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8.11-12.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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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한국 민중운동과 사회진보연대 출범

임필수 | 정책위원장
1985년 구로동맹파업과 1987년 노동자투쟁을 통해 형성된 노동자운동은 1990년대를 걸쳐 명멸하거나 부침을 거듭했다. 구로동맹파업이 시발점이 되고 1985년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과 1986년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을 거쳐서 1987년 이후 정치 수면 위로 부상한 정치적 노동자운동(정당지향 노동자운동)은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때 이른 영락을 경험했다. 하지만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최소한 197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 위기에 대한 인식 속에서 반성과 재출발의 필요성이 각인되었다면, 한국운동의 위기의식은 이러한 맥락에 대한 맹목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과 1990년 전노협 건설로 사회주의권의 붕괴에도 건재해 보였던 노동조합운동은 1992년 노동운동 위기론을 계기로 이념과 조직원리, 행동방식에 있어서 코퍼러티즘적 지향으로 전환한다. 전노협의 성격이 사회운동노조와 가깝고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상당히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면, 민주노총 건설을 전후한 시점부터 한국의 노동조합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의 결성은 이러한 모든 운동세력의 결집이라는 외양을 띠었지만, 그 결합은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상당히 취약했다. 민주노총은 위기국면에서 수세적 대응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1997년 대선 이후 IMF 경제위기를 거치며 노동조합 내적 분열과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고, 민주노동당은 정박점을 잃게 되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민주노총의 출범, 국민승리21의 결성, IMF 경제위기, 민주노총의 노사정 사회협약 체결,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패배 이후 국면에서 출범했다. 사회진보연대의 출범은 곧 1980-90년대 운동과 1997-98년 위기 정세에 대한 인식과 전망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 글은 1998년 사회진보연대 출범 이전까지 노동자운동이 직면한 현실과 모순을 다시 조망함으로써 출범 당시 사회진보연대에 주어진 과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이는 지난 10년 간 사회진보연대 활동을 평가하고, 현재의 과제를 더욱 명확히 인식하기 위한 기준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1997년 이전 정당지향 노동자운동: 정치적 노동자운동

정당 지향 노동자운동의 성장

“7.8월 대파업투쟁은 6월 투쟁의 결과 조성된 새로운 정세에 조응한 노동자계급의 첫 진출이었지만, 그것의 정치적 성격은 6월 투쟁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이해, 역사적 임무를 자각하고 자본가계급의 정치 경제적 지배에 대항하는 독자적 계급으로서 진출하는 것, 이것이 7,8월 투쟁이 준 공간을 딛고 그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국적 차원의 노동자조직의 결성으로 실현된다. 노동자계급의 목적을 전국적 규모로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한, 가장 진실된 조직형태는 노동자당이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7.8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1988.9.)

“남한의 사회주의자는 노동자계급의 모든 자생적인 계급투쟁을 사회주의적 이념과 결합시키고 다른 모든 진보적인 계급, 계층의 투쟁을 지도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노동자계급을 통일된 전체로 결합시켜 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침로를 제시하며, 여타 모든 진보적인 계급, 계층을 지도할 노동자계급 전위정당의 건설을 자신의 임무로 한다.” (노동계급,「남한 노동자계급의 강령초안 및 해설」, 1989.5)

1980년대 형성된 민중민주주의 운동은 노동자정당, 특히 노동자 전위정당 건설을 분명한 조직적 목표로 제시했고, 이러한 노력은 1987년 노동자투쟁을 계기로 공공연하게 수면 위로 부상했다. (우리는 이를 정당지향 노동자운동 또는 정치적 노동자운동이라 부르고자 한다.) 1980년대 초반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 민중항쟁을 계기로, 특히 군부 파시즘에 대항한 학생운동과 노동현장 이전을 통해 형성된 혁명적 지식인 집단들과 1987년 노동자투쟁을 계기로 폭발한 민주노조 운동을 통해 형성된 선진 노동자 집단들을 전국적으로 단일한 대오로 규합하고 이들을 이념과 강령, 규율로 무장한 혁명세력으로 단련시키기 위한 계획으로서 사회주의 이념지향을 강하게 지닌 노동자정당의 건설이 제시되었다. 특히 1987년 6.29 선언과 대선의 경험은 황망한 것이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분출된 반파시즘 투쟁은 군부의 6.29선언으로 잠재워졌고, 12월 대선은 민중운동이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 김영삼 김대중 후보단일화, 백기완 독자후보 운동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노태우의 재집권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르주아 운동과 이념적, 조직적으로 독자적인 강고한 운동을 구축할 필요성이 사활적으로 제기되었고, 이러한 부르주아 운동이나 이를 추종하는 일체의 이념, 운동과 근본적으로 대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민중민주주의 운동은 ‘일반민주주의’이나 ‘민족해방’ 운동, 이념과 대별되는 과학적 분석, 변혁이념을 매개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운동은 1987년 수면 위로 떠오르자마자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직접적 계기는 정권의 물리적 탄압이었다. 문익환 목사 방북을 계기로 노태우대통령이 좌경세력 척결을 위한 한시적 상설대책기구를 지시함으로써 1989년 4월 3일 검찰, 경찰, 안기부, 보안사로 구성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발족했다. 공안합수부는 활동한 77일 동안 문목사 방북사건 관련자(8명 구속, 26명 불구속) 외에도 이적단체(21명 구속, 3명 불구속), 노사분규주동과 의식화배후조정(60명 구속) 등 317명을 구속시켰다. 공안합수부가 해체된 이후에도 단체들에 대한 공안탄압은 정권 말기까지도 지속되었고, 존재와 활동이 조금이라도 드러난 조직이라면 거의 한 차례 이상 조직사건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처럼 정권의 탄압은 예고된 것이었지만, 그 타격은 감당하기에 쉽지 않았다.

정당 지향 노동자운동의 노선 분화

하지만 1987년을 계기로 한 정당지향 노동자운동은 출발점부터 노선분화를 잠재하고 있었다. 그 선두에 있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1988년 즈음부터 점진적인 노선 변화가 나타났다. 이는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3저호황, 정치적으로는 개헌과 대통령직선제 도입이라는 현실을 반영했다. 1988년부터 1990년 민자당 창당 시점까지 점진적으로 전개된 그들의 입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1. 남한의 부르주아는 저임금을 통한 고착취, 독재정권에 의한 막대한 특혜에 힘입어 제국주의 독점자본과의 부등가교환을 통한 막대한 양의 잉여가치 유출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본축적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것이 개량의 물적 토대가 되고 있다.
2. 개량국면은 군사독재정권의 구조적 위기와 관련된다. 종속적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국내의 경제적 지배계급으로 확고한 지위를 점한 독점 부르주아는 군사독재 정권과 관계 재정립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20여 년 간 계속되어온 군사독재정권이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구조적 위기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위기로부터의 탈출이 지배계급 주도 하의 개량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점진적 이행이다. 이것은 유동적 국면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향성의 표현이다.
3.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특징은 각 계급에게 계급투쟁의 합법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군사파쇼 통치로부터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이행의 정도에 비례하여 전선은 합법화되고 있다.
4. 이 시점에서 부르주아 정파를 모두 비판하면서 노동자, 농민과 진보세력의 정치적 구심으로서 민중정당을 건설해서 보수 대 혁신 구도를 창출해야 한다. 지자제, 총선 등에서 부르주아 정파들과 당당히 겨룰 준비를 해야 한다. 토지, 주택문제, 농업문제, 통일문제에 대하여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을 명확히 세우고 대중 앞에 제시해야 한다. 민중정당과 민중운동연합은 민족민주운동의 두 날개이며, 민족민주운동이 제대로 날기 위해서는 두 날개가 다 필요하다.

