방황하게 만들고, 더욱 더 많은 대중들을 미혹에 빠지게 한다. 나아가 운동의 이념과 목표가 올바로 서고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유되지 않을 때, 활동가들은 분열되거나 스스로가 왜 운동을 하는가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 관성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운동의 역사가 증명해주는 바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실업 운동의 목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논의하지 못해왔다. 많은 경우 실업노동자들에 대한 실용적 대책과 처방을 마련하고 집행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현실이다. 이는 실업 운동이 형성된 사회적 상황이나 조건에서 비롯된다. 즉, 한국에서 실업 운동은 IMF 직후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실업 노동자들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고 살길을 찾아주는 가장 기본적인 활동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업운동은 '생계보장'이라는 가장 시급하고, 우선적인 활동들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변했다. 이제 변화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보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실업운동의 관점과 활동방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실업 운동의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왜 실업 노동자들은 투쟁해야만 하는가?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실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실업이 존재하는 한 누군가는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가 줄어들고, 정규직이 비정규직으로 바뀌어가면서 실업자가 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면 실업이 줄어들 거라고 떠들고는 있지만, 생산적 부문보다는 주식시장 활성화를 통한 경기부양에 주력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한낮 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실업운동의 이념은 '실업'의 원인을 제거하고, 모두가 떳떳하고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스스로의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펼쳐질 수 있다. 예컨대, 지역 차원의 다양한 공동체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고, 공공근로의 확대를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활동은 어디까지나 실업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지역 공동체, 협동조합, 그리고 공공근로 등이 실업노동자를 빈곤으로부터 탈피시킨 사례는 전국 어디에도, 아니 전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실업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방식-협동조합, 공공근로 등-에 대한 어떤 '장미빛 환상'도 조직화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하루 아침에 실업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공문구나 구차한 현실을 미화하는 것보다 끊임없는 투쟁없이는 실업이 사라지지도 실업노동자의 권리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다.
실업운동의 주체와 관점을 바로 세우자
실업운동은 누구의 운동인가? 흔히들 이야기하는 '실업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실 '실업자'라는 명칭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업자가 기실은 '일을 하고 싶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받지 못하는 노동자'라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실업자는 바로 '실업 노동자'이다. 그리고 실업운동은 바로 이러한 실업 노동자의 자주적 요구, 즉 떳떳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그것을 통해 보다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실업 노동대중의 자주적 요구와 그것에 입각한 자주적인 실천은 실업운동의 근본적인 전제가 되어야 한다. 자주적 운동이란, 운동의 주체들이 스스로 자신의 처지와 조건에 대해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스스로의 요구들을 정식화하며, 나아가 그러한 요구에 입각한 투쟁들을 조직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실업노동자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조직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스로의 권리를 대중적으로 제기하고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서구의 사례를 보거나 1999년 실업 운동이 조직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정부로부터 부분적인 양보를 얻기 위해서도 언제나 자주적 권리에 입각한 투쟁이 선행했다는 점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이 실업노동대중운동의 특수성과 결합하지 않는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즉, 실업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노동운동과는 다른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실업운동은 그 스스로의 자주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물질적 자원과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실업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정서적 안정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극복'할 수 있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그들 스스로 실업이 개인의 무능이나 실수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고 권리의 주체로 스스로를 인식하게끔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각만으로는 조직을 운영할 수 없다. 따라서 실업 노동자가 최소한 집단적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필요하다.
실업 노동자들의 경우 보다 직접적으로 생계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는 관계로, 이에 대한 직접적 대안이 비록 부분적이나마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자주적이고 집단적인 방식으로 이러한 문제를 토론하고 해결해나가는 점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실업 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장기적인 삶의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투쟁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사실 실업 노동자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점은 자신의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다양한 정신적 압박이나 당장의 생계가 막막하다는 사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앞으로의 살 길, 즉 삶의 장기적 전망이 불안정하다는 점이다. '실업자의 아들이 실업자가 되는' 서구의 사례를 보더라도, 조직적 투쟁이 없다면 실업과 불안정 노동이 반복되는 생활은 결코 손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실업운동의 활동가들이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업 노동자들이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지속적인 조직화 노력과 함께, 실업 운동은 언제나 더 큰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 투쟁하고 이러한 투쟁을 통해 전선을 형성하며, 민중연대 전선의 일주체로 스스로를 세워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 속에서 정권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낼 수도 있고,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지원을 얻어낼 수도 있으며, 실업 노동자들 스스로가 최소한의 생활을 공동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정부와의 교섭이나 이를 통한 재원확보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교섭이나 양보가 활동의 목적은 아니며, 대중운동에 근거해서 활용가능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직화의 관점 속에서, 실업운동은 하나의 사회운동이 될 수 있다.
