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0.8-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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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0년

장귀연 | 편집위원, 서울대사회학과 박사과정
<b>그 많던 제비꽃, 할미꽃, 강아지풀, 토끼풀은 어디에 있을까</b>

내가 태어난 곳은 경기도 안양이다. 물론 안양시는 아니고, 얼마 전 호적등본을 보니 '리'로 되어 있었다. 거기서 2년 10개월을 살았다. 그러니까 비누방울처럼 어슴푸레하게 단편적인 기억뿐이다. 처마가 낮은 집들이 잇대어 있는 골목, 동네를 벗어나면 징검다리가 놓인 가는 실개천 하나, 그리고 야트막한 언덕, 그걸 넘어야 버스 정류장이 나왔다. 정류장 부근에는 돼지우리 하나. 아 참, 어디쯤인지는 모르지만 딸기밭도 있었다. 엄마 손 잡고 딸기 사러 갔다가 딸기밭 가 앵두나무에서 잘고 빨간 보석들을 땄던 기억이 있다.
거기가 바로 지금 안양시 비산동 부근이란다. 비산동 거리를 몇 번 차로 지나친 적이 있는데, 짜증을 돋우도록 막히는 차도와 늘어선 상가들이 서울의 그런 저런 거리와 꼭 같았다. 물론 돼지우리나 딸기밭은 보이지 않았고, 언덕과 실개천도 없어진 지 오래일 것이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안양 집에서는 한때 우리 가족 외에 '아이 보는 아이'가 있었던 것 같다. 사돈의 팔촌의 이웃쯤 되는 열 두서너 살 먹은 어린 소녀, 비쩍 마른 팔다리와 큰 눈만 가지고 시골에서 올라와 학교도 안 다니고 남의 집에서 애 보다가 주인 아줌마만 없으면 애 팽개치고 골목으로 뛰어나가 고무줄 하던, 수요일 '아침마당'에 나와 그렇게 헤어졌던 부모형제를 찾는 아줌마들의 빛 바랜 사진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집은 도시에서 밥술 뜨는 집이었고, 월급 한푼 안 받고 먹여주는 것만 다행으로 여긴 그런 애보기 소녀들 몇몇이 거쳐갔었던 모양이다. 내가 주변 환경을 또렷이 기억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이미 애 봐주는 언니는 없었는데, 그건 역사적으로 볼 때 1970년대 공업화가 이루어지면서 그런 소녀들이 공장의 여공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란다.

만 두살십개월 때 드디어 서울특별시로 들어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과 두려움과 낯설음과 설렘을 안고 들어서고 있던 그 경계를, 나는 이삿짐 트럭을 타고 넘었다. 당시만 해도 깔끔하게 조성된 신흥 주택가였다. 집 뒤에는 산이 있었고 산 발치에는 코스모스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동네 아래쪽에는 아카시아가 무성한 작은 언덕이 있었다. 그런 산자락이나 언덕 자락에는 동네 할머니들이 돌보는 손바닥만한 텃밭들이 있어 옥수수며 고추며 깻잎들이 옹기종기 파릇파릇했다. 봄이면 가족들이랑 진달래가 붉게 흘러내리는 산에 가서 꽃잎 따다 전을 부쳐먹기도 하고 친구들이랑 언덕에 가서 아카시아꽃을 따먹기도 했다. 코스모스 밭이 테니스장이 된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고, 아카시아 언덕은 낮은 곳부터 조금씩 들어서는 집들에 잠식당하면서 점점 졸아붙었다. 지금 그 곳은 아카시아 대신 아파트가 우뚝 서 있다. 그때는 어디나 천지였던 제비꽃, 민들레, 할미꽃, 쑥, 강아지풀, 토끼풀들은 왜 지금은 있을 성싶은 데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까.