이러한 입장은 범 민중민주주의 운동 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노선에 대해 제기된 비판을 요약하면 이렇다.

1. 한국사회의 독점강화와 종속심화는 동시적 경향이다. 종속심화는 종속약화라는 그 반경향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으로 관철된다.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적 자본축적과 그에 따른 사회구조적 변화의 결과로 반제의 과제는 그 계급적 내용이 변화된 채로 지속되면서 반독점의 과제와 결합된다.)
2.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에서 식민지 초과이윤의 수탈로 인해 구조적 개량의 지속과 그에 따른 변혁운동 내의 개량주의의 등장의 물적 토대가 취약하다. (물적 토대가 취약하더라도 개량주의가 등장할 수 있지만 물적 토대가 존재하는 경우에 비해 존재양태가 다를 것이다.)
3. 독점자본이 개혁을 지지하는 것은 자본축적의 안정적 조건에 기여하는 한에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보편적으로 고양되어가기 시작하면서 독점자본은 (과거 5공 때와는 다른 양상이더라도) 재반동화되고 있다. 민자당의 출현은 재반동화의 표현이다.
4.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계급투쟁의 합법적 기회의 부여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에 의회에서 변혁운동 진영의 활동을 비합법활동과 합법활동의 결합이 아닌 비합법활동의 합법화라는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합법주의로 빠지게 된다.
5.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구심으로서 전위당이 건설되어 있지 못하고 민중민주변혁의 과학적 전망이 대중운동 내에서 뿌리내리지 못한 조건에서 합법주의에 대한 철저한 경계가 필요하다. (인민노련은 민중정당을 강조하지만 노동자계급 전위정당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추상적으로만 언급할 뿐이다.)
6. 현실 투쟁에서 단지 요구강령의 선동을 넘어서 요구강령과 이행강령을 결합시켜야 한다. 따라서 과학적 강령의 수립과 강령의 선전선동이 관건적이다.

이처럼 잠재적인 노선차이가 존재함에도 1990년대 초반 범 민중민주주의 진영의 일부부터 노동자정당 건설을 위한 선통합이 이루어진다. 1991년 인민노련, <노동계급>, <민족통일민중민주주의노동자동맹>(삼민동맹)의 통합이 이뤄지고, 6월에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한사노당) 창당준비위원회가 발족한다. 하지만 이때 삼파통합을 전후한 시점부터 한사노당 창준위를 거쳐 1991년 12월 한국노동자정당건설추진위원회(노정추), 1992년 1월 한국노동당(한노당) 창당, 1992년 2월 통합민중당 결성, 1992년 4월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발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노선 논쟁이 전면적으로 부각된다.
이는 1991년 9월 이후 제시된 주대환 한사노당 위원장의 신노선이 출발점이 되었다. (「노동자 정당 건설 전략에 대해 재고를 요청함」, 1991.9.29.) 신노선의 요지는 이렇다. 한사노당의 기존 노선이 독자 대오를 유지하면서 지하조직운동으로서 세력을 키우고 동시에 조직의 이름을 내건 공공연한 활동을 통해 합법성을 쟁취하는 것이었다면, 신노선은 여러 좌익세력과 연합, 공생하며 즉각적으로 합법영역으로 진출하여 창당의 길로 나아가고, 한사노당의 핵심역량을 합법정당으로 이전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조건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대중적 노동자정당 건설이 어렵고, 따라서 ‘우회로’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이러한 조직노선의 전환 못지않게 사회주의운동의 완전한 새 출발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도 중요한 대목이었다. 여기에는 1989년 가을 이후 사회주의권의 연쇄붕괴, 1990-91년 서유럽 공산당(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의 해산, 이러한 흐름에 종지부를 찍은 1991년 8월 소련공산당 보수파의 쿠데타 이후 공산당의 해체가 큰 영향을 끼쳤다. (1991년 12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은 최종 해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사회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신노선이 모호하거나 동상이몽으로 이해되고 있던 가운데 1992년 2월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사건 구속자, 수배자들이 공안당국에 제출한 <탄원서>는 큰 추문을 불러일으켰다. 탄원서가 곧 그들의 신노선의 실체와 동일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사노당이 안기부와 타협하여 사회주의를 포기했다’는 추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한사노당 세력의 운동적 양심과 도덕성 문제에 대한 심각한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탄원서 이후로는 신노선에 대한 우경적 인식이 일련의 ‘고백’을 통해서 확대되었다. 물론 진정추 내부에서도 신노선에 대한 다른 방식의 인식도 있었다. 즉 ‘신노선이 정보경찰의 탄압으로 비합법활동조차 위축됨으로써 부르주아의 반사회주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수세적인 성격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탄압 속에서도 공공연하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활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공세적인 성격도 담고 있다. 따라서 신노선이 말하는 우회로는 사회주의 활동의 잠정 중지가 아니라 여타 세력과의 공존 속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이 얼마나 훌륭히 수행되었느냐 여부와는 무관하게 정당지향 운동의 통합을 지지하고 신노선 이후 전환과정에 동참한 세력들의 적극적 의도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당지향 노동자운동의 소진

