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11-12.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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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국제주의를 향한 한걸음

이창근 | 민주노총 국제국장
노동국제연대운동에 관심을 갖고 시작하게 된 배경은 좀 단순했던 것 같다. 자본의 세계화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략도 국제주의적인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저쪽도 세계화되었으니, 우리도 세계화되어야 한다’는 단순논리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 물론 논리가 단순하다고 해서 실현과정까지 단순하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에다 1990년대 초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한 이후, 다른 나라 활동가들은 어떤 생각, 어떤 저항 논리와 이념을 갖고 운동을 지속하고 있을까에 대한 궁금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이면서도 책 위의 한 구절 정도로 전락한 국제주의를 현실로 끄집어내어 실현해보고 싶다는 어떤 ‘욕망’ 같은 것이 있었다. 이 세 가지는 아직까지 나를 지탱해주는 동인이기도 하다.
민주노총 국제담당자로 일하게 된 것은 2002년 12월부터이다. 민주노총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꼭 실현하고 싶은 몇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로 ‘남반구 및 아시아 연대’였다. 북반구 중심의 주류 국제노동운동에 맞선 다른 경향의 창출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민주노총이 국제연대의 일방적 수혜자로부터 벗어나, 세계적 차원의 노동운동 특히 아시아 지역 민주노조운동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 1999년 말 WTO 각료회의에 맞선 시애틀 투쟁을 통해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국제 사회운동진영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라고 꼭 노동조합과만 연대할 필요는 없다. 마지막은 아주 근원적인 문제였다. 국제연대활동을 어떻게 상층 실무자 몇몇이 하는 사업이 아니라, ‘현장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으로 전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남반구노조연대회의(SIGTUR)에 대한 기대와 현실적 난관

초창기 남반구노조연대회의(SIGTUR)에 많은 주목을 했다. 남반구 노조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유력한 매개로 생각했다. 사실 이 네트워크는 남아공노동조합회의(COSATU)와 호주노총(ACTU) 서부지역본부에 의하여 제안되었고, 1991년 5월 첫 번째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는 필리핀의 노동절운동(KMU), 인도네시아의 연대노조, 말레이시아의 독립노조, 스리랑카, 파키스탄, 파푸아뉴기니, 남아공노동조합회의(COSATU)가 참가하여 열악한 환경에서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전략과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방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 이후 2~3년 주기로 총회가 열렸으며, 가장 최근에는 지난 4월 인도노총(CITU) 주관으로 케랄라에서 개최되었다.
민주노총이 공식적으로 SIGTUR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200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남반구노조연대회의 기획회의와 그 다음해 11월에 열린 서울 총회였다. 민주노총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제3세계 노동조합 연대기구인 남반구노조연대회에 참가하는 것이 제3세계 민주 노동조합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중요한 사업이라는 판단하여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이후 민주노총은 2003년 멕시코 칸쿤 투쟁, 2004년 인도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등에서 ‘SIGTUR 포럼’을 조직하여, 남반구노조연대회의를 활성화시켜보고자 했다.
하지만 SIGTUR를 매개로 주류 국제노동운동에 대한 다른 경향의 창출은 현재 난관에 봉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된 데는 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국제자유노련(ICFTU)은 세계노동총동맹(WCL)을 흡수통합하여 2006년 국제노총(ITUC)을 출범시켰는데, 사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지점은 좌파 성향의 독립노조들이 새롭게 가맹했다는 점이다. 네팔노총(GEFONT), 아르헨티나노총(CTA), 콜롬비아노총(CUT), 인도의 비공식부문 여성노동조합(SEWA) 등이 대표적이다. (SEWA의 경우 ICFTU 마지막 집행위원회에서 가맹신청이 받아들여졌지만, 이 역시 새로운 국제노총의 출범을 염두에 둔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미 ICFTU 시절부터 가맹되어 있던 민주노총, 남아공노총, 브라질노총 등을 고려하면, 이미 남반구의 노총들에게도 주류 국제노동질서, 즉 ITUC에 대한 개입과 개혁이 현안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SIGTUR는 이를 자기 과제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SIGTUR 내부에는 ITUC에 비판적이고, 가맹하지 않은 독립노총과 노조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반전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이 새로운 화두로 제기되었는데, SIGTUR는 이에 대해서도 통일된 입장과 계획을 내지 못했다. SIGTUR 내에서 주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인도노총(CITU)과 필리핀 노동절운동(KMU)은 세계사회포럼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반면, 민주노총, 브라질노총은 적극적인 연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08년 케냐 세계사회포럼을 계기로 ‘노동자와 세계화’(Labour and Globalization)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SIGTUR는 이 지점에서도 사실상 뒤쳐지게 된다. 결국 SIGTUR는 변화된 국제연대운동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위치에 처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SIGTUR 운영위원회는 2007년 회의에서, “SIGTUR는 새로운 국제노동조합조직 결성을 목표로 하지는 않으며, 진보적인 남반구 노동조합들간의 네트워크”라고 그 위상을 규정하게 된다. 동시에 초국적기업 대응 등 보다 구체적인 쟁점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인 네트워크로 전화시키는 방향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질문은 남아 있다. 남반구의 진보적 노동조합 연대에 있어서 SIGTUR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아시아 노동자 연대를 향하여