정부의 실업 정책을 정확하게 인식하자
<정부 정책 개요>
2000년 들어 정부는 실업에 대한 근원적 대책으로 노동시장 유연화와 벤처 창업 지원, 지식기반 산업 중심의 직업훈련 등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대책은 불안정 노동의 확산으로 실업을 해결하거나 혹은 '지식'이 일자리를 만든다는 허무맹랑한 대책에 불과하다. 결국 정부의 실업 정책의 핵심에는 실업 노동자에 대한 고려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인식이 소위 '생산적 복지'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점이다.
왜냐하면 '생산적 복지'가 지칭하는 바는, 안정된 일자리의 창출보다는 미봉적이고 선별적인 시혜와 불만을 무마시키고, 실업노동대중을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정책은 정부 정책의 주변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국민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로서 사회적 복지 원리와는 상충되는 성격을 가진 것이다. 이는 결코 빈곤층을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선별적 원리를 적용하여 실업 노동대중을 분할하고 관리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분할관리의 논리를 정확하게 분별하지 못한 민간실업운동단체들이 정부의 실업노동자 관리 정책의 '민간 전달자'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과 정부 사이에도 일정한 갈등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를 본질적인 측면에서 좀더 면밀하게 고찰해보았을 때 이는 기실 정부와 일선 정부기관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갈등과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정책과 재정동원을 둘러싼 민간단체와 정부사이에 발생하는 '갈등 속의 협력', '협력속의 갈등'을 통해 실업자에 대한 분할관리는 관철되고 있다.
<정부정책의 전달자 민간실업운동단체>
민간실업운동단체들의 실업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적 논리는 무엇인가? "정부와의 교섭 ▶ 실업자 관리 기금 및 독점적 교섭권 확보 ▶ 구제사업을 통한 실업자 조직화 + 네트워크 확보와 전달체계 효율화 ▶ 정부와의 교섭 및 압력행사(로비 등) ▶ 더 많은 기금과 교섭권 확보"
이러한 '더 많은 교섭을 통한 더 많은 조직화'. 외형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다단계 판매가 전국민을 피라미드로 조직할 수 없는 것처럼 내적 한계를 가진다. 더군다나 이 시각은 실업운동이 결국 계급적, 대중적 세력관계의 문제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한계적이다.
구호방책은 이제 그만!
실업과 불안정노동. 이는 구조조정의 필연적 산물이다. 자본의 지속적인 금융투기와 생산비 절감으로 인하여 산업 예비군은 포화상태에 이른다. 노동계급 내에서 경쟁과 빈곤은 증가하고 있으며, 노동자 대중이 자본의 구조적 공세에 맞서 광범위한 연대를 일구어내지 못할 경우, 어떠한 교섭도 불가능하다.
이를 망각한 관리주의적 논리는 '실업'을 제거하지 못하고, 빈곤의 재생산과 악순환으로부터 빈곤층을 구출하지 못한다. 그리고 실업노동자는 언제나 최소생계만 유지하면 되는 사람으로 치부된다. 따라서 실업노동자들을 보다 각성된 권리의 주체로 의식화하고 조직화하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단순한 '구호방책'만이 부각된다. 그러나 어떤 미사여구로 이를 치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노예의 도덕'에 불과할 뿐이다.