1992년 14대 대선 이후 진정추, <민중회의>, <사회당 추진위원회>(사추위),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 4개 단체가 <진보정당추진위원회 결성을 위한 수임위원회>을 결성했으나 내부 의견차이로 1993년 3월 수임위원회는 해소되었다. 민중회의 위원장이 수임위에 제출한 ‘우선 통합이 가능한 조직부터 통합을 시도하자’는 방침에 따라 1993년 5월 16일 민중회의와 사추위가 <민중정치연합>(민정련) 결성했다. 전국노련은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지향했으나 합당한 주체형성과 충분한 환경조성에 더 전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하지만 1993-1996년에 이르는 시기 동안 정당지향 노동자운동은 계속 역량이 소진되어 갔다.
우선 민정련은 1993년 11월 1기 2차 대의원대회에서 1995년 상반기까지 창당을 실행한다는 방침을 밝혔고, 기관지를 통해서 기존 진보정당 운동에 대한 평가를 제시했다. 요지는 ‘민중당, 한노당 등 기존 진보정당은 자신의 활동을 합법적, 제도적 틀 내로 제한하면서 정권과의 대결에서 힘을 상실했다. 특히 한국노동당이 초반에 반향을 불러일으키고도 탄원서 제출, 통합민중당 결성, 노동운동으로부터의 철수를 통해서 노동자에게 등 돌림을 당하였다.’ 따라서 진보진영의 과제는 ‘첫째, 노동조합운동의 활성화와 산별조직 건설운동의 진전, 노조운동의 변혁성 강화. 둘째, 사회주의 운동의 전망을 실천적으로 구체화하는 진보정당의 건설. 셋째, 노동조합운동과 진보정당운동 상호간의 과감하고 긴밀한 결합, 넷째, 노동조합운동과 진보정당운동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부문, 시민운동을 포괄하는 진보대연합의 구축’이라고 제시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만큼 만족스럽지 못했다. 1995년 2월 2기 2차 대의원대회에 즈음한 상집다수안을 종합해보면, ‘1993년 5월 결성 이후 11월 대의원대회에 이르는 짧은 시점까지도 조직원 수가 680명에서 430명으로 줄고, 지부도 25개에서 20개로 줄어들었다. 따라서 민정련 독자적으로 1995년 상반기까지 창당을 완수한다는 것은 무리한 계획이었다. 따라서 우선 진보정치세력의 분립을 극복하고 통합조직을 건설하여 그 조직을 중심으로 창당사업을 활성화하고 구체적인 창당시기를 확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안은 진정추와의 통합을 염두에 둔 입장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해 구로 마창지부 일부 대의원 명의로 제출된 이견안의 요지는 ‘현재 창당준비의 초점은 전국노련,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와 같이 노동조합에 기반을 단체를 정치활동 조직으로 견인하는 데 맞춰져야 하며, 진정추와 통합을 추진한다면 반드시 탄원서 서명자들의 숙정이 이뤄져야 한다. (즉 서명자들을 모든 간부직과 선거후보에서 배제해야 하며, 그들이 만약 활동의사가 있다면 하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2월 대의원대회는 양측 모두가 표결을 강행하는 것은 조직이 갈라지는 길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표결을 유보함으로써 결정이 뒤로 미뤄졌다.
그 후 1995년 3월 민정련과 진정추는 진보정치 세력의 대통합을 위한 결의를 밝혔고, 4월 민정련 3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진정추 대표가 내빈으로 참석하여 과거사에 대한 ‘공식 사과의 뜻’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1995년 8월에 이르러 새로운 쟁점이 부상했다. 1995년 8월 25일에 열린 <개혁적 국민정당 추진을 위한 결의대회>에 진정추 대표 등이 참석하고, 또 8월 28일 <정치개혁시민연합> 발기인대회에서 창립준비위원으로 진정추의 핵심인사들이 참여한 것이다. 민정련 주요지부는 ‘진정추의 정개련 참여는 민정련과 진정추의 통합을 원점으로 돌리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민정련 상집이 정개련 참여를 사실상 추인한 것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지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1995년 9월 민정련은 해산했고, 진정추와 통합을 지지한 세력을 중심으로 통합이 이루어져 1995년 9월 25일 진보정치연합이 결성되었다.
당시 진보정치연합 결성을 지지한 양대 세력의 위기의식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1994년 당시 <진보저널> 기사는 이렇다. ‘양조직 모두 조직역량이 출범 시점에 비해 상당히 위축한 상태로 상대방을 배제한 독자적인 창당을 고려하기 힘든 실정이다. 변혁성을 골백번 강조한다고 변혁성이 물질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5년 10월 진보정치연합 대의원대회는 15대 총선방침을 확정했다. 요지는 ‘첫째, 노동, 시민사회세력과 함께 총선용 선거연합정당 건설에 참가한다. 둘째, 지역상황에 따라 무소속 출마도 허용한다. 셋째, 총선이 끝나면 선거연합정당에서 탈당하여 진보정당건설에 매진한다.’ 이 방침은 치열한 격론 끝에 총선방침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진보정치연합 일부 인사가 3김반대, 지역주의 타파를 내건 개혁신당에 참가하게 된다. 개혁신당은 총선 직전 YS, DJ에 반대하는 일부 현역의원이 참가하면서 당명을 <통합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속칭 꼬마민주당. 장을병, 김원기가 대표를 맡았고 노무현, 이철, 이부영 등이 소속된 정당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국회의원을 배출해야만 진보정당으로서 생존이 가능하다는 인식에 따른 소기의 성과는 이루지 못했고, 1996년 총선 이후 진보정치연합은 사실상 와해 직전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진정추는 1992년 4월 결성 당시 34개 지부, 1500명의 회원을 지닌 조직이었다. 지부는 회원 30인 이상과 3명 이상의 상근자를 보유해야만 지부로 승인되는 구조였다. 1993에 이르기까지 지부규모는 더욱 확대되었다. 1992년 진정추 초기 상근자 규모만 50명에 이르렀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1996년 총선 이후 진정련 상근자는 단 두 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한편 민정련 해산 이후 진정련에 가담하지 않은 세력은 <노동정치연대>,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추진위원회> 등으로 이어졌다.

소결

1987년부터 자신의 존재화 활동을 드러내기 시작한 정당지향적 노동자운동은 1987년 인민노련, 1989년 사노맹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정파, 그룹을 형성했고, 1992년 총선과 대선을 정점으로 한 후 1996년 총선 시점까지 명멸했다. 주로 살펴 본 인민노련의 사례처럼 1996년에 이르러 상당수가 거의 와해 상태에 이르렀다. 10년의 시간은 강산도 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짧지 않은 기간이지만, 10년 만에 1980년대 운동 역량이 거의 소진된 것처럼 보일 정도에 이르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겉보기에 가장 뚜렷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는 정권에 의한 물리적 탄압 속에서 조직이 충분한 성장을 이루기도 전에 싹이 잘라버렸던 것도 포함될 것이다. 일부 조직은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법정 투쟁을 전개하면서 과거와 같이 용공음해, 조작사건이라는 식의 대응을 넘어섬으로써 운동의 사기를 높였지만, 다른 많은 경우에 이러한 사건은 활동의 실질적 중단이나 조직내부의 불신과 불화를 낳았다. 또한 합법정당으로의 전환 이후에는 총선, 대선, 지자체 선거 등 반복되는 선거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계속되는 패배로 인한 사기 저하, 인적 재정적 역량의 소진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특히 활동역량을 노동조합을 비롯한 다른 운동 공간에서 정당으로 이전하면서 현실 노동자운동과는 괴리되고 재정적 어려움은 가중되는, 즉 허공에 떠 있는 조직이 되기가 쉬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활동가들의 생애주기 상 생계의 곤란함은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이러한 계기들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거나 실제로 언젠가는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을 잦아들게 하는 더욱 심층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무엇보다도 사상 이념적 혼란이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이러한 혼란이 낳은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혼란이 반성과 재출발이 아니라 교조주의와 청산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대한 계기는 탄원서 사건일 것이다. 당시 시점에서 탄원서에서 밝힌 노선전환은 내용 면에서도 신중성과 이론적 근거를 결여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의 탄압에 의해 쓰인 것이라는 점에서 ‘정신적 패배’로 작용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탄원서 이후 진정추 내부로부터 신노선에 대한 우경적 인식이 확산되고(이는 특히 기층으로 갈수록 더 심각했다), 나아가 사실상 전향에 다름 아닌 노선 전환(단적인 사례로 한국노동당 창당에 참여했던 다양한 정파 중 일부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운동으로 입장을 전환했다)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1970년대 말 서구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선언된 후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토대 위에서 반성과 재출발을 사고하려던 맥락에 비추어보면, 탄원서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 효과가 퇴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반면 진정추에 반대했던 세력은 교조주의라는 맹목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달리 말하면 ‘진정추 반대’가 곧 원칙의 고수라는 앙상한 입장만 남게 될 우려가 있었다. 기실 전위정당을 주창하던 세력에게 공백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전위조직이 담보해야 할 활동의 질이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노동조합 활동이 경제주의라면 전위정당이 수행해야하는 사회주의 정치활동이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당시 이에 대한 잠정적 대답은 사회주의 강령의 선전선동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노동조합 활동이든 선거참여든 간에 강령의 선전선동이 무매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전위주의에 대한 관념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정치활동관의 지속적인 동요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당지향 노동자운동 세력 대부분은 1992년 총선과 대선을 지나며 사실상 한사노당의 노선, 즉 ‘노동자 대중정당’ 또는 ‘광범위한 진보진영과의 동거를 통한 합법정당’ 노선으로 전환했다. 즉 파쇼적 탄압 시기에 불가피했던 지하활동 노선인 전위노선을 지양하고 노동자 대중정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이나 민중운동 세력 전반을 포괄하는 합작 방식으로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이 사실상 관철되어 나간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개량주의/혁명주의라는 앙상한 대립을 벗어나서 이러한 노선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것으로 사실상 전환되었다.