<b>애국조회 시절의 그 애</b>

나는 초등학교 아닌 국민학교를 다녔다. 분뇨로 칠갑을 한 재래식 화장실 건물이 따로 있었다. 공립학교여서 수업료는 없었고 기성회비 명목으로 1년에 만원 정도를 냈는데, 그나마도 못 내는 애들이 한 반에 몇 명씩 있었다. 기성회비 안 가지고 온 애들은 불려나가 뒤에 서 있곤 했다. 연말이면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내 연필이며 공책을 사서 그런 애들을 주었다. 앞에 나가 받는 애는 쑥스러워했고, 우리는 박수를 쳤다. 그런 애들은 대체로 작고 땟국물이 흘렀고 공부는 못했다. 4학년 때 그 중 한 명이 나를 쫓아다녔다. 우리 집에서 꽤 멀리 살았음에도 아침마다 학교 같이 가자고 부르러 왔다. 지저분한 것이 거리끼기는 해도 마음씨는 매우 착했다. 그러나 엄마는 싫어했다.

"넌 놀아도 왜 저런 애하고 노니?" 하다가 어느 날인가 그 애에게 직접 오지 말라고 말씀했다.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 부모님이 선생님을 잘 찾아오고 학교 행사에 돈도 잘 내는 나 같은 애들이 하면 아무 소리 없이 넘어갈 일도, 그 애가 하면 무지하게 혼이 났다. 나는 선생님이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반발심도 좀 생겼지만, 그래도 어찌하랴, 나 역시 이왕이면 깔끔하고 공부 잘 하는 애들과 놀고 싶었다. 나를 쫓아다니던 그 애 문수, 중학교에 못 간 걸로 알고 있다. 내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나와는 또다른 경로를 걸었을 그 애.

'난 항상 낙천적으로 하하 웃던 널 정말 싫어하진 않았는데, 엄마하고 선생님 때문에……'.

지금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건 분명히 핑계일 뿐. 아지랑이같이 희미하고 아련한 무언가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뿐.

월요일에는 애국조회(!), 토요일에는 주말조회를 했다. 태양은 사정 없이 내리쬐고 운동장에 똑바로 줄 선 채 꼼짝 못하고 몇시간씩 서 있어야 했다. 마이크 소리가 윙윙거리고 태양이 해무리처럼 번져가는 것을 느끼면서 쓰러진 적이 한 번 있다. 저학년 때는 '국기에 대한 맹세', 고학년 때는 '국민교육헌장' 외우기가 매년 있었다. 한 명씩 일어나서 외우다가 중간에 막히면 혼이 났다. 꼭 6월이 아니라도 반공 포스터 대회, 반공 표어 대회,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독후감 대회, 반공 웅변 대회는 연중 계속되는 행사였다. '잊지말자 6·25, 때려잡자 공산당'은 아주 상투적인 표현이었고,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라는 노래를 배우고 불렀다.

4학년 때 이사를 했다. 먼저 살던 집에서 한두 블록쯤 떨어진 곳이었다. 그 다음해쯤 강남 개발이 시작되었다. 전학 가는 애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우리 집은 서울 변두리 그 동네를 뜨지 않았다. 아직도 그때 이사한 그 자리에서 살고 있다. 집을 새로 짓기는 했지만.
새로 이사한 집은 아궁이가 아니라 보일러 집이었다. 그래봤자 연탄 보일러지만, 적어도 아랫목은 뜨거워서 장판이 눋고 윗목에서는 코끝이 시린 일은 없어졌다. 그래도 연탄을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공기에서 쨍쨍 얼음 소리가 날 것 같은 겨울 새벽마다 자다 말고 일어나 엄마는 연탄을 갈았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아서 겨울에는 주전자에 물을 데워 세수를 했다. 나와 내 동생은 한 세숫대야에 손 네개를 집어넣고 부르르 몸을 떨며 서로 손을 감싸주었다. 가끔은 집안의 물그릇에도 살얼음이 꼈다. 집집마다 김장과 더불어 연탄 장만하는 것이 가장 큰 겨울 준비였다. 골목에는 하얀 연탄재가 겹겹이 쌓였다. 아이들은 언덕에서 나무 판대기를 엉덩이에 깔고 썰매를 탔고, 어른들은 야단을 치면서 연탄재를 뿌렸다.