민중연대 전선의 주체로 서야 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쟁점들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20대 80'의 사회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사회적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주식투기나 벤처 창업으로 한몫을 챙긴 사람들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IMF를 졸업하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벤처 벤처라고 외쳐댔지만, 수도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는 한낮 꿈에 불과했으며, 생산적 일자리는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적인 물가인상으로 민중의 삶은 파탄에 이르고 말았다. 실업노동자들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해야만 한다. 즉, 실업 노동자들은 약사나 의사들처럼 밥그릇을 챙기는 추악한 투쟁이 아니라, 사회를 책임지고 세상을 바꾸는 정치적 투쟁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실업 노동자의 운동은 바로 살아있는 정치의식을 필수 요소로 한다. 실업 노동자들이 정권의 비리와 사회의 불평등, 불의에 대해 일상적으로 문제제기할 때 진정한 전선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동시에 스스로의 생존권도 사수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단계의 실업운동의 조건 속에서 이러한 과제는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 기존 실업운동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명확히 평가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제까지의 실업운동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실업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조직화를 일구어냈다. 그리고 나름의 모범과 전형을 만들어가면서 미약하나마 안정화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조직적 틀이 부분적으로 '실업 노동자에 대한 관리'의 양상과 단절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문제는 이제까지 일궈낸 조직화의 성과를 어떻게 보다 자주적인 사회운동으로 전화시켜낼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업운동이 보다 적극적인 대중 투쟁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한다.
실업 노동자의 자주적 권리 속에서 전사회적 연대를!
첫째, 지난해 기초적 조직화에 근거해서 '안정적이고 떳떳한 일자리'를 요구하는 대중적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할 수도 있다. 실업의 문제는 바로 '일자리'의 문제이고, 정부가 제시하는 노동시장 유연화나 벤처 창업, 전노동자의 지식노동자화 등은 '안정적인' 일자리의 창출과 결코 무관한 '자본 살리기' 정책일 뿐이다. 게다가 이러한 터무니없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기존의 공공근로를 축소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그나마 존재했던 실업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관리조차 포기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공근로축소'에 대한 반대를 투쟁의 고리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다양한 투쟁의 고리들을 '안정적 일자리 창출'이라는 요구과 결합시키려는 지속적인 노력이다.
둘째, 실업 운동이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부문적 요구'를 넘어 전사회적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개입을 해야 한다. 사실 실업 노동자가 사회의 수혜 및 관리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먼저 사회적 문제에 대해 발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이 결국 주식시장을 부양해서 전사회를 비생산적인 투기와 소비의 나락으로 빠뜨린다는 점, 그리고 이로 인하여 해외 금융자본에 대한 예속과 전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즉 실업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발언할 뿐만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일자리 창출'의 요구를 금융화에 대한 반대와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금융소득 과세를 통한 일자리 창출' 등은 그러한 맥락에서 활용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회운동'으로서 실업운동이 전사회적인 핵심적 쟁점에 대한 투쟁을 통해 전국민적 지지와 정당성을 획득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업 운동의 활동가들은 누구보다도 사회적 쟁점들에 민감한 자기 인식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먼저 일꾼들이 서야 실업 노동자들을 제대로 조직할 수 있다.
셋째, 전체 전선운동의 강화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져야 한다. 실업운동이 결국 실업을 없애는 운동이라면, 그것은 결코 하루 아침에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실업운동은 실업노동자들을 자주적으로 조직하려는 노력과 함께, 지속적으로 전선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펼쳐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민중연대 전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고, 그 조직적 형태는 보다 광범위한 민중연대 전선조직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대 조직의 형성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으며, 결코 쉬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국가의 시혜나 관리에 만족하지 않고, 실업운동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투쟁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투쟁과정에서 획득된 물질적 양보를 집단적으로 활용하면서 더욱 큰 투쟁으로 전진하고자 한다면, 유일한 길은 지속적으로 전선을 확대시키는 길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대중적 투쟁과 일상적 활동은 '실업 노동자의 자주적 권리'를 인정받고 자주적인 조직 건설로 수렴되어야 할 것이다. 즉, 현재 존재하는 전실련을 지속적으로 전선운동의 주체로 강화하여 실업운동이 보다 강력한 사회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전선운동의 주체'로 전실련을 강화한다는 것은 동시에 민중연대전선의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적 차원에서건, 전국적 차원에서건, 이러한 연대 전선조직의 형성은 실업운동이 더 큰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민중운동 조직들 사이의 보다 개방적이고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고, 실업운동도 이러한 작업에 끈기를 가지고 동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