1990년대 노동조합운동: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

이처럼 1990년대에 정당지향적 노동자운동이 심각한 혼란을 겪는 와중에 노동조합운동 역시 커다란 변화를 맞이했다. 외형적으로 볼 때 1980년대에 기원을 둔 정당지향 운동이 크게 역량이 축소된 것에 비해 노동조합 운동은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19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건설을 계기로 조직규모가 계속 확대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민주노총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방침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국민승리21>이 결성되고 민주노총 위원장이 ‘국민후보’의 이름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함으로써 노동자정당 건설이 비로소 현실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 즉 현실에서 진보정당 건설 전략은 애초에 그것을 주장했던 이념지향적, 정당지향적 세력의 힘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성장에 의해 실현된 것이다. (이는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발전한 독일식 경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이 발전한 영국식 경로에 가까운 것이었다.) 반면 1990년대 정당 지향 노동자운동은 상당히 왜소화된 상태로 국민승리21에 참여했고 그 활동에 미칠 수 영향력은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성장해온 노동조합 운동은 거의 만성적인 위기론에 시달려야 했고, 실제 운동에서도 심각한 위기 국면에 직면해야 했다.

노동운동 위기론

1990년 1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결성되었다. 전노협은 14개 지역협의회, 2개 업종협의회에 456개 노조 166,307명으로 구성되었다. 1990년 5월에는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가 결성되었고, 14개 연맹 586개 노동조합, 200,197명 조합원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같은 1월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3당 합당을 선언했다. 거대여당 민주자유당의 출범은 전노협의 미래에 암운을 의미했다. 정권의 탄압은 전노협의 조직 와해를 목표로 한 것이었고, 노동조합 업무조사와 전노협 탈퇴강요, 무노동 무임금 적용,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노조 지도부 구속, 파업사업장 공권력투입이 이어졌다. 전노협은 이러한 정부의 탄압에 맞서며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을 계기로 5월 총파업을 전개했다. 한편 전노협 결성과 비슷한 시점인 1989년 말 집행부가 바뀐 7개 대기업 노동조합이 <전국대기업노조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조직은 그해 임금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직권조인 파동으로 와해되었으나, 1990년 하반기에 민주파로 교체된 대기업 노조가 1990년 12월 <연대를 위한 대기업노동조합회의>(연대회의)를 결성했다. 정부는 연대회의가 전노협과 공동투쟁을 벌이며 전노협에 가입할 것이라고 보고 탄압의 표적으로 삼았다. 1991년 2월 경찰은 연대회의의 공동간부수련회장에 난입해 참가자 67명 전원을 구속시켰고 연대회의를 사실상 와해상태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연대회의 사건 이후에도 대기업에서 순전한 어용노조는 더 이상 살아남기 힘들었다.) 전노협은 1991년 5월에도 박창수 열사 옥중살인 규탄 투쟁과 결합하며 총파업을 전개했다. 한편 1991년 10월 정부가 UN과 ILO에 가입을 추진하자 전노협과 업종회의는 (ILO공대위)를 결성했다.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ILO공대위는 한시적 대책기구였으나 전노협 창설 과정에서 가입하지 못했던 업종회의와 결속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해 1992년 11월 노동자대회에서는 노동법 개정, 민주대개혁 뿐만 아니라 산별노조 건설을 핵심 요구로 내걸었다. 선언문은 ‘ILO공대위를 통해 수행되는 공동투쟁의 성과를 드높여 민주노조 총단결로 발전시킨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그 구체적인 형식은 ‘산별노동조합의 총연합단체’의 건설이었다.
하지만 전노협의 미래는 출범 직후부터 내외의 도전에 직면했다. 내부로부터의 문제제기는 1992년 무렵부터 ‘노동운동 위기론’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당시의 상황인식을 살펴보면, 첫째 정부와 자본이 민주노조운동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고립화시키고 있다. 즉 ‘국제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가 국민경제에 악영향을 끼치지만 노동조합은 이기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공격이 여론에서 힘을 얻고 있다. 둘째, 정부는 연대회의 사건처럼 민주노조운동의 전략적 거점에 대해 집중 타격을 펼치고 있다. 셋째, 무노동 무임금, 손해배상 청구를 비롯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단위노조 활동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개별 자본 역시 강성노조에 대해서는 철저히 비협조적 태도를 취하며, 노사협조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며, 직능제와 같이 임금과 승진을 미끼로 노동자 간 경쟁을 강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탄압의 결과로 전노협의 조직 규모는 출범 당시의 절반 이하(30% 수준)로 축소되었다. 덧붙여 주로 대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주택이나 자동차 보유 등 자산증식 욕구가 높아지고 노동자 개인들에게 실익을 줄 수 있는 노동조합 활동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이 노조운동 전반의 침체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제시된 대안은 이후 1990년대 노동조합 운동의 노선 논쟁에서 원형을 이룬다. 몇 가지 대표적 견해를 요약하면 이렇다.

1. 개별 노동조합 차원에서 대중 활동을 개선하고, 노동조합 전반의 정책적 능력을 개선해야 한다. 즉 노동조합이 대중정서를 정확히 분석하여 조합원에게 투쟁의 근거와 동기를 정확히 부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 조직을 개선하여 일상적 대중활동과 전문활동 부서를 분별하여 운영하고 집행부-대의원-조합원을 잇는 조직구조를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또한 대기업의 임금체계나 노동통제 전략의 변화에 대한 전문적 정책연구 능력을 육성해야 한다. 특히 정책연구 과제는 개별 노조 수준을 넘어서 현총련, 대노협과 같은 대그룹 노조연합 단체나 전노협, 궁극적으로는 진보정당이 수행해야 한다. (이근중, 「노동운동 위기, 진단과 미래」, 『길』, 1992년 7월.)
2. 이제 노동조합은 사회발전이라는 시각을 전제로 한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예컨대 1992년 임금투쟁이 ‘총액임금 5% 제한 돌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이보다는 토지주택 문제의 해결이 사회발전과 노동자 생활조건의 개선에 더욱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토지주택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게 더 효과적이고 정당했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민주-어용의 도식적 대립을 지양하며 기업별노조 체계를 극복하는 조직 혁신을 이룰 수 있다. (박승옥, 「한국노동운동, 과연 위기인가?」, 『창작과 비평』 76호, 1992.)
3. 전투성, 비타협성, 정치지향성은 노동운동의 초기 현상으로 ‘진보적 조합주의(코퍼러티즘)’를 통해서 극복되어야 한다. 노자관계가 인간적, 민주적, 생산적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즉 관료적, 병영적 노동통제가 극복되고,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와 경영참가와 정치참여 보장이 이루어지고, 소득분배를 개선하고 인간적, 민주적 노자관계를 통해 노동조합이 생산성 향상의 적극적 요소가 되어야 한다. (김형기, 「변화된 노동정세와 ‘진보적 노자관계’」, 『전망』 3호, 1992)
4. 노동자 투쟁과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퇴조기에 처해 있다. 이러한 퇴조기는 노동자 대중의 자발성 저하가 일차적 원인이다. 지난 3년간 실질임금 상승, 근로조건 개선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여전히 불만은 많지만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전노협 창설 이전까지의 고양기에 활용한 투쟁전술을 더 이상 무리하게 반복할 수 없다. 또한 퇴조기에 노동자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무리한 경제투쟁에 집착하지 말고, 정당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또한 퇴조기에 전노협의 왜소화, 고립을 막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중간노조를 반어용노총(한국노총) 전선으로 결집시키는 다양한 실천이 필요하다. 특히 금속산업 노동조합에서 중간노조의 결집을 통한 금속산업노동조합 건설이 핵심적이다. (노회찬, 「퇴조기의 민주노조운동과 전노협」, 『길』, 1992년 8월.)