<b>시장과 상품</b>

이사하던 해에 스카이콩콩이 대유행이었다. 스카이콩콩이 없는 애들은 삽을 탔다. 그렇지만 삽은 사실 별 재미가 없었다. 나는 숫기가 없어 빌려타게 해달라는 말도 못하고 손톱여물만 씹으며 스카이콩콩 타는 애들을 부럽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부루마블이라는 주사위 놀이가 유행이었는데, 약 팔천원 가량 했다. 차마 사 달라고 조르지도 못하고 친구집에서 하거나 집에서 종이에 판을 그려서 동생과 같이 주사위를 던지며 놀았다. 그 다음에 최초로 전자게임기 팩맨이 나왔다. 이건 정말 비싼 거여서 가지고 있는 애들은 으쓱댔고 나는 그냥 오락실 가서 50원 내고 갤러그만 했다. 돌이켜 보면, 어린이 놀이기구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 그 스카이콩콩, 부루마블, 팩맨 시대가 아닌가 싶다. 그 전에는 딱지, 구슬, 고무줄, 공기, 제기 등을 문방구에서 몇십원씩에 사서 놀았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처음으로 승용차를 샀다. 포니2 중고였다. 바로 몇 달 전만 해도 아빠는 "자가용은 무슨 자가용,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데 쓸데없는 짓이지"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후에도 몇 년 동안 "중형차 같은 걸 사는 사람들은 속 빈 사람들이야. 사치지. 우리나라 같이 길도 좁은 나라에서는 소형차 중심이어야 해. 외국에 가 봐. 돈 많은 사람도 남의 눈 의식하지 않고 소형차 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은 그저 체면만 중시해서,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아빠 차의 배기량은 계속해서 업그레이드 됐다. 내가 아빠의 이중성을 지적하면, 약간 쑥스러운 듯이 "그러게 말이야. 그렇지만 소형차를 타고 가면 어디 가나 뒷전에 밀리고 대접을 해주어야 말이지.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돼"라고 하신다. 나는 쯧쯧 혀를 찬다.

이른바 중산층의 속물 근성에 대해 말이 났으니 말인데, 우리 부모님은 상품에 대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그러니까 신상품이 나오면 맨 처음 반응은 항상 이런 식이다. "이제까지 그런 것 없어도 잘 살아 왔는데, 시장과 광고에 놀아나는 거고, 체면 중시하고 유행 따르는 사람들이나 사는 거다." 그러다가 주위 사람들 중에서 반쯤이 장만하면 이렇게 바뀐다. "그것 참 괜찮다더라. 편리하고." 주위 사람들 대부분이 갖게 되면 이제 우리집도 그것을 살 차례다.

컬러 텔레비전, 전자동 세탁기, 진공 청소기, 가죽 소파 세트, 비디오, 골프장 회원권, 정수기 등이 차례로 그러했다. 신상품이 보급되는 과정에서 사게되는 것이야 뭐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면 상품과 광고와 체면에 초연한 척하는 발언을 하지 말든지, 어차피 몇 달 내에 사게 될 텐데……. 그때는 사치품이었지만 이제는 필수품이 된 것들이고, 편리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그것을 구매하게 되는 과정은 사실 필요해서라거나 편리함을 추구해서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은 다 갖고 있는데…'이다. 갖지 못하면 뭔가 뒤떨어지고 따돌림당하고 품위 없이 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다.

그런 점에서 특히 기억나는 건 내가 고등학교 때 유행했던 녹즙기다. 아침마다 케일이나 카프리 같은 걸로 생녹즙을 만들어 출근하는 남편에게 한 잔씩 건네는 아내, 수줍은 미소를 지으면서도 남편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현명한 주부의 모습. 예쁜 유리잔에 담긴 초록빛 액체가 구현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빠는 생녹즙의 쌉쌀한 맛을 싫어했고 마지못해 마시다가 몇달 후 녹즙기는 주방에서 치워졌다. 지금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b>배낭 메는 날라리?</b>

전두환 집권 후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 교복 두발 자율화가 있어서, 교복 부활로 내가 교복을 입은 것은 딱 2년 동안이다. 요즘은 중고등학생들의 책가방이 당연히 다 등에 메는 배낭이지만, 그게 처음 시작된 것은 내가 중학교 다닐 때였다. 처음엔 센세이셔널했다. 배낭을 메기 시작한 애들은 날라리였고, 선생님들은 그걸 단속하고 야단치고 때리고 했다. 그러나 1∼2년이 지나지 않아 누구나 다 배낭을 책가방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때 처음 배낭을 메고 나타났던 애들은 유행을 선도하는 애들이었던 셈이다. 배낭을 책가방으로 사용하면 뭐가 문제였을까? 누가 배낭을 메는 애들을 날라리라고 규정했을까? 왜 선생님들은 문 앞에 지키고 서서 배낭을 단속했을까?