민주노총 국제사업이 아시아에 보다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실현하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2003년 아시아 노동조합 연대회의를 개최하였지만, 결과는 ‘의욕 과잉’이었다. 구체적이면서 지속가능한 연대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결국 이벤트로 끝나고 만다는 값비싼 교훈만을 얻었을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아시아 연대 실현을 위한 세 가지 계기에 착목하게 되었다. 하나는 아시아에 진출한 한국계 초국적기업 문제이고, 두 번째는 이주노동자 문제이며, 마지막으로는 장기적 안목에서 아시아 지역 민주노조운동 역량 강화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아시아 진출 한국계 초국적기업 문제는 민주노총 국제사업의 공백 지점이었다. 국제적으로 악명 높은 한국계 기업의 노동탄압에 대해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진정성을 갖고 이 문제에 대처하지 않는다면 아시아 연대는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맥락에서 2005년 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실과 함께 아시아 진출 한국계 초국적기업 노동탄압 실태 조사를 벌였고, 이를 국정감사에서 제기하였다. 또한 올해 4월에는 현대자동차 인도 공장에 대한 실태조사를 금속노조와 함께 진행하였고, 몇 가지 후속사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필리핀 필스전, 청원패션 등에 대해서도 시민단체와 함께 대응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필리핀 한진중공업 노동탄압이 가시권에 들어와 있고, 이에 대해 건설연맹과 금속노조가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결국 한국계 초국적기업 문제는 아시아 연대를 실현함에 있어서 우회할 수 없는 계기이면서, 또한 실천적 매개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보다 전략적 사고와 계획이 필요한 때이다. 국제기본협약(IFA), ILO 및 OECD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제소 등 다양한 제도를 활용하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현지 노동조합 투쟁 지원과 노동조합네트워크 구성 등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모기업이 속해 있는 산별(혹은 연맹)과 단위사업장 노동조합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주노동자 권리 보장 역시 아시아 연대의 중요한 계기다. 올해만 놓고 보면 이주노조와 함께 유엔인권이사회, ILO 총회, 이주발전글로벌포럼(GFMD) 등 다양한 계기들을 통해 이주노조 합법화와 이주노동자 기본권 보장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와 지원을 호소했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국제적인 압력 조직화에 있어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보다 구체적인 연대계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이주노동자 권리보장을 위한 본국과 유입국 노동조합 간의 실천적 연대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가 향후 관건이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재 네팔노총(GEFONT)과의 연대 협력에 초점을 맞춰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 노조활동가 교육, 교류 과정