즉 이러한 대안들은 ‘노동조합의 활동작풍을 개선해야 한다’거나, ‘과도한 임금투쟁을 지양하고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거나, ‘정부와 자본은 노동자의 노동, 생활조건 개선과 경영참가를 받아들이고, 노동조합은 생산성 향상에 협력하는 진보적 코퍼러티즘을 지향해야 한다’거나, ‘퇴조기에 노동자의 다양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한계를 넘는 진보정당 운동이 활성화되어야 하며, 노동조합은 한국노총에 대한 반대를 최소공약수로 해서 광범위한 결집을 시도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각각 요약될 수 있다. 결국 위기 논쟁은 노동조합운동 이념의 탈각이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노동조합운동도 이념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실용주의적이거나 코퍼러티즘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어째서 제안된 입장들의 스펙트럼이 이렇게 구성되었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백’으로 표현되는 정신적 패배가 많은 활동가에게 준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에서 사회주의 지향은 억제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진보정당 운동세력의 일부는 두 측면에서 노동조합 노선에 영향을 끼쳤다. 우선 정치조직, 대중조직 분리구축론으로 정치활동은 정당이 담당하고 노동조합은 과도한 정치적 투쟁을 자제하고 조합원의 관심사와 이익을 우선시하는 노동조합 본연의 활동에 치중해야 한다는 관념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퇴조기라는 시대규정과 함께 수세적인 태도를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또한 정당운동으로 상당히 많은 수의 활동가가 이전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에 공백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편 신노선에 조응하는 노동조합 활동의 전환에 대해, 다른 민중민주주의 운동 진영에서 유효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1992년 시점에서 제안된 대부분의 대안들은 사실상 거의 무망한 것이었다. 사회발전적 노동운동이든, 진보적 코퍼러티즘이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파트너’, 즉 코퍼러티즘적 정부와 자본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1992년 이후에도 코퍼러티즘적 지향은 민주노조운동과 함께 성장했고, 1993년 김영삼정권의 신노사관계 선언으로 등장으로 더욱 세력을 확대하고 결정적으로 1997년 김대중정권의 등장으로 만개하게 되었다.) 이제 남는 길은 전노협의 조직 축소, 사회적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전노협 조직 확대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길은 처음부터 사실상 수세적이거나 임기응변적인 것이었고, 노동조합운동의 이념에 대한 모색보다는 활동작풍과 조직형태, 사업계획 토론에 방점이 찍히게 되었다.

노동조합의 이념, 조직노선의 전환 (민주노총 건설 논쟁)

먼저 모색된 것은 전노협의 조직 확대였다. 이미 1992년 전노협 내부에 <조직발전소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조발소위는 전노협과 지노협의 강화를 전제로 하여 참관, 교류노조와의 결합을 강화함으로써 조직을 확대하고 민주노조 총단결을 실현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하지만 1992년 하반기부터 전노협을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로 규정하고 이를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으로 규정하는 노동운동 위기론 논쟁은 이미 전노협의 위상에 대한 확신을 감소시키는 계기였다. 이러한 와중에 김영삼정권의 등장을 전후한 시점에 새로운 흐름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영삼이 대통령후보로 확정된 후 1992년 7월 이후로 병원노련, 전문노련, 건설노련, 사무금융노련, 대학노련 등 5개 연맹에 합법성이 부여되었고(노동조합 조직대상이 실제로 중복되지 않으므로 복수노조 금지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판결), 언론노련은 같은 해 12월 합법성을 획득했다(상급노조 가입이 법적 강제사항이 아니라는 판결). 따라서 업종회의에서는 노동법 개정이나 전노협과의 공동사업을 통한 민주노조 총단결의 필요성이 급격히 감소할 수도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1993년 김영삼정권이 출범 직후 1993년 우선 ILO 권고안이 도착했다. 복수노조금지 철폐, 교사공무원 단결권 보장, 3자개입금지 철폐가 그 요지였다. 1993년 3월 ILO 권고 직후 노동부장관은 하반기 노동법 개정을 공언했고, 무노동 부분임금 가능성을 언급하고, 일부 해고자 복직을 추진함으로써 ‘노사관계 개혁’ 가능성을 시사했다. (하지만 1993년 하반기가 되자 장관은 노동법 개정 연기를 발표했다.) 이러한 조건에서 전노협 내부로부터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맥락의 조직발전 계획이 제출되었다. 즉 현실적으로 민주노총이 전노협 강화에 의해서 건설될 수 없고, 새로운 연대틀을 중심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3년 2월 이른바 ‘김영대 안’). 이러한 논의가 제기되는 와중에 1993년 6월 전노협과 대기업 노조(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 업종회의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를 결성하였다. 즉 새로운 안이 점차 현실화되어 간 것이다. 이러한 의견 차이는 1994년 1월 전노협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위원장 경선에 세 명의 후보가 출마함으로써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선거에서 상호간 쟁점이 투명하게 제기되고 토론되지는 않았지만, ‘민주노조를 모두 포괄하는 조직을 시급히 건설하자는 입장’(전노협 한계론)과 ‘전노협과의 공동사업 속에서 업종, 대공장 노조들이 투쟁성과 민주성을 공고히 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진 후 건설하자는 입장’(전노협 중심론) 양자가 여전히 견지되었다.
선거 결과는 후자의 승리로 끝났지만 논쟁은 종결되지 않았고 1994년 4월 <조직발전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재논의에 들어갔다. 여기서는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건설 시점과 건설될 조직의 구성 원리가 쟁점이 되었다. 즉 산업별 노조 건설을 목표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업종별 노조로 나아갈 것인가. 특히 금속산업에서 업종별연맹(협의회)로 구성하자는 입장은 ‘업종별 동질성을 토대로 추진력이 생겨나 동종업종 내 노동조합을 효과적으로 결집시킬 수 있고 민주노총의 규모가 양적으로 확대되며, 산업별노조 건설을 앞당길 수 있다’는 것이었고, 그에 반대하며 산업별 노조의 원칙을 견지한 입장은 ‘동종산업 내 업종간 차별성이 갈수록 넓어지고 실천단위가 세분화되어 공동투쟁이 협소화되며, 향후 산별전환이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직 원리의 차이는 정치노선으로는 어떤 함의가 있었나? 산업별노조를 지향하는 안은 ‘노동자계급의 통일성을 강화하는 게 조직형태의 목표여야 하며, 이를 통해 자본가의 착취로부터 노동해방을 이루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한 반면, 업종별연맹을 먼저 구성하자는 안은 ‘노조 대부분이 합의할 수 있는 최소강령에 입각해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 역시 지역이나 단위 사업장에서는 그 배경과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1994년 8월 전노협 중앙위원회 결정은 절충적인 것이었다. 즉 ‘업종연맹을 기본단위로 업종별 조직화를 추진한다’, ‘업종별 대표를 중심으로 금속산별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뒤 민주노총 건설과 동시에 준비위원회로 전환한다’, ‘민주노총 준비위원회에는 업종별(산업별), 지역별, 그룹별로 가입하여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1994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민노준)가 발족했다. 민노준은 1995년 상반기 임금인상 투쟁과 함께 사회개혁 요구에 최우선적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여기에는 의료보험 통합과 보험적용 확대, 국민연금의 민주적 관리운영, 세제와 재정개혁, 재벌의 경제력 집중 규제, 교육개혁 등 다섯 가지가 핵심 요구로 선택되었다. 민노준은 사회개혁 투쟁의 의의를 노동자와 국민생활 개선과 함께 노동조합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고 국민적 지지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결국 1992년부터 강하게 제기된 ‘노동운동 위기론’은 노동조합의 양적 확대를 통한 전노협 고립성을 탈피하고, 김영삼정권의 등장과 함께 정부와의 협조를 통해 복수노조 금지를 제거함으로써 합법성을 얻어내고, 사회개혁 요구를 통한 국민여론을 개선한다는 코퍼러티즘 노선으로 점차 뚜렷한 변화를 낳았다.