서울에서 내가 중학교 때 아시안게임이, 고등학교 때 올림픽이 치러졌다. 그것들이 서울에 지금까지 확실히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은 거리의 비둘기 떼다. 전에도 공원이나 학교 같은 데에서 비둘기를 키우는 곳이 있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 비둘기들은 날 줄은 알았다. 거리를 온통 전세내고서도 날지 못해 차에 치어죽는 비둘기 떼들은 올림픽의 산물이다. 그리고 그 올림픽이 열리던 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면서 지강헌 일파가 죽어갔다.


<b>필사 복사본에서 컬러 화보 자료집까지</b>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소위 386의 가운뎃자를 차지하는 1980년대가 막 끝난 때였다. 그래도 그 분위기는 남아 있었다. 2주일에 한번쯤 교투가 있었고, 1달에 한번쯤 가투가 있었고, 또 그 사이사이 파출소 타격이 있었다. 지금과 비교해 볼 때, 그때는 거의 전쟁터였다. 붉은 화염병 불길이 길게 꼬리를 끌며 날아가고, 최루탄 터지는 소리는 총소리와 꼭 같았다. 그야말로 화염과 포연이 자욱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쓰러져서 버둥대곤 했다. 대규모 가투 때는 밤 깊어서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을 때까지 싸웠고, 지나다니는 차들 없이 깨진 포석만 가득한 밤거리를 지나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몇백 명이나 몇천 명이 모인 소규모 가투 때는 쫓겨다니기에 바빴다. 바로 뒤를 쫓아오는 백골단 때문에 뛰면서도 목덜미가 서늘했다. 이런 형식의 전투는 내가 2학년 때 대체로 끝났다. 두 살 아래 내 동생은 한 번도 화염병을 던져본 적이 없다.

무슨 때가 되면 학생회에서 자료집을 냈다. 글쎄, 자료집이라고 부르기는 좀 뭣하다. 손으로 쓴 것과 타이프라이터로 친 것이 섞여 있는 복사물 뭉치였다. 총학생회에서 만들어 복사해서 단대 학생회에 나눠주고, 단대 학생회에서 복사해서 과 학생회에 나눠주고, 다시 과 학생회에서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식이었다. 대자보는 매직으로 썼다. 그래서 대자보 쓰는 건 꽤 시간이 걸리고 힘든 일이었는데, 그런데도 건물 안팎의 벽을 온통 도배해서 새로운 대자보를 붙일 벽이 부족할 정도였다. 컴퓨터 프린트를 붙인 대자보가 나온 것은 ?澎 2.0이 보급된 4학년 이후였다.

내가 1학년 말쯤 되어서는 손으로 쓴 문서들은 점점 사라지고 컴퓨터 프린트물이 주가 되었다. 그때쯤 제본 형식의 자료집이 등장했다. 3학년 말 학생회 선거 준비를 할 때 출시된 지 얼마 안된 ?澎 2.0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꽤 고생했다. 물론 그때 컴퓨터 운영체계는 도스였다. 그리고 1년 후 4학년 말 학생회 선거자료집은 전문기획사에 맡겨 컬러 화보가 선명한 것들이었다. 훨씬 멋지고 깔끔하고 화려하다.

그러나, 그런데도 가끔은 그립다, 손으로 쓴 문서 복사뭉치가.
지금 생각하면 야릇하게도 느껴지는 힘과 열정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들. 몇 번을 복사해도 흐려지지 않으려면 세게 눌러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의 대학 시절은 타이프라이터에서 펜티엄까지 흘러갔고, 우리 집은 연탄 아궁이에서 도시가스까지 바뀌었다. 나는 서른 살이다.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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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저임금 최저임금위원회 최임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