마지막으로 아시아 연대에 있어서 관건 중의 하나가 민주노조 역량 강화 지원이다. 이는 아직 아시아 지역 민주 노동운동 역량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국제연대가 ‘뜬 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면, 아래로부터 역량을 강화시켜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아시아노조활동가 초청 교육, 교류 과정’이 기획되었다. 2007년 처음으로 이 과정을 산별, 연맹과 공동으로 진행하였고 올해 두 번째 과정을 개최했다. 6~7명 정도의 아시아지역 노조활동가들이 참가한 프로그램이었지만 아시아 노동자연대를 긴 호흡으로 강화시켜내는 중요한 계기로 성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교육과정을 아시아 지역 민주노조활동가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그런 과정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원대한 꿈이 있다.

민주노총 반세계화 투쟁

반세계화라는 관념은 어떤 세계화를 반대하는가라는 점에서 불명확하고, 극우적인 반세계화와 차별성을 긋기 힘들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개념이라고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은 여전히 WTO, FTA 등 신자유주의적 무역질서에 맞선 투쟁, 초국적 투기자본 규제 등을 ‘반세계화’ 투쟁으로 개념화한다. 민주노총은 세계사회포럼(WSF)에 참가단을 조직하여 참가하였고, 국제위원회(IC) 위원이기도 하다. 또한 2003년 WTO 각료회의에 맞선 멕시코 칸쿤 투쟁, 2004년 한일 FTA에 맞선 도쿄 방문투쟁, 2005년 WTO 홍콩 각료회의에 맞선 투쟁, 2006~2007년 한미 FTA에 맞선 미국 방문 투쟁 등에 참가했다. 외형적으로 민주노총은 ‘반세계화’ 투쟁에 꽤 적극적이다.
하지만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반세계화’ 투쟁을 민주노총이 얼마나 자기문제로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미지수다. 물론 이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투쟁’ 동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노동조합의 현실은 조합원 및 노동자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쟁점을 주요한 투쟁 의제로 제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서 ‘반세계화’는 조합원들에게 아직까지는 거리감을 느끼는 혹은 자기 의제로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는 쟁점이다. 그나마 FTA 투쟁 정도가 구조조정과 일자리, 주권을 포함한 사회적 권리의 침해와 연계되면서, 노동자 내부 의제화에 일정하게 성공한 경우다. 하지만 FTA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적 무역질서가 초래할 ‘결과’에 대한 문제제기를 넘어, 보다 근원적인 초국적 금융자본과 투기자본에 대한 문제제기는 민주노총에서 여전히 자기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하다.

조건들

국제노동운동의 주류에 맞선 다른 경향의 창출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지만, 최소한 몇 가지 조건들은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로 세계사회포럼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전반신자유주의 사회운동 역량과의 연결망 형성이 필수적이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이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로 좋은 에너지를 교류할 수 있을 때, 새로운 경향의 창출은 가능할 것이다. 특히 노동조합의 입장에서 이는 대단히 중요하다. 두 번째로 아시아 지역의 민주노조운동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 민주노총이 갖고 있는 한정된 자원을 고려하면 이에 대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는 장기적으로 ‘아시아사회운동연합’과 같은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을 아우르는 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밀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구체적인 의제를 중심으로 국제주의적 실천을 강화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초국적기업, 이주노동자, FTA를 포함한 신자유주의적 무역질서 등의 의제는 일정한 국제연대투쟁의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력한 매개가 될 수 있다. 네 번째로 남반구 노조주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여전히 정치적 유효성을 갖고 있다고 보지만, 이것의 실현은 국제사회운동 및 북반구의 진보적 노동조합과의 연대 과정과 결합되어 진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국제노총에 가맹되어 있는 진보적 노총들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내부 진보블록의 형성과 개혁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에필로그

모든 사업이 그렇듯이 국제사업도 상당한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국제주의는 모든 활동에 녹아들어가야 할 관점이자 원칙이지 특정 담당 혹은 부서의 전문 영역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국제사업도 축적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체계와 역량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고민이 사회진보연대에도 필요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주제어
노동 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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