민주노총 건설과 노사관계개혁위원회

1995년 11월 11일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창립되었다. 민주노총은 기존 조직을 산업별연맹과 지역본부라는 두 축으로 재편했고, 861개 노조 40만 조합원에 15개 업종, 10개 지역본부, 2개 그룹협의회를 가맹조직으로 두었다. 민주노총 1기 집행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기치로 참여와 투쟁 전술을 통해 사회개혁투쟁을 전개한다는 입장을 제시했다. 바로 이때 1996년 4월 총선 직후 청와대가 한국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노동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그 후 같은 달 청와대에서 민주노총 지도부가 참석한 가운데 <노사관계 개혁선언>을 발표하고, 5월 대통령 직속의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설치했다. 이는 새로운 지향을 밝힌 민주노총에게 중대한 시험대가 되었다. 노개위는 노사대표 각 5명(한국노총 3명, 민주노총 2명), 학계 10명, 공익위원 10명 등 30명으로 구성되었다. 신노사관계 구상의 요지는 이렇다. 정부는 물가안정과 소득분배 개선, 사회복지 확충을 위해 노력하고, 기업은 고용안정과 고임금을 보장하고, 노동조합은 생산성 향상과 품질개선, 기술혁신을 위해 노력하며, 삼주체가 모두 교육훈련과 지식정보 투자를 극대화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노개위는 1990년대 초반 제시된 진보적 코퍼러티즘과 비슷한 외형을 띠었다.
당시 민주노총은 노개위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처럼 제시했다. 첫째 민주노조 진영에서 매년 노동법개정 투쟁을 했지만 임금, 단체협상에 비해 조합원 관심이 적은 게 사실이고 오히려 노개위에 참가함으로써 오히려 조합원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투쟁을 조직할 수 있다. 둘째, 전국중앙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의 고유 임무가 정책 참가이기 때문에 노개위 참가로 인해 민주노총이 정부, 자본을 대상으로 한 교섭에 단초가 마련될 수 있다. 셋째, 이번에는 반드시 노동법을 개정해야 한다. 특히 상급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제 기능을 하려면 합법성을 확보해야 하고(법외조직으로 계속 남아있게 되면 연맹, 단위노조와 결합력이 떨어진다), 공무원, 교사의 단결권이 인정되어야 민주노총 조합원 규모가 70만 명 이상으로 획기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노개위 내부의 논의는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다. 자본은 개별적 노사관계에서 정리해고제, 변형근로제, 근로자파견제 관철에 총력을 기울였고, 민주노총은 집단적 노사관계에서 복수노조 금지, 제3자 개입금지, 정치활동 금지 폐지와 공무원 교사 단결권 보장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하지만 개정안은 점점 더 민주노총의 기대와 어긋나는 방향으로 진척되었다. 민주노총은 노개위 참여와 불참, 재참여 문제를 두고 계속 논란을 빚었고, 12월 13일 총파업에 돌입할 것인가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이러던 중 신한국당이 12월 26일 새벽에 안기부법 개정안과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고, 해가 넘어간 1997년까지 파업은 지속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여야 영수회담을 거쳐 2월17일 대국민 사과를 발표하고 노동법 재개정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1997년 3월11일 임시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날치기 법안을 폐지하고, 4개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개정 노동법은 상급단체 복수노조 금지조항을 곧바로 폐지하고, 정리해고제 시행시기를 2년 유예한 것을 제외하면 극히 부분적인 개정에 불과했다.
이처럼 민주노총의 코퍼러티즘 지향은 처음부터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김영삼정권 내에서 민주노총을 체제 내로 포섭하려는 경향보다 배제하려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고 자충수를 거듭함에 따라 총파업이 발생함으로써 코퍼러티즘 지향이 지닌 내적 모순은 당분간 잠복될 수 있었다. 즉 민주노총 합법화, 정책참여와 사회개혁투쟁을 통한 민주노총의 사회적 위상 강화, 시민운동과의 연대,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1997년 대선에서 국민후보 전략은 그럭저럭 작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IMF 경제위기, 1997년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과 노사정위원회 설치를 계기로 다시금 폭발하게 되었다. 1998년 이후 민주노총 내부의 논쟁은 노사정위원회 참가인가, 총파업인가로 양분되고 이 중심축을 통해 세력구도가 형성되어 지금도 완강하게 지속되고 있다.

노동자정치세력화와 민주노동당 건설

1990년 초반 이후로 전노협을 비롯해 민주노조운동과 정당의 관계 형성은 계속 난제로 남아 있었다. 1997년 대선 이전까지 정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공식적 지지, 지원은 없었다. 1990년 3월 전민련 대의원대회에서 민중정당 건설이 부결된 직후, 4월 20일 전노협 중앙위원회도 “임원, 중앙위원, 지역과 업종협의 임원은 조직 내외의 여건을 감안할 때, 정당활동을 하는 것을 당분간 자제한다”고 결정했다. 또한 1991년 12월 한사노당의 후신으로 노정추가 결성된 직후 전노협 중앙위는 ‘개인의 정치활동(정당참여)은 직위여하를 막론하고 규제하지 않으며 전노협 및 지노협 임원은 정치(정당)활동을 함에 있어 직책 사용을 하지 않고 개인자격으로 참여한다’고 결정했고, ‘전노협의 임원은 정당활동 참여시 대외적으로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공개적인(공공연한) 활동을 자제한다’는 것을 중앙위원회 내부적으로 결의했다.
1996년 총선 직후 상황에서 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할 세력은 사실상 거의 희박해보였다. 진보정치연합은 1996년 9월 대의원대회에서 1997년 대선에 독자후보를 출마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진보정당건설에 나서기로 결정했으나 조직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진보정치연합은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창당과 함께 공식 해산했다.) 민중정치연합이 해소된 후 진보정치연합에 합류하지 않은 세력은 각개 약진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1993년 김영삼 정권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 논의를 통해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서 분리된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를 지지하며 협애한 의미의 통일운동체로 사실상 성격이 전환되었고, 그 활동력이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하지만 변화의 흐름은 민주노총에서 나왔다. 민주노총은 1996년 총선에서 ‘새로운 정당의 토대를 구축한다’는 목표로 3명의 노동자후보를 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부산, 경북, 서울에서 3명의 후보가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평균 12.1%를 득표한다. 1997년 들어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논의는 ‘의회에 노동자 대표가 있어야 한다는 게 총파업의 교훈’이라는 논리와 함께 본격화되었다. 1997년 2월부터 정당건설, 2000년 총선 대응, 1997년 대선에서 독자영역 구축 등이 언급되었고, 1997년 5월에 이르러 민주노총 정치위원회 사업계획안에서 ‘민주노총이 개혁적 국민정당 건설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1997년 대선에서 각계각층을 대변하는 국민후보 운동을 전개하고 국민후보운동을 지지하는 개인으로 구성된 정치조직(민주개혁연합)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식화되었다. 진정련은 7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국민후보 운동의 전개를 결의하여 흐름에 참여했다. 전국연합도 이와 같은 결의를 함으로써 1997년 6월 민주노총, 진정련, 전국연합을 중심으로 <국민후보운동 추진을 위한 실무모임>이 구성되었다. 한편 이러한 흐름 속에서 8월 오세철 교수의 발의에 따라 <노동자민중의정치세력화진전을위한연대>(정치연대)가 결성되었다. 여기에는 <한국노동청년연대>(한청련), 전국노련, 노정연, 노진추와 학생단체, 교수 등이 참가했다. 민주노총, 진정련, 전국연합, 정치연대는 진보진영 전체의 공동대선대책기구의 위상을 지닌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을 결성함으로써 이후 민주노동당 결성을 향한 결정적 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합은 불안정한 상태였다. 정치연대는 국민후보운동에 참가를 거부한 단체(한청련), 참가 후 ‘일어나라 코리아’ 사건을 계기로 탈퇴한 단체(전국노련, 오세철 교수), 이후 민주노동당 건설 과정에 함께 한 단체(인천 노정연, 노진추)으로 분리된다. 또한 전국연합의 경우도 애초 국민승리21 참가를 검토할 때 김대중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낮다는 판단이 잠재되어 있었으나 여당 후보가 이회창과 이인제로 분리되고 김대중-김종필 연합이 형성되면서 김대중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판단에 따라 ‘민족민주운동의 정치세력화와 민주적 정권교체를 동시에 추진한다는 방침 중에서 후자가 방기되고 있다’는 이유로 국민승리21 활동을 사실상 보이콧하는 내부 흐름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1990년대 초반 진보정당을 주도하던 세력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진정련은 거의 조직이 와해된 상태에서 사실상 개인 인사들의 참여와 다르지 않은 양상이었고, 민정련에서 갈라진 세력들도 참여한 정치연대는 참여 시기가 늦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개입에 소극적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이 제한되어 있었다. 대선이 끝난 후 전국연합은 국민승리21에 참여한 상층인사들이 오히려 대거 김대중 민주당 편으로 이탈하고, 지역연합을 중심으로 조직을 재건하면서 민주노동당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선택했다. 정치연대로 일시 결합했던 흐름은 민주노동당 내부 활동을 전개하거나, <청년진보당>, <노동자의힘>과 같은 정치조직 결성으로 이어졌다.

소결

1990년대 노동조합운동의 노선전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전노협 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전노협은 물론 노동조합 협의체였지만 단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다. 우선 전노협은 사회경제적 요구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그 요구는 사회경제적 요구의 쟁취 그 자체를 넘어서 계급적 단결의 확대를 추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요구투쟁의 결과보다는 그것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 반면 그 후 전개된 노동조합 활동이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게 되었다는 의미에서 전노협의 역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 전노협은 1990년 출범 이후 대중적 정치투쟁의 주요 역량이었다. 셋째, 전노협 내에는 상당수의 사회주의 지향을 지닌 활동가들이 존재했다. 당시 수많은 활동가는 정파 또는 정당 지향을 원칙으로 지녔지만 실제 활동을 펼친 곳은 노동조합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념운동과 노동자 대중운동이 결합하는 공간은 정파조직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조합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전노협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이라기보다는 사회운동노조에 더 가깝다. (실제로 해외에서 전노협이 사회운동노조의 사례로 인용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전노협의 역사는 현재에도 사회운동노조에 대한 지향 속에서 항상 재평가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백’을 거치면서 정치적, 이념적 지향성을 지닌 활동가들이 대거 이탈하고,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대한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코퍼러티즘적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으로 전환이 발생한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신노선은 정치조직과 대중조직 분리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상 노동조합 활동을 방기하거나 노동조합의 수세적 활동을 정당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 위기론을 기화로 진보적 조합주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기치로 노동조합 활동에서 실제적 노선 변화가 발생했다. 1996년 김영삼정권이 설치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참여는 이러한 노선 변화가 낳은 자연스러운 발로였으나, 김정권의 거듭되는 자충수로 인해 코퍼러티즘 노선의 내적 모순은 당분간 은폐될 수 있었다. 1997년 IMF 경제위기는 이러한 노선변화에 대한 반성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또다시 김대중정권이 제안한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고, 1998년 2월 정리해고제 합의를 담은 사회협약을 조인했다. 하지만 노사정협약안은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고, 집행부 임원이 전원 사퇴하게 되었다.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된 후 1998년 3월 이갑용 집행부 출범, 1999년 단병호 집행부 출범, 2001년 또 다시 단병호 집행부 출범과 같이 노사정위원회 사회협약을 주도한 세력에 대한 민주노총 선거에서의 ‘단죄’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2004년 ‘저지와 분쇄를 넘어 쟁취와 확보로’를 내건 이수호 집행부가 당선되고 부위원장까지 석권함으로써 압도적인 세력관계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6년에 걸친 활동에 대한 엄밀한 반성을 필요로 한다.
1998년 이갑용 집행부는 노사정위원회를 우회하는 노정협상을 제기하고 5대 중앙교섭 요구로 첫째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철폐와 부당노동행위 근절, 둘째 고용안정과 생존권 보장, 셋째 고용 실업자 대책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넷째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해체, 노동삼권 보장, 노동자 경영참가, 다섯째 불평등한 IMF 이행조건 재협상을 내걸었다. 하지만 6월 5일 발표된 노정합의문은 5대 요구안 대신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남용 대책을 마련하고 법정노동시간을 주 40시간 단축하는 문제를 논의하고 노사정위원회가 실질적 합의기구가 되도록 운영한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이는 5대 요구안과 상당히 괴리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정리해고제와 근로파견제 철폐를 관철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사정위원회로 복귀하는 셈이었다. 이로 인해 민주노총 내부 갈등도 증폭되고, 노사정위 문제도 참여와 탈퇴를 계속 번복하게 되는 악순환을 낳았다. 한편 2000년 단병호 집행부는 ‘민주노총은 심각한 대중적 불신의 위기에 처해 있고, 선진 활동가들은 노동운동의 체계적인 전망에 목말라 있다’는 인식에 따라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이는 광범위한 관심과 토론을 불러일으키지 못한 채 유야무야 마무리되었다. (일부 좌파들조차 단병호 집행부의 재집권 프로젝트라는 식의 인식을 지녔다.) 2001년 8월 단병호 위원장의 구속 이후 직무대행 체계로 운영되던 민주노총은 2002년 4.2 총파업의 철회로 수감 중인 단병호 위원장을 제외한 모든 지도부의 총사퇴를 겪어야 했다. 또한 2003년 8월에는 노동시간단축과 장시간에 걸친 변형근로제 도입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노동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의 연대투쟁도 선언했지만, 공언했던 총파업을 조직하지 못했다.
이 시기에 걸쳐 단병호 위원장은 2001년 8월 형집행정지로 재수감됨으로써 민주노총 위원장이 최초로 임기 중에 수감되는 기록을 남겼고, 2001년 10월 출소직전 또 다시 구속되었다. 그만큼 민주노총의 저항은 격렬했지만, 현실에서는 패배와 후퇴의 연속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나? 일각에서는 민주노총 내부의 역학관계 상 집행부가 실제 조직을 다수파로서 장악하지 못했고, 어떤 사업을 입안해도 논의과정에서 불필요한 긴장이 발생하거나 집행과정에서는 이완이 발생하면서 지도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현실을 지적한다. 이는 분명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의 건설 자체가 이념과 노선에 따른 조직과정의 결과라기보다는 수세적 방어주의나 코퍼러티즘에 입각한 위기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민주노총의 건설 과정의 결과 그 누구도 지도력을 행사하기 힘든 게 현실이었다.
한편 민주노총 내부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 즉 노동자정당 건설을 향한 추동력은 1980년대 정파운동과 상대적으로 거리가 있는 노동조합 활동가들로부터 생성되었다. (물론 1980년대 정파운동이 생산한 현실적 효과가 상당히 크게 작용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의 생명력과 정당성은 민주노총의 이념 지향, 활동의 건강성과 직결된 문제였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사실상 만성적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민주노동당은 2002년 총선에서 10석에 이르는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급작스러운 성공을 거둔다. 이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에 양가적인 효과를 낳았다. 즉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으로부터 자립화, 또는 분리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즉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민주노총당’을 탈피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노총의 투쟁이 조합원의 적극적 참여와 열기 속에 진행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국민적 정당성과 지지도 취약한 마당에 더 이상 민주노동당이 민주노총의 이미지를 함께 감당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민주노총의 공식 지원이 민주노동당의 인적, 재정적 자원의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이러한 주장은 억제될 수밖에 없었지만,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에서 다시금 위기를 낳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는 기본적으로 특정 정파의 독점(공직당직 독점)에 대한 반발로 출발했기 때문에, 이는 결국 민주노총 내부에서 정파 간 갈등을 심화시키고 궁극적으로 노총의 분할도 초래할 수 있는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노동조합 활동의 혁신을 통해 이러한 정당, 정파 간 갈등을 완화하지 못한다면 정당과 노동조합 양자 수준에서의 분리는 극단화되거나 파국적인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1990년대 민중운동과 사회진보연대의 출범

1998년 12월 사회진보연대 출범했다. 사회진보연대는 1994년 결성된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와 1998년 결성된 <사회인연합>의 통합 논의를 거쳐 198년 12월 4일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이중 사회인연합은 <진보민중청년연합>(진보민청)에 소속된 <서울진보청년회>의 활동가들 일부와 새롭게 사회운동을 모색하는 청년층 활동가들이 결합하여 결성된 조직이었다. <사회인연합>은 1990년대를 걸쳐 급격히 축소된 사회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 동시에 민중민주주의 운동의 이념을 복원하기 위한 장기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여러 운동 세력의 소통과 공동 활동을 매개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사회진보연대> 결성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진보연대 출범 당시 정세 조건은 IMF 경제위기라는 전례 없는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그에 대한 운동 주체의 인식과 실천 경험은 극히 미약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형편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사회진보연대에게 주어진 과제는 무엇이었나?

1. 김대중정권에 의해 본격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발본적 인식과 실천이 요구되었다. 1997년 대선시기 국민후보운동을 펼치던 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진보정치연합, 정치연대, 전국연합을 비롯해 당시 민중운동의 주요 세력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지만 IMF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이 지극히 미흡했다. 국민승리21은 IMF 캉드쉬 총재도 한국의 재벌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주한미군 감축을 통해 예산을 절감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마치 IMF가 민주노총이 요구한 사회개혁을 촉구하는 동반자라는 식의 인식을 유포했다. 김대중후보가 당선된 후 미국과 정리해고제를 포함한 IMF 플러스 안을 합의한 후 분위기가 다소 변화하기 했지만, 국민승리21은 IMF 협약을 총파업으로 저지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대선에서 감표 요인이라는 이유로 쟁점화를 기피했다. 이러한 현실은 IMF 경제위기와 구제금융협약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과 실천의 부재를 의미했다.
2. 김대중정권은 IMF 개혁을 수행하기 위한 파트너로서 노동자운동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김대중은 1987년 이후 이르는 노동자운동 고양기에서도, ‘영국처럼 노동자정당 건설이 가능하거나 필요할 수 있지만, 바로 그 영국의 사례처럼 노동자정당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안정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즐겨 펼쳤다. 즉 노동자운동이 자신을 지지하고 정권교체를 이루는 게 노동자정당 건설을 주장하는 세력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식의 세련된 논리를 펼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김대중정권은 과거 노동조합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사들을 대거 포섭하여 노동정책의 주요 골목에 배치했다. 따라서 논리와 인적 자원을 통한 포섭전략이 김영삼정권에 비해 훨씬 더 강렬하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정권의 코퍼러티즘은 국가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해서 노동조합에게는 사회적 대화 파트너라는 형식적 지위만을 부여하는 ‘허구적’ 코퍼러티즘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노동자운동의 주체적 대응책 수립, 핵심적으로는 노동조합의 대안적 이념과 활동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시급했다.
3. 특히 IMF 구제금융 협약 이후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화나 실업의 문제가 긴급한 문제로 부상했다. IMF 위기 이전에도 한국의 비정규직 규모와 비중을 꾸준히 증가했으나, IMF를 계기로 정규직이 갑작스럽게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사례가 부각됨에 따라 민주노총의 체감도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의 조직률은 정체되기 시작했고,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반대투쟁의 사례처럼 비정규직 문제는 노동자운동의 정당성과 활력을 위한 사활적인 문제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IMF 이후 격화된 노동신축화와 노동자계급에 대한 분할 지배에 맞서며 계급형성을 지향하는 노동자운동의 재구축이 막중한 과제로 부상했다.
4. 이러한 노동자운동의 주체적 취약성은 전노협의 경우처럼 노동조합을 매개로 한 이념운동과 노동자 대중운동의 결합이 취약해진 현실을 반영했다. 1990년대를 거친 장기적인 역량 손실로 인해 이러한 시도를 이어온 맥이 상당히 약해졌다. 그러나 1990년대에도 민중민주주의 지향의 운동은 지속되었고, 새로운 국면에서 새로운 지향과 활동으로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이념운동과 노동자 대중운동의 결합을 매개할 수 있는 운동 경로를 창출하는 것도 중차대한 과제였다.
5. 1980년대 이후 정당지향 노동자운동은 장기간에 걸친 침체기 동안 역량이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동적 위치로 전략했다. 민주노총이 국민승리21을 추진함으로써 일부 세력은 기사회생의 기회를 맞이했으나, 국민승리21 차원의 적극적인 정치활동 프로그램을 구축할 엄두를 내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민주노총의 새로운 진보정당 결의에 따른 인적, 물적 자원의 지지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국민승리21에 잔류하지 않은 세력도 새로운 방향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기 위한 구체적 전망이 취약했다. 따라서 이러한 운동 세력을 포함해서 전체 운동 경향이 상호 발전적으로 결합하여 운동 전반의 활력과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운동 구조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했다.
6. 당시에는 김대중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시민운동이 새롭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김영삼정권 시기 경실련이 주목을 받았던 것처럼, 신자유주의 개혁이 합리적 대안으로 포장되기 위한 소액주주운동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는 대중 심리를 투기적으로 재편하는 역할을 하면서 노동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구조조정을 촉진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상층부 일부에게도 종업원사주제와 같은 방식으로 부메랑을 제공하는 신자유주의에 효과적 운동이 되었다. 이러한 시민운동은 김대중정권에서 새로운 역할 모델로 부상했고, 기존에 민중운동의 포괄범위에 있던 많은 운동단체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스스로의 성격을 비정부기구, 시민운동으로 표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오히려 노동자와 시민을 분리시키려는 새로운 시민운동에 맞서서 민중운동을 정당성과 생명력을 확대 강화하는 과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7.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1990년대 좌파운동이 계급모순과 함께 다차원적인 모순에 대항하는 운동들의 결합을 주장했지만 그 인식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거나 실천적 노력은 상당히 취약했다. 특히 노동자운동이 사회운동의 문제의식을 수용해서 혁신할 수 있는 노력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여성운동, 평화운동, 생태운동, 보건의료운동이 진정한 의미에서 변혁운동의 전망을 확장하고 풍부하게 하는 운동의 계기로서 형성되고, 노동조합이 사회운동의 실질적 주체가 되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제기되었다.
8. 1989-91년 사회주의권의 연쇄붕괴는 마르크스주의 이념, 전략, 운동에 대한 근본적 회의나 동요를 낳았다. 1990년대에 걸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이러한 노력이 사회운동론 차원에서 정립되고 실천을 통해 확장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도되어야 했다. 사회진보연대는 이러한 반성과 모색을 결산하고, 쇄신된 이념, 전략, 운동의 맥락에서 사상적 지평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전개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았다.

물론 1998년 출범 당시 시점에서 사회진보연대는 매우 불완전하거나 모순적 인식을 담고 있었고, 실천과정에서 오류나 한계는 필연적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회진보연대 활동에 대한 냉철한 평가와 엄정한 자기비판이 필요할 것이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처절한 실패, 민중운동의 무기력과 자괴감, 패배의식을 딛고 노동자운동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주의 붕괴와 혼동의 10년을 딛고 자기 발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이때부터 사회진보연대의 과거 현재 미래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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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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